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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의 노래 ㅡ 이 시대의 정형률을 생각하다
류미야(시조시인)
천하 大事가 걸려 있다.
빨간 외바퀴 손수레에. ㅡW. C. 윌리엄스 「빨간 외바퀴 손수레」 중
전복(顚覆)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 한 마리가 제나라 장공(莊公)의 수레를 멈추려 했다는 고사와 함께 전하는 이 말은, 무모하게 덤비는 행동을 빗댈 때 흔히 쓰인다. 허나 세상 모든 일은 관점을 뒤집으면 판이해진다. 그 장렬한 무모함이 아니었던들 한갓 그 사마귀, 인간사 명부에 오르기나 했을까. 사마귀 편에서는 어쩌면 대승첩의 기록이요, 온몸으로 쓴 절명시인지도 모를 일이다. 견자인 시인이 보는 것은 그처럼 일반적 관점과는 조금 다른 세상, 중심과 주변이 역전될 수 있는 세상이다. 들머리의 시에서 시인의 눈에 포착된 손수레는 일상적 사물이 아닌 우주를 굴리는 수레바퀴요, 중심축이다. 일반의 눈에는 쉬 보이지 않는 그 ‘외바퀴’와 ‘빨간’ 색의 특별한 환기도 시인의 눈에는 여지없이 간파된다. 시인에게는 그런 유다른 감각기관이 내장되어 있어 사물과 세계는 독특하게 감지되고, 굴절되며,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세계란 각각의 만상이 외바퀴수레로 존재하는 곳, 혹은 그 위에 실려 언제든 뒤집히고 엎어지기를 기다리는, 꿈꾸는 사물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 ‘뒤집음/뒤집힘’ 의 발상이 결국 이 꿈쩍도 않는 고집스런 세계를 꿈틀거리게 하고, 굴러가게 한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ㅡ조오현, 「부처ㅡ무자화6」 전문(『적멸을 위하여』, 문학사상, 2012)
없는 강물이 흐르고 심지어 범람하며, 또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그 뗏목다리는 무언가? ‘부처’는 실상 언외언의 존재다. 그 자체가 실체이되 공(空)이고, 비어 있으되 없음이 아니며, 하나이되 모든 것인 불이(不二)의 세계다. 그것을 무자화(無字話), ‘말하지 않는 말’로 말하였으니, 현실세계의 논리와 인과율을 완전히 뒤집은 발화라 할 수 있다. 시품에서 말한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모조리 표현”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도 통하는 말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이 『적멸을 위하여』니, 찰나를 살면서 불멸을 염원하는 무상한 인생들에게 던지는 일갈로도 읽힌다. 이렇게 존재와 언어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 3장 6구 정형률의 ‘문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은 또한 얼마나 절묘한 역설인가. 대상에 대한 전복적 사유와 화법을 통해 시적 형식과 내용, 그 불이의 지평을 ‘무자화’의 언어로 보여주고 있으니, 모름지기 시 한 편으로 이렇게 우주가 뒤집히고 인식의 개벽이 올 수도 있는 일이다. 이처럼 세계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은 시인의 특별한 시선과 통찰에서 비롯된다. 문학적 관습 자체에 대한 전복이 아닌, 그 약속된 규범 안에서도 얼마든지 지극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광석에서 순금을 제련하고 납덩어리에서 백은을 뽑아내듯 마음을 온통 기울여 단련하고 도야하되 조잡하고 거친 것은 일절 아끼지 않는다 ㅡ사공도, 『이십사시품』, 「세련」 편
편자
그렇다면 대상과 현상을 뒤집고, 꿰뚫으며, 그 너머를 붙들어내는 시의 언어란 어떤 것인가. 또 수많은 가치와 이념이 충돌하는 이 디지털문명의 시대에 시의 언어로써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전통적 미학교범의 부정과 형식 실험을 통한 현대적 미의식 표현을 주창한 서구발 미래주의(futurism)는, 2000년대에 접어들며 우리 시단에서도 이른바 ‘미래파’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언어 감각으로 무장하고, 기존의 문학적 관습의 ‘해체’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정한 내면을 드러내려한 그들의 시도는, 그러나 그런 ‘형식의 해체’ 역시 또 다른 ‘해체의 형식’으로 전범화하며 자기복제와 이종교배의 이형들을 무분별하게 양산함으로써 독자는 물론 문단의 피로감을 가중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지점에서 근원적 서정성에 대한 자성의 모색으로 등장한 것이 ‘극서정시’ 이며, 그것은 여러모로 현대시조와 교점을 갖는다. 그런데 개인의 불온하고 거친 내면적 발산을 문학적 고유관습에 대한 파탈로 직결시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단순한 논리의 도식화는 아닐까? 