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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정도전의 유배 생활
1. 변화의 패러다임
내 이야기에 대해 찬반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건강한 것이다.
그러나 저의 말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표현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선의로 해석해 주길 바란다. 노대통령에 대한 나의 말에 대해 말이 많은 것 같다.
그 양반하고 나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 오해 없기 바란다. 노대통령은 이미 역사화 된 인간이다.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우리 사회를 볼 때 본질적인 변화의 패러다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기에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사회에 이루고자 하는 정치개혁을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해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 브레이크를 거는 놈은 나쁜 놈이다. 나는 역사 전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2. 실미도와 역사의 진실
엊그제 영화를 봤다. 영화가 취미다.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계에 유례없는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라는 작품의 대본도 썼다. 장승업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조선말기의 직업화가로서 20세기 한국미술의 모든 가능성을 열었다. 호는 오원(吳園)
장군의 아들도 나의 작품이다.
우리는 서양 학문의 시대에서 국학의 시대로 가야한다. 이제까지 남을 따라가면서 보편성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주체적인 사고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우리 방화(邦畵)가 세계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방화 점유율이 50%를 넘는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없는 현상이다.
우리 젊은 영화인이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다.
최근에 뜨고 있는 ‘실미도’를 보고 두 배우를 모셨다.
실미도는 현대사다. 역사적 사실이다. ‘실미도’라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문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배후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모르고 살았다. 그 실체가 밝혀지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 기쁘다.
@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현대사의 굴절된 모습들이 이 사건에 얽혀 있다.
나의 강의도 같은 문제를 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나의 강의도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주제로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반가운 일이다.
684부대는 김신조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당시 중앙정보부가 만든 특수부대였다. 31명 전원 사망. 국가권력의 횡포와 역사왜곡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는 영화적으로 좋은 소재가 많은데, 지금까지 영화화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으로 예술가의 상상력을 억압한 측면이 있다.
정치적 속박은 예술의 빈곤으로 나타난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억압이 풀려가면서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국민의 호응을 얻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실미도와 같은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서 나쁜 짓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서 ‘북파공작원’들을 보내는 불행한 일들이 있었으며 국회에서 이들에게 보상을 하게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흔히 북한은 악으로만 규정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주고받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이렇게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1등 국가로 가고 있는 징조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엔 밝은 미래가 있다. ‘실미도’와 같은 비극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 민족이 선진화되고 있는 과정이다.
대중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아주 중요하다. 실미도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보시기 바란다.
예술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적 기능을 외면할 수 없다. 영화 실미도는 왜곡된 역사의 실상을 일깨우는 강렬한 도덕적 기능이 있다. 예술의 상상력은 민주의 축복이다.
-도올-
3. 첫머리-정도전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려고 했는데, 너무도 방대하다. 그래서 조선왕조로 집약하려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도 너무 방대하다.
본 강의는 조선왕조의 사상사로 집약된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세계적인 사상가들이 기라성같이 포진되어 있는 역사이다. 우리는 윈스턴 처칠, 아브라함 링컨을 위대한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하면 삼봉 정도전이 머리에 떠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대 사상가며 정치가.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윈스턴 처칠을 위대한 정치가로 생각하면서, 삼봉 정도전을 위대한 정치가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를 다루려고 보니깐 너무 복잡하다. 주기론, 주리론, 이퇴계, 이율곡 등 논쟁이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다룰 수 있는 범위는 처음과 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첫머리에서 삼봉 정도전을 다루고자 한다.
4. 격변의 시기
현재는 변혁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런 변역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런 변화는 우리나라에 민주적 패러다임이 도래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변역의 시기는 언제였을까?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라도 두발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들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말기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개화백경은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頭可斷而髮不可斷 :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
고종 32년(1895) 단발령에 유생들이 항의한 말.
