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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의 오래 계속되는 무더위를 이기며
작가회 회원 모두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발표된 수필을 정리하여 책을 묶으면서 남게 된 작품이 많습니다.
한 편을 쓸 때마다 쏟은 힘을 생각하면 아깝지 않은 수필이 없지만
아쉬움도 좋은 기운이기에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래전의 댓글도 남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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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시와 그리움
류인혜
의자왕
백제라는 단어를 대하면 슬퍼진다. 그 슬픔의 내용이 궁금하다. 정인을 떠나보내고 바위가 들어앉은 마음의 무게에 못 이겨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리거나, 육친을 이별하는 단장(斷腸)의 아픔은 아니다. 아무 상관없어도 매정하게 돌아설 수 없는 뭔지 모를 안타까움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게 된다.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 많은 나라가 세워졌고 사라졌다. 그중에 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오욕은 있지만, 의자왕처럼 사후에 혹독한 대접을 받는 왕도 드물다. 태자 시절에는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로 칭송을 받던 인물이다. 즉위 초에는 왕권 강화와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제법 군주의 도를 이루다가 결국 예식이라는 신하에게 속아 나당연합군에게 잡혀버렸다. 후대 사람들은 억울한 왕을 더욱 비하하여 삼천궁녀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도성이 적군에게 함락되어 무자비하게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왕의 후궁뿐만 아니라 귀족의 부인이나 아녀자들이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절벽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절의를 지켰다. 당시의 일들은 후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결국 삼천궁녀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되자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왕과 이별했다. 나라가 힘이 있을 적에는 중국 땅의 동쪽 해안과 일본까지 다스렸던 찬란함이 맥없이 무너질 때, 내쳐져 버린 백성들은 어떤 심정으로 견디었으며, 또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이 모든 극한의 상황을 미리 예견한 사람이 계백장군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면 노비가 될 것이라며 처자를 죽이고 황산벌로 떠났다. 그랬기에 그의 아내는 낙화암의 궁녀가 아니 되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향했던 장군은 자기 죽음도 이미 각오했었다.
백제를 생각하면 무엇으로도 위로할 길이 없는 막막한 슬픔이 솟아오른다. 그 안타까움을 다스려 백제 땅에서 살던 그 사내, 계백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백제는 멀리 있어 생각 속에 그리움을 함께 품었다.
찬란한 문화의 고도이던 사비성, 부여에 가보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곳에 다녀왔다. 부여행을 결정해놓고 느닷없이 입에서 나온 대목은 ‘부소산 얼굴을 아름답고 우는 새소리도 즐겁구나 성지는 지금도 반월이란 이름과 한가지 남아있다.’라는 시조다. 초등학교 때 외워 희미해진 그 시의 전체를 알고 싶어서 검색했다. 조금의 노력 끝에 시조 전문을 발견했다.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무심한 구름을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부소산 얼굴을 아름답고 우는 새소리도 즐겁구나 /성지는 지금도 반월이란 이름과 한가지 남아있다/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
신동엽
문학의 소재가 풍부한 부여에서 그곳을 대표하는 시인에는 신동엽이 있다. 최근에 그의 기념관이 설립될 정도로 부여가 아끼는 시인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영웅시하여 민족 시인으로 높여서 추앙하고 있다. 의자왕을 평가절하하는 이기심처럼 한 시인의 맑은 순수성에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적당히 색칠을 입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신동엽은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입선되어 등단했다. 1963년 시집 《阿斯女(아사녀)》를 발간하였고, 1976년에 발표된 서사시 <금강>은 문단의 관심을 이끌었다.
신동엽의 시를 읽으면 그전까지 읽었던 시와는 다른 비장함으로 가슴에 바위가 생겨났다. 그 당시의 시가 그랬다. 상상력과 은유 그리고 모호한 비유의 물결, 끊임없는 사유의 유희들이었다.