문학적 상상력으로서의 일탈과 전복이 곧바로 문학적 관습, 언어형식에 대한 전복과 해체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가장 근원적 핵심인 서정성 ㅡ 그것의 미학적 여부를 떠나 ㅡ 은 시라는 문학 관습의 가장 종요로운 지점이며, 그것은 내용과 형식간의 매우 정치(精緻)하고 긴밀한 조직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다. 완결된 한 편의 문학작품, 예술적 구조물로서의 시를 직조하는 과정이 끊임없는 형식 깨뜨리기와 신경증적 해체로 이어지는 것은 끝없는 어둠으로 순환되는 그림자밟기와도 같은 피로감과 병증만 증식시킬 뿐이다. 누구나의 내면에는 우주의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상념들로 부서지고 무너지는 내면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어 예술의 승화로 이어질 때 바로 문학이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무위(無爲)와 잘 놀다간 내 시우(詩友) 신현정이
‘훔쳐 간 자전거’ 타고 구름 사이 누비다가
그곳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며
오줌 갈기는
봄 한 때 ㅡ박시교, 「봄비」 전문(『13월』, 책만드는집, 2016)
월명사의 「제망매가」로부터 천상병의 「소풍」, 김종삼의 「투병기」, 죽음의 우울이 깃든 수많은 시편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작품들을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그 대부분은 인생에 대한 서정의 직접적 토로로, 삶의 무상함과 생사 소멸에 대한 절절한 자의식 등을 보여주며 우리를 비감에 젖어들게 하곤 한다. 그런데 위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의 지평을 훌쩍 넘어섬으로써 한층 묵직한 울림을 자아낸다. 표면적인 대상(봄비) 뒤에 숨은 속이야기(절친한 벗의 죽음)가 짐짓 유쾌함 속에,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그려져 있다. 잘 들여다보면 이 시에는 드러난 이야기 외에 단서만 제공된 일화가 하나가 더 숨어 있는데(“훔쳐 간 자전거”로 ‘누설’된), 이는 속사정 모르는 독자라 할지라도 시적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시의 정감에 젖어들 수 있도록 마련된 매우 주밀한 시적 장치다. 그리하여 인생의 조락에 대한 깊은 상념을 애이불상(哀而不傷)의 품격으로, 그것도 우주적 상상력과 낭만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정형률의 시적 관습을 철저히 따른 단 한 수, 짧은 시로. 시의 서정은 형식 파괴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시의 궁극이다. 좋은 시는 외려 시의 고유한 예술적 관습을 잘 따르면서도 스스로 살아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그것이 비록 파괴를 노래했을지라도!). 그 절실한 시정이 잘 마련된 문학 관습의 물관과 체관을 따라 제 마음의 소리로 노호하며 흐를 때, 보다 깊은 우주적 감성과 풍격(風格)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가만히 귀 대 보면 나처럼 울고 있다
닿으려면 멀어지는 저 물길 파장(波長) 따라
징ㅡ 지징 무쇠소리로 아버지가 울고 있다
밤무대 여가수처럼 목이 쉰 어머니가
밤마다 부두에 나와 노래를 하시는지
버텨온 아랫도리가 흠뻑 다 젖었다 ㅡ황영숙, 「등대」 전문(『크리넥스』, 고요아침, 2016)
시의 등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상인 동시에 화자 자신의 분신이다. 화자는 낮게 숨죽여 우는 등대의 울음 속에서 아버지를 읽고, 밤새 물살 버텨낸 등대의 모습에서 목쉬도록 생의 어둠을 버텨온 어머니의 깊은 뿌리를 본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로 물결 쓸리는 생의 바닷가에서 목쉰 등대마냥 서 있는 화자 자신이다. 결국 등대의 울음과 견딤은 화자가 삶을 지나는 방식인 것이다. 영원히 부모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대물림되면서, 언제나 늦게야 찾아오는 생의 깨달음이 아프게 전해오는 시다. 길지 않은 2수의 연시조로서, 정제된 묘사와 이입만으로도 내면의 울음을 어떤 방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목 쉰 울음은 비명과는 다르다. 욕설과 아우성과 피가 철철 넘쳐야만 살아있는 생은 아니다. 비록 그런 생일지라도 시는 이토록 덤덤하게, 무쇠와 같은 울음으로 우리 영혼을 적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아래의 시는 또 다른 언어의 맛과 깊이로 우리의 시정을 간질인다.