구한말에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는 일본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변화와 비교해서 더 심한 변화를 겪은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가 바로 고려말에서 조선왕조 초기로 넘어가던 때였다.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넘어가는 역사의 격변의 폭은 구한말의 開化百景의 격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왕조로 넘어가는 시기는 엄청난 격변의 시기였다. 종교, 국가적 형태, 종교의 패러다임, 문화, 복식, 주거, 제사 방식, 가족 친족 관계 등 모든 것이 엄청나게 바뀌는 시기였다. 이런 변화가 바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걸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변혁을 주도한 사람들이 고려 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고려말 사회는 문제가 많았다. 부패가 심했다.
5. 혁명
여기서 혁명(革命)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혁명은 명(命)을 간다는 것이다. 혁은 가죽이라는 뜻이지만, 주역에 혁괘라는 것이 있다. 혁괘라는 것은 가죽을 무두질하면 가죽의 성분이 변화되는 것을 상징해서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가 있다.
革 : 주역의 49번째 괘 정(井, 우물)괘 다음에 온다.
서괘(序卦)는 우물이 썩으면 물을 퍼내어 갈아야한다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동학 혁명, 4.19 혁명, 5.16 혁명이라는 것에 혁명이라는 말을 쓴다.
혁명이라는 것은 혁명의 주체 세력이 있어야 하고, 분명히 왕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을 역성이라고 한다. 성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역성 혁명이라는 말을 쓴다.
역성(易姓) 성이 바뀐다. 왕의 성이 바뀐다는 뜻으로 조대의 변화를 의미하는 혁명을 가리킴.
일본 역사에는 혁명이라는 것이 없다.
일본역사에는 혁명이 없다. 천황제 지속하에 신하(臣下)의 변화만 있다.
고대로부터 여태까지 동일한 천황의 명이 유지되는 나라이다. 최근에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모든 정치적 지도자는 천황의 명을 받아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막부(幕府)의 우두머리를 왕이라 하지 않고 쇼군(將軍)이라 했다. 즉 장군이라고 했다.
쇼오군(將軍) 일본 봉건제 막부(幕府)의 우두머리. 우리말의 장군은 관료군인이지만, 일본의 쇼오군은 왕(王)에 해당되는 막부의 수장이다.
장군이라는 우리나라의 말과 일본의 장군(쇼우군)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갔다고 해도 혁명이 아니다. 일본은 혁명이 없다. 조대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놀라운 연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부패하기 쉬운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 의미로 보면, 끊임없이 혁명이 일어난 나라이다.
동학혁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명(命)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사적으로 혁명으로 부르기 어렵다. 해월 최시형 선생하고 전봉준 장군이 농민들과 함께 농민 혁명을 일으켰지만 좌절되었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로 넘어가고 말았다. 즉 동학의 주체세력들이 명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쓰기 어렵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의 근대적 자아가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사적으로 근대성의 출발로 생각하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조선 왕조의 명을 근원적, 내용적, 사상적으로 바꾸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써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동학혁명은 정치사적으로 혁명의 자격은 없다.
동학(東學)은 정치사적으로 명(命)을 갈지 못한 좌절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가치관을 근원적으로 뒤엎은 사건이었으며, 우리민족의 근대적 자아의 출발이다.
4.19혁명도 정치사적으로 혁명이라 하기 어렵다. 주체세력이 학생이었으며 학생들이 정권을 수립하지 못했다.
3개의 혁명 가운데 정치사적 변화를 본다면, 유일한 혁명은 5.16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동학, 4.19를 빼고, 5.16만 혁명이라고 한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5.16은 혁명의 자격이 없다. 명을 갈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4.19의 주체세력이 했다. 단지 정권 창출만 하지 못했을 뿐이다. 반면에 5.16은 4.19의 학생 주체세력이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계기를 취해서 단지 정권만 잡은 것이다.
즉 5.16혁명의 실제 내용은 4.19 혁명이다. 그래서 5.16은 혁명이라고 볼 수 없고 군사 쿠테타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5.16은 소수군인에 의한 정권장악일 뿐이다. 5.16은 이미 국정 교과서에도 군사정변(military coupdetat)으로 규정되고 있다.
