<억울한 데바닷다>
붓다의 사촌이었던 석가족 출신의 데바닷다Devadatta는 아난과 친형제였습니다. 데바닷다는
붓다와 같이 석가족 왕자 출신의 사문이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억울한 누명을 쓴 붓다의
제자입니다.
붓다의 첫 번째 후원자인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의 아들 아사세와 공모하여 붓다의 교단에
반역을 꾀했으나 아사세는 성공하고 데바닷다는 실패한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데바닷다는 큰 앙심을 품어 붓다께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고,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
달려들게 하는 등, 극악무도한 ‘붓다 살해 미수죄’로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활발한 초기불교와 교단에 대한 연구의 다각화의 성과에 의하면 데바닷다는
명예 회복을 해주어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전에 전해져 오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기록자가 인간인 이상 ‘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쓰여진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 P) 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
千佛洞에서 발견한 신라 스님 혜초의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내용이
강력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혜초는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7세기 당시 인도 동북부에서
데바닷다를 시조로 하는 불교의 종파를 확인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붓다의 교단이 늘 조용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수행의 무리가 많아질수록 예기치 못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붓다께서 계율을 정하게 된 연유도 바로 그런 문제 들이 발생하지 못하게 교단내 공동생활의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기에,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그것은 금한다’라고 한
가지씩 추가된 것이 후에는 상당히 많은 계율이 제정되게 된 것입니다.
붓다의 교단은 안정되었고, 왕들과 부호들의 보시로 비교적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수행처를 보시물로 편하게 꾸미는 제자들도 생기고, 심지어 탁발을 나가지 않고 음식을
저장했다 먹는 제자도 생기게 됩니다.
자연히 교단의 분위기가 이런저런 의견들로 술렁이게 됩니다. 게다가 교단의 인원은 한 곳에
머물기에는 너무 많아 몇 곳에서 분산하여 수행을 하게 되었고, 붓다께서는 수행처를
돌아가며 제자들과 함께 하시게 됩니다.
데바닷다는 자신이 마음속에 품었던 교단의 ‘개혁안’을 비구들에 게 말하며 500명의 동의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제 데바닷다는 붓다께 공개적으로 교단에서 오법五法의 실행을
요구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분율에 나오는 데바닷다가 요구한 오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소금을 먹지 않는다.
둘째,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셋째,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넷째, 걸식한다.
다섯째, 봄~여름 8개월은 태양 아래에 앉아 있고, 겨울 4개월은 초가집에 머문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거론하며 붓다께 교단의 양위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는 오법을
고행주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사리불이라면 몰라도 너는 절대 안된다”라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신 것으로 『숫타니파타』에 전해집니다.
정리하면 데바닷다는 느슨해진 비구들에게 좀 더 적극적인 수행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강력한 아란야阿蘭若행과 두타頭陀행으로 돌아
가자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앞에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불교와 교설만으로는 분간이 쉽지 않은 자이나교의
철저한 무소유와 계율주의에 비해, 붓다의 교단은 수행의 방법에 좀 더 중도적인 견해를
유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이나교의 한 분파인 공의파空衣派는 아직도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며, 물도 그냥 마시면
물속의 세균이 죽는다고 걸러 마시고 있습니다. 붓다의 중도주의와 자이나교의 계율주의
중 어느 쪽이 수승하다는 논쟁을 떠나 붓다의 불교는 인도에서 12세기에 완전히 힌두교에
흡수당하며 그 존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편 고행주의 자이나교는 인도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남았고, 데바닷다를 추종하는 수행자들은 무려 7세기까지 그 맥을 이어 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