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vagrius Ponticus, 345-399) 의 생애
에니어그램을 넘어 데카그램의 저자 숨님과 도도님은 아라랏산이 숨쉬는 아르메니아로 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의 아픈 역사를 목도하며 그분들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무엇을 보고 왔을까?
우리가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그의 제자였던 빨라디우스(Palladius, 363-423)가 저술한「라우시우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이다. 이 책은 에바그리우스가 죽은 지 약20여년이 지난 420년경에 쓰였는데, 이 책 제38장에서 빨라디우스는 에바그리우스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빨라디우스에 의하면, 에바그리우스는 345년경 뽄뚜스(Pontus)의 이보라(Ibora)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보라의 사제였다. 이보라는 성 바실리우스의 소유지였던 안네시(Annesi) 근처였으며, 이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에바그리우스는 그 유명한 까빠도치아(Capadocia)의 교부들과 일찍부터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357-358년에 성 바실리우스(St. Basilius, 328-378)와 그의 동료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329-390)는 안네시로 물러나 수도승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독서직을 받고, 379년에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에바그리우스는 바실리우스가 죽자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뜻한다. 그 후, 380년에 그는 고향을 떠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에바그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중에 주교들과 함께 하였고, 모든 이단을 거슬러 싸워 승리하였다. 이는 에바그리우스가 성서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지혜로써 모든 이단을 공박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이러한 능력이 콘스탄티노플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에바그리우스는 결국 교만의 유혹에 빠지게 되었고, 아울러 여성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악령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한 고관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꿈을 통해서 이 일로 인해 자신이 당하게 될 모든 어려움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탈출하여 올리브 산에 있는 루피누스(Rufinus, 345-410)와 멜라니아(Melania, 342-410)의 수도원에 피신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거기서 몇 개월을 보냈다. 빨라디우스에 의하면, 이 수도원은 도시 안에 있었는데,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오면서 했던 결심들을 즉시 잊어버리고 자주 외출하여 젊은 여성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질병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여섯 달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그를 완전히 쇠진시켰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 병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멜라니아는 그 병의 주도권은 바로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결국 하느님께 의탁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로 가서 수도승이 될 것을 하느님께 약속하였다. 그러자 며칠 후에 그의 병은 기적같이 치유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멜라니아로부터 수도복을 수여받고, 383년에 이집트로 갔다. 그는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50km 남동쪽에 위치한 니트리아(Nitria)에서 2년 동안 생활하였다. 그 후, 사막으로 더 깊이 나아가 이집트 수도승생활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켈리아(Kellia)에서 죽을 때까지 14년간 생활하였다.
켈리아는 니트리아에서 약 1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켈리아 수도승들은 반(半)은수생활을 하였고 각각의 암자에서 생활하였다. 각 암자들은 서로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일정 거리 떨어져 있었다. 수도승들은 자신의 암자에서 주간 내내 머물렀고, 매일 손노동을 하면서 성서의 구절을 암송하였으며, 하루에 한 번 소금과 기름으로 양념된 약간의 빵을 섭취하였다. 토요일 저녁에 모든 수도승들이 성당에 모여 함께 아가페 식사를 하였고 주일 전례를 거행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의 사제인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Macarius d'Alessandria, 4c)와 또한 스케테(Scete)에서의 수도승생활 창시자인 이집트인 마카리우스(Macarius l'Egiziano, 300-390)도 알고 있었다. 루피누스는「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Historia Monachorum)에서 에바그리우스를 “복된 마카리우스”의 제자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에서 필사가로 일하면서 약간의 빵과 소금과 기름으로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원고들을 필사하고 또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저술하였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수도승들 가운데서 에바그리우스는 지적인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식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스스로 매우 작은 자가 되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의 적대감을 침묵으로 인내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매우 깊은 학식과 통찰력을 지닌 수도승으로서 빨라디우스가 에바그리우스의 ‘형제회’ 혹은 ‘동료들’이라고 불렀던 탁월한 수도승 무리의 지도자였다. 이 수도승들은 오리게네스의 우의적인(allegorical) 성서주석에 깊이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지나친 열성과 무분별로 인해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왜곡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리게네스가 단지 가능성으로만 제시한 내용들을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인 양 주장하였다. 그 결과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접하지 못했을 뿐더러, 대부분이 신인동형론(Antropomorphism)자들이었던 단순한 수도승들에게는 그들의 주장과 가르침이 마치 이단처럼 들렸다. 이것은 마침내 오리게네스 논쟁을 야기했다. 이 논쟁은 400년에 시작되어 오리게네스의 제자들이었던 켈리아 출신의 이 수도승 무리가 이집트로부터 추방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논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 399년에 사망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4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