6. 진정한 혁명(革命)
그런데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넘어가는 것은 분명한 혁명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5.16과 비교하면, 군사 쿠데타랑 비슷하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성계라는 군인이 위화도 회군을 해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군사 쿠데타랑 비슷하다.
하지만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5.16세력과 달리 정권탈취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색 문하에서 자라난 정도전, 남은 등과 같은 유학자들이 추구한 것은 고려 사회의 개혁이었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권근(權近), 하륜(河崙), 조준(趙浚), 남은(南誾), 이숭인(李崇仁) 등은 공민왕 때 득세한 개혁파 신진유생
이 사람들은 고려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뚜렷한 개혁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개혁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가 마지막 카드로 불가피하게, 명(命)을 갈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성계를 등극시킨 것이다.
정도전이 정몽주의 주선으로 이성계를 만난 것은 1383년의 일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 1392년 조선왕조 개창
이 과정에서도 이성계는 끝까지 등극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밑에서 그를 옹립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넘어가는 과정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평화적 정권 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권 변화에 앞서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지가 있었다. 그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간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의 개혁의지는 좌절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를 만드는 혁명으로 분명히 연결되었다. 정도전은 태조 7년까지의 치세 기간을 거친 후에 결국, 이방원의 왕자의 난을 통해 희생을 당했지만, 그의 일생은 완벽한 혁명가의 일생이었다.
태조7년(1398) 8월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까지 혁파하려는 정도전을 세자 방석(芳碩)과 함께 척살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른다.
정도전은 명(命)을 만들어냈고, 개혁을 완수해야겠다는 열렬한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려왕조를 조선왕조로 바꾼 것이다.
정도전의 고려사회 개혁프로그램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토지개혁 2) 종교개혁 3) 군사개혁
정도전은 이 개혁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저항을 받았다.
7. 정도전의 나주 유배와 답전보
정도전이 개혁사상을 가지고 역사에 등장하면서, 많은 박해를 받았다. 처음에 유배를 간 곳이 나주이다. 나는 강의를 위해 이곳을 답사했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나주 영산포
나주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한 대도시였다.
나주성동루발굴지
정도전은 이곳에 이르러 나주의 부로들을 향해 연설을 했다.
정도전의 유배생활을 생생하게 말해주는 서책이 있는데, 그 책명이 답전보(答田父)이다. 답전보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글이다. 일종의 유배문학으로 좋은 글이다.
答田父(답전보) 밭가는 이에게 답함.
애칭이나 존칭의 뜻으로 父는 보로 읽는다.
삼봉 정도전은 34살(1375)부터 2년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소재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의 실제적 삶을 체험하고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한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농민들의 많은 실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글에 당시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무도 잘 들어나 있다.
8. 답전보 해석 1.
▶ 寓舍卑側隘陋(우사비측애루), 心志鬱陶(심지울도), 一日遊於野(일일유어야), 見一田父(견일전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낮고 기울어지고 좁고, 누추해서,(그렇게 빈곤한 곳에서 살았다.) 마음이 울적해서, 어느 날 하루는 들판에 나갔는데, 밭을 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田父는 전보라고 읽는 게 맞다.)
▶ 庬眉皓首(방미호수), 泥塗霑背(이도점배), 手鋤而耘(수서이운):
- 庬眉 : 흰 눈썹이 길게 나 있는 것이다.
- 皓首 : 호호백발에 쓰이는 皓자로 흰 머리라는 뜻이다.
긴 흰 눈썹에다가 백발 머리를 하고, 진흙투성이에 등이 흠뻑 젖은 채 손으로 호미질을 하면서 밭을 갈고 있었다.
▶ 予立其側曰(여립기측왈),「父勞矣(부노의)」
노인한테 가서, 옆에 서서, “노인장 수고하십니다.”(멋쩍어서 엉성하게 말을 걸었다.)