그의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 <석가탑>은 작곡가 백병동 선생께서 오페레타로 만들어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1969년 시인이 간암으로 돌아가고 난 후 추모 행사로 명동 유네스코 회관 소강당에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의 공연이 있었다. 시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미도파 백화점에서 꽃이 예쁘게 수 놓인 흰 블라우스를 사 입고 시극을 보러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인은 점점 잊혔지만, 유고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노트에 적어두고 외웠다. 신동엽 시선집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는 나중에야 사서 읽었다. 시집을 읽었던 때 쓴 글이다.
“대처(서울)로 와서 신동엽의 시를 대했을 때는 새로운 시의 세계를 만난 기쁨이었다. 그러나 내 나이 스물이 되던 때, 신동엽은 하늘로 돌아갔다. 신동엽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정신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는 아픔으로 울었다. 그 후에 쓴 시들의 근저가 신동엽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와 같은 날카로운 의식을 지니지 못해서 이도 저도 아닌 두루뭉술한 시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개인의 시집이 발간되던 그 가을에 다시 그의 시를 읽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마무리다. 스승의 문하를 떠나기 전 제자가 하는 감사의 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심정으로 옷깃을 여민다. 그와 같이 시인의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가야 할 의식을 치르는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세상을 향하여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가, 그의 시는 상황에 몰두하여 호흡이 길다. 뜨거운 커피가 차게 식어도 상관 않고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풀어놓는 절절한 이야기다. 그 긴 이야기를 읽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솟아 나와 끊임없이 흘러가는 슬픔의 강물이다. 슬픈 나라 백제가 키워낸 시인이다.
문효치
백제 시 읽기는 문효치 시인의 시에서 마무리된다. 죽음을 뛰어넘는 의식으로 시인은 백제에 관심을 둔다. 백제는 오래전에 이 땅에 존재했던 나라이고, 그 흔적을 현대에 사는 우리가 볼 수 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과 현대에 사는 사람이 역사적인 유물로 연결이 된다. 먼 먼 세월의 저쪽에서 뿜어내던 생존의 흔적이 되살아나 새로운 숨결을 가쁘게 느끼며 서로 어울리고 있다.
문효치 시선집 《백제시집》에서 무령왕에 대한 연작시를 읽고 그 상상력에 무서움이 일었다. 그 시집에는 시인이 그동안 발표했던 백제에 관한 시 중에서 99편을 골라 실었다. 시의 중심인 무령왕에 대한 시가 38편이다.
네 개로 나누어진 단락에서 제1부 <무령왕의 나라>에는 모든 시의 제목이 ‘무령왕’이라고 시작된다. 523년 여름에 세상을 떠나갔던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 기간 22년)을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웠다.’라고 소개한다.
눈매가 그림 같았다는 사내, 그와 눈맞춤 하고 싶다. 드디어 깜깜한 무덤 속 미궁을 떠나 그가 지니고 살았던 모든 사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시인이 끌고 가는 상상의 실타래를 따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의 상상 속에 잉태하여 다시 찬란한 모습으로 태어났기에 이미 시인의 소유가 된 수많은 사물이 있다. 시인은 수많은 무령왕의 변신을 노래한다.
은팔찌, 도자 등잔, 나무새, 무령왕의 물병, 장도칼, 청동거울과 청동 수저, 나무 두침, 다리미 그리고 무령왕의 금구슬이 있다. ‘무령왕의 금구슬’은 아직도 도르르 구르고, 호르르 흐르며, 포르르 포르르 시를 읽는 의식 속에서 날아다니고 있다.
사람은 가버렸지만, 그가 사용하던 물건은 남았다. 신비로운 유물들에 대하여 세월 속에서 인간의 존재함을 느끼고, 마음을 비치기도 하다가 드디어 왕과 절친한 지기가 된 시인은 두런두런 속내를 이야기한다.
무령왕에게
당신이 거느리던 영토는 잃었지만
당신의 영혼과 피는 여전히 살아서 금강 언저리에 출렁입니다.
내 앞에서 강은 언제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몸을 일으켜 앉고는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긁적거리며 입을 쫑긋쫑긋 말을 합니다.
