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 뒤에 공평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이기면 축복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가장 큰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 눈으로 보면 나만큼 이 세상에서 무임승차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분이 계시다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은 고해라고 하지만 주님은 고난을 축복의 강이라고 하십니다. 이 강만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건널 수 있는 강을 주십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려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고난의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사울은 수 천 명의 부하를 거느렸어도 약점이 있었지만 다윗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 않으면 고난의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어떻게 고난의 강을 건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눅 22:39-40)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마음을 마귀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긍정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고난이 와도 시험 들지 않는 사람이 능력자입니다. 욥은 의롭고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녀들이 다 죽고, 자신은 병에 걸리고 부인은 떠났습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의 고난은 극에 달했습니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욥은 시험에 들지 않았고 승리하여 고난의 강을 건넜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 22:39) 습관적 기도가 아니라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생활이 되어 있는 자는 고난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평상시 어려움이 없을 때 기도해야 고난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가 있어서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늘 습관대로 기도하다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기도가 습관이 된 사람은 사자 굴에 들어가도 살아납니다. 문제가 없을 때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나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포기 하도록 고난을 주십니다. 기도하면 내가 죽습니다. 기도할 때 부활의 영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포기할 때 주님이 역사하여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실 때만 가정이 살아나고 내가 살아납니다. 지금 고난의 강을 건너고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And...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나방이 있습니다. 황제나방은 황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황제나방은 그 아름다운 날개를 펴기 전 누에고치 속에서 자랍니다. 시간이 지나 황제나방은 누에고치에서 나오기 위해 몸을 비비며 구멍을 뚫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황제나방이 누에고치 속에서 비비고 나오려는 모습을 보고 너무 애처로워 고치에 구멍을 내주었습니다. 황제나방은 뚫린 구멍으로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날개를 몇 번 퍼덕이더니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과학자는 나방이 왜 바로 나오자마자 죽었는지 관찰해 보았습니다. 황제나방은 누에고치 속에서 몸을 비비며 안간힘을 쓰고 피가 날 정도로 고생을 하고 나와야 아름다운 날개가 힘을 받아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구멍을 뚫어주니 날개가 힘을 받지 못해 죽은 것이었습니다. 황제나방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만 ‘황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당시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그 시련을 통과한 사람만 성숙해지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만 십자가를 체험하고 능력 받고 부활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탄 배가 파손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무인도에 닿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떤 배든 무인도 근처를 지나가다 자기를 발견하고 구출해 줄 것을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오니 움막이 완전히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원망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배 한척이 상륙해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하면서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물었습니다. “당신이 연기로 구출 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하더랍니다. 이와 같이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올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어느 날 독일의 한 남작이 바람을 이용해서 뭔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 수 없을까? 하고 고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성곽 위에 세워 놓은 두 개의 탑 끝을 여러 가닥의 철사로 연결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그 거대한 악기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미풍이 불자 그 악기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악기가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 것은 폭풍우가 치는 날이었습니다. 역경의 날에 즐거워하십시오. 당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역경의 날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주시기 위해 잠시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 뿐 입니다. 역경의 날이 있어야 자갈밭과 가시밭이 옥토로 변하 수 있습니다.
J. F 오벨랑(1740~1826)은 프랑스의 유명한 목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두 개의 보석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보석이 어떻게 보입니까?” “똑같아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 크기나 색깔이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는 좀 흐릿하고 하나는 눈부신 빛을 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흐릿해 보이는 보석은 8번 깎았지만 광채 나는 보석은 80번 깎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깎으시는 과정입니다. 많이 깎인 신앙인은 빛을 발 한답니다” 시련을 잘 극복하여 밝게 빛나는 보석과 같이 빛을 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