▶ 田父久以後視之(전보구이후시지), 置鋤田中(치서전중), 行原以上(행원이상):
그 노인장이 한참 있다가 째려보더니, 호미를 밭 가운데 탁 놓고 들을 가로 질러서(들이 경사져 있었다) 위쪽으로 올라갔다.
▶ 兩手據膝而坐(양수거슬이좌), 頤予向進之(이여향진지),
(그리고 노인이) 양 팔을 무릎에 걸치고, 쭈그리고 앉아서, 턱짓으로 자기한테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쪽으로 갔다.
▶ 予以其老也(여이기노야), 趨進拱立(추진공립)
나는 노인 쪽으로 빠르게 종종걸음으로 가서, 손을 포개고 섰다.
▶ 田父問曰(전보문왈), 「子何如人也?(자하여인야)」
밭가는 노인이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이곳은 부곡이라는 동네로 천민들이 사는 동네였다.)
▶ 子之服雖弊(자지복수폐), 長裾博袖(장거박수), 行止徐徐(행지서서), 其儒者歟?(기유자여)
네가 입은 옷을 보니깐, 비록 낡았지만, 옷자락이 길고 소매는 넓으며, 걸어오는 폼을 보니깐, 공부깨나 한 자로구나?
▶ 手足不胼胝(수족불병지), 豊頰皤腹(풍협파복), 其朝士歟(기조사여)?
수족이 갈라지거나, 굳은살이 없고, 볼이 도톰하고, 배가 똥똥하게 나온 것을 보니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구나?
▶ 何故至於斯?(하고지어사) 吾老人(오노인), 生於此老於此(생어차노어차),
넌 도대체 왜 여길 왔는가? 내가 노인으로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은 사람인데,
▶ 荒絶之野(황절야지), 窮僻獐癘之鄕(궁벽장려지향), 魑魅之與處(리매지여처), 魚蝦之與居(어하지여거)
- 獐癘 : 장기(瘴氣)를 마셔서 생기는 병(病). 남부(南部) 평야(平野) 지방(地方)에 많은 병(病)으로, 풍토ㆍ기후(氣候)가 몹시 사나운 곳에서 생기는 나쁜 병(病)
황량하고, 편벽한 이곳에서 장독만 마시면서 산 고향인데, 나는 항상 도깨비하고 같이 살고, 물고기와 벗하고 살아왔는데,
▶ 朝士非得罪放逐者不至(조시사비득죄방축자부지), 子其負罪者歟?(자기부죄자여),
여기는 도무지 벼슬아치가 죄를 얻지 아니하고 여기에 올 리가 없다. 그대는 죄를 지은 놈이로구나?
▶ 曰 : 「然」,
(삼봉은) 대답하기를, “네”라고 했다.
▶ 曰 :「何罪也?:하재야」:
그 노인이 말하기를 “무슨 죄냐?”
▶ 豈以口腹之奉(기이구복지봉), 妻子之養(처자지양), 車馬宮室之故(거마궁실지고),
너는 너의 배때기 하나 채우기 위해, 처자를 기르기 위해, 좋은 자동차를 타고, 궁실에서 살기 위해서
▶ 不顧不義(불고불의), 貪慾不厭(탐욕불염), 以得罪歟?(이득죄여)
불의를 돌보지 않고, 탐욕을 마다하는 법이 없고, 그래서 죄를 지은 놈이구나?