당신 시대. 용맹한 장수들의 싸움 이야기, 또 그런 것 말고도 신명을 바쳐
예술을 구워내던 장인(匠人)들의 이야기, 또 그런 것 말고도
당신의 어느 이름 모를 하녀 그 손톱을 치장하던 봉숭아 붉은 물이 해마다 가을이면
스르르 날아가 앞마당 감나무 잎사귀에 옮겨 앉는 그 사소하지만 신비스런 이야기까지도.
강물 속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차돌처럼 야물어지고
나는 기슭을 서성이며 귀 기울입니다.
백제는 백제답게 숙성된 슬픔을 껴안고 있어야 한다. 그 슬픈 내력을 행복함으로 바꾸는 일이 현재의 부여를 찾는 이에게 줄 선물이다.
김영갑
또 다른 부여사람으로는 사진작가 김영갑이 있다.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의 영감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은 1985년부터 아예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의 모든 것에 흠뻑 빠져서 20년을 제주도에서 살았다. 제주의 나무, 산, 바람, 오름, 바다, 파도 그리고 사람들에 넋이 나갔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간절함을 알았다. 김영갑의 산문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읽으며 백제는 또 한 사람에게 삼라만상의 절실함을 가르쳤다는 것을 느꼈다.
김영갑에 관하여는 오래전에 신문에서 읽었다. 기사 중에서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도의 풍경을 찍고 있는 사진작가, 그 외에는 다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의 소식을 들었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게릭병이라니! 모리 슈워츠 교수처럼 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그 루게릭병이라니. 사진작가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어 사진을 찍지 못한다니,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무관심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에게 힘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근황을 챙겨보았다. ‘두모악’이라는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기에 그곳을 찾아 들어갔다. 비적 마른 댕기 머리 남자를 보았다.
그가 아픈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돌을 쌓아 정원을 꾸몄다는 곳,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번지를 주소로 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 한다. 얼른 제주도로 가서 그의 갤러리에 걸린 사진을 보고자 했다. 그저 마음만 제주도로 달려갔을 뿐, 세월은 더 급하게 달려가 버렸다.
대신 고맙게도 2005년 초봄에 김영갑이 자기가 찍은 사진을 들고 서울로 왔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영갑의 전시회에서 그의 사진을 직접 대할 수 있었다.
가로로 긴 풍경 속의 제주는 이야기 나라의 몽환에 빠져 있었다. 그의 몸은 굳어져 가고 있는데, 손가락이 성할 때 찍은 제주의 풍경은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편편한 인화지 위로 자욱한 안개가 흘러갔고, 바람이 일면 바람을 따라 누운 꽃봉오리가 세세히 흔들렸다. 나뭇가지는 고개를 꼬고 있었고, 제주의 바다에서는 맑고도 아름다운 모양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먼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은 눈부시게 장엄했다. 비와 바람과 안개가 많은 제주 날씨처럼 그의 사진도 자연현상에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은 뜨거워졌고, 전율이 일어 온몸으로 퍼졌다. 그런 제주의 적나라한 속내를 담은 사진을 찍으려고 제주에 정착했다. 그리고 서울 전시회를 끝낸 그해 5월 29일 세상을 떠나갔다.
김영갑의 사진 전시회장에서 책을 사 왔다. 그가 쓴 글과 그의 사진이 함께 들어있는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지독한 고집을 부리는 전형적인 인물을 만나서 나의 어설픈 고집은 저만치 달아났다. 그는 사진에 들어올 풍경을 찍기 전에 그 풍경 속에서 사는 사람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제주도의 독특한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육지 사람이 쉽게 친하기 어려운 제주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든 것은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나누어 받은 것도 없지만 자신들이 머무는 곳의 풍경을 좋아하는 그에게 제주의 사람들은 어렵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
김영갑이 만난 인정 많은 제주의 사람들과 그 섬에서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서고 사는 노총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질금질금 눈물을 흘렸다. 그가 하늘로 가버린 후 제주의 김영갑 미술관에는 두 번 다녀왔다.
