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상견례
올해 대학원을 마치고 수련목회자로서 목회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아들 바울에게 전화가 왔다. 파송받은 교회는 수련목회자에게 설교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다 보니 아들은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도 설교할 기회가 없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부담은 되겠지만 제대로 훈련받고 있는 것 같아서 아비의 마음은 내심 기뻤다. 그날의 전화는 설교에 대해서 목회 대선배인 아비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서 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는 짧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데 이제 설교 초년생에게는 적지 않은 고민이라는 말이다. 어떤 말씀을 전해야 이 짧은 말씀으로 40분의 분량을 채울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요즘 인터넷 검색창을 누르면 이 본문으로 된 설교나 해석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굳이 아비에게 전화해 준 아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본인이 준비한 내용을 들어보니 그동안 내가 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많았다. 괜히 내 설교 방식을 그에게 주입하는 게 될 것 같아서 지금 준비한 대로 해도 은혜로운 설교라고 아낌없이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다. 다만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몇 마디 충고만 했다. 그리고 당일 설교한 내용이 영상으로 올라서서 자세하게 들어 보았다. 요즘 젊은 사람 감각으로 차분하면서도 진솔한 말씀을 전했다. 짧은 본문이지만 끝내 40분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제대로 전하는 아들을 보면서 아비만이 느끼는 감사가 있었다.
아들은 늦둥이 셋째로 태어났다. 둘째와의 6년 터울이 지니까 딸만 둘이 있었던 내게는 뒤늦게 하나님께 받은 귀한 선물이다. 그 당시 나는 사도 바울의 영성에 푹빠져 있어서 앉으나 서나 그를 묵상했던 때였다. 그는 예수님 다음으로 신약성경의 최고의 영적 거장이며 진정 목회자로서, 전도자로서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영원한 교회 일꾼이다. 학위 논문도 사도 바울에 대해서 썼을 정도로 목회하면서 바울의 재발견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런 때에 아들을 선물로 주셨으니 자연스럽게 바울을 본받아서 그의 이름을 적용하고 싶었다. 결국 아들은 바울처럼 복음으로 잘 성장하였고 성령을 체험하면서 누가 강제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서원하였다. 마침내 수련목회자의 과정을 통과하고 지금 이렇게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 것이다. 다 늙은 아들이라도 아비에게는 어린 아들일 뿐이라는데 하물며 늦둥이 아들이야 항상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그날 그의 모습에서 어른의 기풍이 물씬 풍겼다.
그런 아들이 2024년 10월 7일에 상견례 날짜를 잡아와서 예비 사돈을 만나게 되었다. 아들과 그의 연인 현이는 감신대학교 입학 동기로 만나서 오늘까지 무려 8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만남의 끈을 소중히 간직하며 달려왔다. 20대 초반 풋풋한 마음으로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군대를 거쳐야 하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운명의 터널을 통과할 때 연인은 얼마든지 바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인생의 동반자로 서로를 선택하고 이렇게 상견례 자리를 마련했으니 현대판 순애보(殉愛譜)가 따로 없는 듯하다. 결혼 날로부터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앞에 두고 이루어진 상견례는 한편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꾸밈없이 만남을 이어가는 그들의 지고지순(至高至順)의 사랑 이야기는 부모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형편상 타지에서 살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매사 잘하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가 늘 마음에 걱정으로 남을 때가 많았었으니 그를 생각할 때마다 편안함 보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 아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부모를 떠나도 될 성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 진 것이다. 그날의 상견례로 인해 아들에 대한 상념이 기우(杞憂)였음을 실감하였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 되라고 하셨다. 그때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말씀을 부모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부모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당연한 말씀이다. 언제까지 품에 끼고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땅의 모든 부모의 DNA는 항상 아들을 어리게만 보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품에 끼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은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게 창조의 질서이고 건강한 가정과 세상을 만드는 원칙이 아니던가? 그런데 현대는 이런 원칙이 바뀌는 경우가 흔하다. 아내는 남편과 떨어져 살고 엄마는 아들과 붙어산다. 자녀들 교육 때문에 남편을 떠나 자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이 시대의 부모들 말이다. 이런 형태가 가정을 깨는 주범이다. 아들이 커가면서 아비보다 잘하고 있는데도 부모는 여전히 아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戰戰兢兢) 하며 속을 태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모두에게 유익함을 마음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상견례 자리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현이와 함께 도착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비 사돈과의 이야기 속에는 남의 집 귀한 아들과 딸을 피차 자신의 친자녀로 삼아야 하는 마음을 나누었다. 이제 부모가 할 일은 뒤에서 그들을 마음껏 축복하는 것만 남았다. 다 자라서 어른의 길을 걷고자 하는 그들을 위해 새벽 공기가 차갑다고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바울의 상견례 이후 마음 깊이 새겨지는 하늘의 소리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언 16:3).
쉬지말고 기도하라 제목으로 설교하는 아들 홍바울 전도사
듬직한 아들 바울과 현이, 그리고 양가 부모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알콩달콩주님안에서행복하시길기도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축화. 드림니다. 아름다운. 한쌍의. 비둘기. 가치. 넘으. 이쁜. 인연. 인거. 가트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