▶ 抑銳意仕進(억예의사진), 無由自致(무유자치), 近權附勢(근권부세),
그렇지 않다면, 네가 벼슬을 얻으려고 온갖 힘을 다 쓰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벼슬을 얻을 수 없으니깐, 권세에 가까이 가서
▶ 奔走於車塵馬足之間(분주어거진마족지간), 仰哺於殘杯(앙포어잔배), 冷炙之餘(낸적지여)
(권문세가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 먼지가 난다.) 그 먼지가 나는 사이에서 분주히 쫓아다니면서, 그놈들이 마시다 남긴 술이나 들이키고, 먹다 남긴 차가운 고기나 쳐먹으면서
▶ 聳肩諂笑(용견첨소), 苟容耳悅(구용이열), 一資或得(일자혹득),
어깨를 쳐들고 아양을 떨며, 남을 기쁘게 해서, 어쩌다 한 자리 얻었다가,
▶ 衆皆含怒(중개함노), 一朝勢去(일조세거), 竟以此得罪歟?(경이차득죄여)
모든 주변 사람들이 (벼슬자리 얻을 수도 없는 놈이라고) 화를 내니까 하루아침에 그 세력이 없어져서 결국 죄를 얻고 만 놈이구나?
▶ 曰(왈);「否(부)」
(삼봉은)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아니올시다.
▶ 然則豈端言正色(연즉기단언정색), 外示謙退(외시겸퇴),
그렇지 않다면, 너는 얼굴을 단정히 하고 정색을 하면서 밖으로는 아주 겸손한 척 하면서,
▶ 盜竊虛名(도절허명), 昏夜奔走(혼야분주),
허명을 훔치고, 밤에는 분주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 作飛鳥依人之態(작비조의인지태), 乞哀求憐(걸애구연),
사냥하는 새가 사람의 어깨에 붙어서 아양거리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구슬프게 보여 사람들에게 연민을 구하고,
▶ 曲邀橫結(곡요횡결), 釣取祿位(조취록위):
세상을 아첨하면서 굽은 자세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옆으로 빽이나 쓰고, 그래서 녹위를 조취해서,
▶ 或有官守(혹유관수), 或居言責(혹거언책),
이 구문은 <맹자>에서 인용된 것임.
관직에 있던지, 말을 바르게 하는 언책의 자리에 있던지
▶ 徒食其祿(도식기록), 不思其職(불사기직),
그 녹을 거저 처먹고, 그 자기가 해야 할 직분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 國家之安危(국가지안위), 生民之休戚(생민지휴척), 時政之得失(시정지득실), 風俗之美惡(풍속지미오), 漠然不以爲意(막연불이위의)
국가의 안위와 보통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 걱정,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싫음 등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자리에만 연연해서)
(요새 정치하는 국회의원의 꼴이다.)
▶ 如秦人視越人之肥瘠(여진인시월인지비척),
진나라 사람이 월나라 사람의 비척(肥瘠:뚱뚱하고 마른 것)을 쳐다 보듯이 하고,
진과 월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관심이 없다. 진나라 사람은 월나라 사람이 살이 쪘든, 말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以全軀保妻子之計(이전구보처자계), 偸延歲月(투연세월),
자기 몸 하나만 온전하게 하고, 처자 보존만을 계산하면서, 세월을 거짓되게 끌기만 하고,
▶ 如見忠義之士(여견충의지사), 不顧身慮(불고신려), 以赴公家之急(이부공가지급):
충의지사가 자기 몸의 근심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의 급한 일에 헌신하고,
▶ 守職敢言(수직감언), 直道取禍(직도취화),
그리고 자기 직을 지켜서 할 말을 감히 하고, 직언을 해서 화를 당하면,
▶ 則內忌其名(즉내기기명), 外幸其敗(외행기패),
속으로 그런 사람의 이름을 뇌 아리기를 꺼려하고, 겉으로 그런 사람(충신들이)이 패한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 誹謗侮笑(비방모소), 自以爲得計(이자위득계),
비방하고, 모멸하면서 비웃고, 자신 스스로는 잘 살아남았다고 하다가
▶ 然公論諠騰(연공론훤등), 天道顯明(천도현명),
(저런 나쁜 놈이 있냐는) 공론이 일어나서, 천도(天道)가 바르게 들어나서,
▶ 詐窮罪覺(사궁죄각), 以至此乎?(이지차호)
사기 친 것이 다해서, 그 죄가 발각되어 여기에까지 온 놈이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지식인들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볼 수 있다.