《순수문학》 2013년
류인혜(柳仁惠)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우물> 추천완료. 한국수필작가회 고문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작품집: 《수필이 보인다》, 《나무를 읽는다》 외 8권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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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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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13-08-13 09:28
부여 출신의 문인과 예술인을 통하여 백제를 다시 보게 됩니다. 백제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묻혀있는 것이 많아 신비 그 자체가 아닌가 합니다. 언젠가 부여 낙화암의 고란사를 보면서 한나라의 흥망성쇠를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류인혜 13-08-13 13:52
임 선생님, 정말 낙화암에 서보고 고란사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지난번에는 시간이 모자라 생략했습니다. 고란초가 없어져 간다고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일만 성철용 13-08-13 12:28
백제(百濟)는 처음에는 십제(十濟)라 했다더군요. 온조왕이 십(十) 명의 신하의 도음(濟)을 받아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다가 형 비루의 신하까지 합하여 백(百) 명의 신하의 도움(濟)을 받아 세워서 백제(百濟)로 국명을 고쳤다더군요.
호남의 백제가 영남의 신라에게 패망한 것이 오늘의 호남 푸대접으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좋은 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류인혜 13-08-13 13:55
백제라는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군요.
일만 선생님의 박학다식에는 늘 감탄을 합니다.
요즘은 간단히 정리된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부족한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백제에 대해 더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정자 13-08-13 14:16
지금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오랜 풍경들. 부소산성을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과 낙화암, 고란사가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그 후론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이 새삼 그립습니다.
슬픈 왕국 백제와 충신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류인혜 13-08-14 07:23
오 선생님,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글쓰는 이들은 글 자리에서 글을 주고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요.^^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라면 마음의 풍경이 더 아련하겠습니다.
서울에 오면 일부러라도 찾아 가 보십시다. 건강 잘 지키세요.
이방주 13-08-13 14:41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가 땅속에 묻힌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진흥왕과 성왕의 대결에서 성왕이 어처구니없게 죽임을 당한 옥천의 사적지를 가끔 갑니다. 오늘날 백제의 옛 문화와 정서를 이은 문학작품이 문화의 깊이를 말해 주는 듯합니다. 선생님의 글 읽어 보니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새로운 것이 보일 것 같습니다.
류인혜 13-08-14 07:27
같은 사물을 보거나 상황에 접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시선이 가는 길의 방향에서 차이가 나겠지요. 늘 보편적인 것보다 엉뚱한 데를 보고 있는 버릇이 있어서 공감을 얻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글을 잘 읽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옥천의 사적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그곳에도 관심이 갑니다.
임재문 13-08-13 15:26
백마강 다알밤에 물새가 우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그리우웁구나 하는 흘러간 옛노래를 오늘도 불러봅니다. 어젯밤에는 별똥별 구경한다고 한숨도 못 자고 하늘을 보러 밖에 나갔습니다. 딱 한 개 별똥별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언젠가 제 딸아이와 함께 안양에서 유성쇼를 보겠다고, 잠을 설치며 밖에 나와 서성이던 때를 그립게 했습니다. 딸아이가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하늘나라에 있을 내 딸 사랑하는 내 딸 임아미!
건강하세요 류인혜선생님!
류인혜 13-08-14 07:32
때때로 가장 아픔을 많이 주는 부분이 떠오르면 견디기 어려운데 임 선생님은 용하게도 잘 견디고 계십니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던 어린 날이 생각납니다.
따님 임아미도 좋은 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흘러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다시 흘러갈 그곳에 대해 기대하고 있습니다.
임재문 선생님, 만세!
김권섭 13-08-29 17:14
류인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역사는 事必歸正보다는 구테타가, 힘 있는 자가 차지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백제의 섬세하고 온유하며 아름다운 예술은 우리 민족의 精髓인데 그렇지 못했으니 안타깝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외쳤던 시인, 슬픈 내력을 행복함으로 쓴 작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김영갑 등을 배출한 땅 백제는 우리 민족 5천 년 역사의 귀감입니다. 백제에 대하여 올려 주신 글 잘 감상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백제인의 후예 많이 노래할 수 있는 메아리가 아닙니까!
류인혜 13-09-02 20:01
김권섭 선생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많은 분이 <껍데기는 가라>를 신동엽 시인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이 시를 읽으면 뭔가 뭉클한 것이 가슴에서 일어납니다.
좋은 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