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도에 피어난 사랑 / 곽주현
벌써 30년 전쯤 현직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육지와 아주 먼 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지도를 펼치고 봐도 깨알 크기여서 이름도 찾기 어려운 곳이다. 흑산도 옆에 있는 영산도라는 섬이다. 직접 가는 여객선이 없었다. 흑산도까지 네 시간 동안 일반 여객선을 탔다가, 다시 사선(私船)을 빌려 이십여 분 더 가야 닿는다. 그런 곳에서 늘 손을 잡고 서로 의지해 걷는 부부를 만났다.
흑산 초등학교 영산 분교장이 거기에 있었다. 교사 한 사람, 전교생이 다섯 명이다. 3, 4, 5학년을 한 교실에서 모아 놓고 3부 복식(교사 한 명이 세 개 학년을 수업하는 것) 해야 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 줄 모르게 바쁘게 생활했다. 한때는 학생 수가 80명이 넘는 학교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낙도 중의 낙도다. 수도 시설도 없어 물탱크에 빗물을 받아 저장해 놓고 식수로 사용했다. 다행히 학교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것도 열흘 정도만 비가 안 오면 바닥이 드러났다. 학생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편부모 가정이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는 3학년인데 이 섬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는 분의 아들이다.
어느 날 목사 부부가 학교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이런 섬 구석에서 애정 과시를 하나?’ 하는 생각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맞았다. 목사는 체격이 건장하고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생겼다. 사모도 미인이고 미소가 가득한 인상 좋은 얼굴이다. 그런데 서 있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수업 중이라 몇 마디 인사만 나누고 두 분은 곧 자리를 떴다. 돌아서면서 이런 곳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나간다.
창밖을 보니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모가 몸을 심하게 흔들며 매우 불안정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다른 주민을 잘못 보고 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방금 만났던 그분들이다. 심한 지체 장애를 안고 있었다. 좀 충격이었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다른 골목길로 접어들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은 엄마 아빠가 다녀가자 책 읽는 소리가 더 낭랑해졌다.
며칠 후 학부모인 목사 댁에 초대받았다. 반갑게 맞이하는 사모의 선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가 아이처럼 해맑아 보인다. 신체의 반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장애가 있는 덜렁거리는 왼쪽 손을 항상 옆구리에 붙이고 있었다. 저녁을 차린다며 사모가 부엌에서 음식을 요리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 몸으로 오른손에는 칼자루를 쥐고 발에는 비닐장갑을 끼고서 김치를 눌러 썰었다. 매운탕용 생선도 별 어려움 없이 다듬고 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든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 특별한 미소를 가득 품고서는 “선생님, 이상하게 보이시죠. 발을 손처럼 깨끗이 씻었어요. 발이 손 노릇하면 안 되나요?” 했다. 그 당당함에 내가 오히려 무안해서 눈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다. 손빨래, 바느질도 큰 불편 없이 할 수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덧붙인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생선회를 뜨는 것 등 섬세한 일은 남편이 곁에서 도우며 한 몸처럼 움직였다. 얼마 후 전복, 홍합, 거북손, 오징어, 우럭회 등 이곳 해산물로 한 상 가득 차려 냈다. 고마움이 절절한 긴 기도가 끝나자 젓가락을 들었다. 찌고, 굽고 볶아낸 음식 맛이 유명 맛집 못지않은 솜씨다.
몇 달이 지나자 우리는 한 집안 겨레붙이처럼 가까워졌다. 학부모이고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거센 바람 소리만 들리는 외로운 섬이기에 서로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번갈아 가며 서로 초대해서 식사하곤 했다. 두 분은 이 외진 곳에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만날 때마다 늘 웃는 모습이다. 봉지 커피 한 잔의 작은 대접에도 고맙다는 말을 두세 번 했다. 나도 직접 낚시해서 잡은 생선으로 매운탕을 끓여 세계 최고의 맛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웠다. 별다른 양념도 없이 된장을 풀어 막 건져 올린 고기로 끓인 우럭탕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였다. 남자는 청년 시절 기독교계 여학교(미션 스쿨)에서 전도사 신분으로 성경 과목을 가르쳤다. 신체 건장하고 미남이고, 미혼이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중에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데 말이 없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물으면 낯빛이 홍당무가 되어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못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졸업하고 학교를 떠났다.
어느 날 전도사가 책을 한 권 사려고 광주 충장 서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그 애의 같은 반 친구였던 한 제자를 만났다. 인사말 끝에 그 애의 근황을 물었다. 머뭇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금 그녀는 위중한 병을 얻어 누워있다며 너무 안타깝다고 눈물을 보였다. 엊그제 통화를 하기는 했지만, 처지가 그러니 누구의 전화도 거절하고 폐인처럼 지낸다고 전한다.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도 깊어 앞날이 기대되는 학생이었다. 안타까웠다.
책은 잊고 제자가 가르쳐 준 주소로 찾아갔다. 듣던 대로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앉기도 힘들어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그녀는 눈만 깜박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문자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어떤 위로의 말도 생각나지 않아 장대처럼 서 있어야 했다. 앉으라는 그녀 엄마의 채근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숙였다. 이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이 처녀를 꼭 일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애절하고 간절하게 빌었다. 그날은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나왔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어 며칠을 뜬눈으로 셌다. 다시 그 집을 찾았다. 그제야 그의 어머니에게서 이렇게 된 사연을 들었다. 그렇게 부지런한 애가 늦게 일어나고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란다. 몸살인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푹 쉬라며 방문을 닫아 주었다. 다음 날 아침밥 먹으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더란다. 문을 열어보니 침대 옆에 쓰러져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뇌졸중이라며 신체 왼쪽이 마비가 와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화장실도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세 번 그 제자를 만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일 년이 지나자 겨우 혼자 화장실은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연민이 사랑으로 익어갔다. 이 처녀는 자기가 책임져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이 섰다. 그녀의 부모에게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불행은 한 사람으로 끝나야 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그 후 일 년간 끊임없이 설득한 끝에 결혼하고 곧 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 첫발을 딛던 날을 잊을 수 없다며 표정이 굳어진다. 사모를 업고 오는데 등에서 계속 훌쩍이는 소리가 났지만 못 들은 척했단다.
12년을 이곳에서 살았고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열한 살이 되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우치는 똘똘한 아이다. 사모는 도움 없이도 신도들 가정 심방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목사님은 미국 선교사로 갔다가 가족 모두 시민권을 얻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은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의 쾌 높은 직책에 근무하고 있고, 결혼해서 남매를 두었다. 엊그제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에 피난 가 있다고. 그들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보았다. 그때 기독교 신자가 될뻔했다. 삼 년 전에 그 영산도에 다시 가보았다. ‘가고 싶은 섬’에 뽑혀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고 여행자를 위한 펜션도 짓고 확 변해 있었다.
첫댓글 대단한 부부네요. 그 사랑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어도 쉽지 않은데 참사랑을 실천하는 목사님이네요. 감동입니다.,
와우!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네요.
선생님의 펜 끝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잘 녹여 내셨어요.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는데도 흔들리지 않으셨군요. 하하.
아참 3부 복식하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IMF이후 교원 3년 정년단축에다 100명 이하 소규모학교 무조건 통폐합 등으로 신자유 논리가 교육에도 몰아치던 광란의 시절이었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짜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전율이 느껴집니다. 동료 한 명도 없는 그곳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신 선생님의 사랑도 감동이고요. 평생의 좋은 친구를 얻으셨네요. 기독교 신자가 될 뻔까지만 해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