<답전부>라는 정도전의 유배문학은 고려말 우리 민중의 소리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500여년 전 소리를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요 감격이다. -도올-
정도전은 궁벽한 곳에 가서, 밭 가는 노인한테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 曰 : [否]
답하길,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야기와 같다. 1375년, 이 땅에서 있었던 장면을 한문으로나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정도전은 이 노인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성인의 반성을 외치고 있다. 유배를 가서, 지식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깊은 반성의 계기를 얻었고, 국민들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정치인은 모두다 귀양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민중의 지혜를 발견하는 기회가 그들에게도 오기를 바란다.
이런 강의로 교훈을 배워서, 우리 역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9. 답전보의 다른 해석
우리 집은 너무 낮고 기울어지고 좁고 누추하다. 이 빈곤함과 마음이 울적해짐을 잠시 잊기 위해 들판에 나섰다. 넓은 들판을 둘러보니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눈썹이 길고 하얀 것이 나이가 들어보였다. 진흙투성이에다가 등허리가 흠뻑 젖은 모습으로 손에 호미를 쥐고 밭을 갈고 있었다.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옆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멋쩍게 한마디 툭 던졌다. “노인장 수고하십니다.” 노인은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살갑지가 않았다. 호미를 밭 한 가운데다가 놓고 들을 가로질러 경사가 진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양손을 무릎에 걸치고 앉았다. 노인은 나에게 끄덕끄덕 턱으로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노인의 지시에 따라 있는 곳으로 갔다. 양 손을 포개어 정중한 자세로 섰다. 노인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 도대체 어떤 놈이냐. 너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자락이 긴 것과 소매가 넓은 것을 보니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걷는 것도 폼이 있고, 너 공부 좀 한 놈이구나. 손은 갈라지거나 굳은살이 없고 볼이 도톰하고 배가 똥똥한 것이 벼슬을 한 놈이겠구나. 이런 촌구석에 왜 왔느냐. 내가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은 사람인데 이 황량하고 편벽한 이곳에서 장독만 마시면서 살고, 도깨비와 같이 살고 물고기와 벗 삼아 살고 있다. 이곳은 벼슬아치가 죄를 얻지 않고 올 놈이 없다. 너는 죄를 진 것이 틀림없구나.”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무슨 죄일지 궁금해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너는 배를 채우기 위해, 처자식을 기르기 위해, 큰 말을 타고 궁궐 같은 집에 살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면 벼슬을 얻기 위해, 권세에 아첨하고 그 놈들이 남긴 떡고물이나 얻으려고 했다가 능력과 분수에 맞지 않아 이곳으로 쫓겨나온 놈이구나.”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대답
했다. 노인은 또 말을 이어갔다.
“너가 그렇지 않다면, 얼굴을 단정히 하고 바깥으로는 겸손한 척하면서 호명을 훔치고 밤에는 여기저기 분주히 쫓아다니면서 사냥새처럼 어깨에 딱 붙어 아양을 떨고 구슬프게 보이면서 연민을 구하고 세상에 아첨하면서 굽은 자세로 인사하는 것이더냐. 배경이 있는 관직에 있던지, 말을 바로 하는 자리에 있던지, 그 녹을 공으로 먹고 직분을 생각하지 않으며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 그리고 시정의 득실이나 풍속의 미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구나. 진과 월나라 사람들이 비척한 것만 쳐다보듯이 수수방관으로 허송세월을 보냈구나. 또 의로운 자들이 근심을 고려하지 않고 바른 말을 직언을 해서 화를 당하면 속으로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알리길 꺼려하고 겉으로는 그들이 패했던 것을 고소하게 생각만 했구나. 그들에게 비방 모설을 하면서 자신의 안의에 대한 도취에 빠졌고 공론이 일어나 바른일로 잡히면 이제까지의 거짓이 알려져 그 죄가 발각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