다음의 네 사람이 최종심에 올랐다
노숙자의 현실성은 벼랑 끝이 만져지나 바닥에 누운 서정이 딱딱한 게 흠이었고, 강바람의 운율은 풋풋하고 시원한데 피가 도는 바람의 내력을 그려내지 못했다 민들레의 시상은 허공에 뿌리를 두나 유목의 족보들을 들춰내지 못했다 구제역의 발굽 닳은 시간들은 감동이었다 눈물 그렁한 큰 눈을 보며 심사자는 망설였다 비명이 허공을 받들 때 남는 건 한숨인데, 구제역의 서정성이 외양간을 넘길 바라며……
올해는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나들이 ㅡ박성민, 「신춘심사평」 전문(『쌍봉낙타의 꿈』, 고요아침, 2011)
사설시조(辭說時調)인 이 시는 자고나면 사건 사고로 이어지는 이 시대의 단면을 ‘심사평’이라는 제목 아래 사설(社說)처럼 풀어 보여주고 있다. 다 읽고 나면 모종의 시큰함과 씁쓸한 여운까지 불러일으키는 말의 능청이 찬란하다. ‘작명법’의 기지를 발휘하여 언어적 재미를 더하는데, ‘전권 쥔 자’의 허망한 결론이 종장에서 웃음과 함께 진한 삶의 페이소스까지 슬그머니 이끌어낸다. 시조의 정형률이 결코 ‘닫힌 형식’이 아니며 그 운용 여부에 따라 현실과 자유롭게 교호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다. 그러니 문제는 형식이 아닌 인식이다. 어떠한 ‘관습적’ 문학 형식에 기댈지라도, 그 속에 든 시정(詩情)의 알맹이, 그리고 그 알맹이가 따르는 시의 근원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철저한 인식 속에서 서정의 무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또한 형식은 중요하다. 시조가 ‘시’라는 문학 장르임을 잊지 않는 것, 또 그것이 지켜야할 문학 관습에 대해 존중하는 것은 그것이 문학으로서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된다. 서정과 운율을 본질로 하는 시는 시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시의 형식은 근원적으로 중요하다. 정형률이라는 ‘말의 편자’를 달고 문학의 우주를 달려가야 하는 시조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명마를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편자다. ‘야생의 말’들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자유와 방임은 결코 그를 천리마가 되게 하지 못한다. 먼 길 가지 못하는 것은 방향성과 열정의 문제이지 편자 탓이 아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쇳덩이 매단 그 발끝을 일으켜 시의 산맥을 넘고 계곡을 지나야 비로소 시의 심장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뇌수에 노래는 가슴에 박힌다 ―최두석, 「이야기와 노래」
노래
‘서정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시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며 우리 문단의 새로운 시도들에 큰 의미를 부여한 신형철의 따뜻한 언급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시의 서정성이 더욱 존중돼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시는 당연히 시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시의 서정성이다. 서정 장르로서의 시는 이야기라는 서사의 장르와 대비되는 개념이며, 따라서 모든 서정이 다 시의 형태일 수는 없지만 모든 시는 서정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시가 이야기와 구별되는 현격한 지점은, 서사가 풀어 쓰고 말하는 이야기라면 시는 서정을 운율에 담아 쓰는(부르는) 노래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노래가 시인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시는 노래의 근원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 시가 시로 확고해지는 것은 시의 서정성과 음악성을 공고히 할 때다. 따라서 ‘시’로서의 시조 역시 서정성과 음악성을 명백히 확보할 때 온전한 시로 서게 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칼의 형식은 옳고 어떤 것은 틀릴 이유는 없지만, 칼의 형태만 있는 칼집을 칼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는 서정의 문학적 관습을 철저히 따르고, 그 안에서 제대로 자유를 누릴 때 참다운 시가 된다. 근래 문단에는 자유시에 견주어 시조는 고루하고 낡은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은연중 만연해 있다. 저명한 어느 석학조차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가람 시조도 옛 시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말하며, 오늘날의 시조가 여전히 계절과 자연의 추이에서 소재를 찾고 사군자 숭상의 그림자를 도습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는 시조 쓰는 이들에게는 숙고할 만한 지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조에 대한 문단의 여전히 ‘닫히고 사로잡힌’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재만으로 보자면 새롭고 다양한 현대의 삶을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과 시각으로 그려내는 시조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재의 첨단화나 모던한 삶의 표현 여부가 아니라,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어떠한 미학적 경지에서 구현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시조보다 더 간절하고 곡진하게 시의 원형을 지켜온 문학 양식이 이 땅 위에는 없다. 그렇다면 시로서의 시조가 내적, 외적으로 더욱 단단해지고 제대로 된 위상을 가지게 될 때 시조만큼 이 땅 사는 사람들의 삶의 시간을 생생하게 붙잡아 그릴 수 있는 문학의 언어는 없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너 때문에/이 세상도/생긴 지 한 달밖에 안 된다!”고 노래한 시의 구절(정현종, 「송아지」)처럼, ‘그 시로 인해 세상은 비로소 생겨났다’고 할 만한 시조를 쓰는 일, 한시도 노래임이 망각되지 않은 노래인 시를 쓰는 일, 심장에 와 박히는 노래의 화살인 시를 쓰는 일, 발견의 기쁨, 인식의 지진이 날 수 있는 좋은 ‘시’ 인 시조를 쓰는 일이야말로 시조가 가장 확고하게 그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길이 될 것이다.
(『화중련』, 2015년 하반기호)
류미야 2015년 『유심』 등단. 2014년 제3회 님의침묵전국백일장 장원,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현재 월간 시 전문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발행인 겸 편집주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