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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역에서 남산을 거쳐 종로 광장시장 까지
서울역에서 종로 광장시장까지 트레킹
2022-10-05(첫째 수요일 / 흐림)
코스 : 서울역 -> 남대문 -> 남산(점심) -> 장춘단공원 ->
동대문 역시문화공원(DDP) -> 동대문 -> 동대문 종합시장 -> -> 광장시장 ->
1호선 지하철 종로5가역(탑승) -> 서울역 도착.
함께하신 분들
달친 / 주향기 / 회오리 / 이프로/ 해든 /
younseo / 자하잘 / 청마(靑馬)
코스 안내 / 자하잘
사진 촬영 청마(靑馬)
Canon EOS 5D Mark IV (오막포)
광각렌즈 EF16-35mm F2.8L III USM
단렌즈 EF 50mm f/1.2 STM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448년에도 크게 고쳐지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측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도로를 내기 위하여 헐어 내고 성문만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아래.위층이 모두 5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편액의 필자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은 가로로 쓰여 있으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것은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전형적인 다포(多包)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범을 보이고 있는 한국 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1997년 초 서울시에서 이 문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조명설비를 새로이 한 바 있다.서울 중구는 2005년 10월부터 통로 보수공사와 홍예문 입구 등 5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 조선 세종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랫부분 석축 기단과 지대석(맨 아래 기초석), 박석(바닥에 까는 돌), 문지도리(문을 다는 돌 구조물) 등을 발굴했다.
이는 1907년께 남대문을 관통하던 전차선로를 내면서 문 주위로 흙을 1미터 가량 쌓아올려 아래쪽 기단과 박석들이 완전히 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따라서 중구는 시민들이 지반보다 1.6m 아래에 있는 이들 구조물을 볼 수 있도록 중앙통로 시굴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관람시설을 설치했다. 숭례문의 중앙통로인 홍예문을 따라 숭례문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고, 5년 3개월에 걸친 복구 사업을 완료하고 2013년 개방되었다. 2013년 5월 1일에는 숭례문 복구를 고하는 '고유제(告由祭)'가 치러졌다.숭례문 복원에는 충남 태안의 안면송이 사용되었다. 안면송은 고려시대부터 궁궐이나 선박용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이번 숭례문의 석가래, 기둥, 지붕 등에 사용되었다.
숭레문상량문(崇禮門上樑文)
1962년 숭례문 해체·복원 공사 때 발견되었다. 2번에 걸친 숭례문 개축공사에 대한 문서로 하나는 1448년(세종 30)의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1479년(성종 10)의 기록이다.
상량문에 의해 조선 초기의 관영공사는 제조가 공사를 총괄하고, 그 밑에 감역관이 감독을 맡았으며, 공장 및 역부가 시공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1448년의 상량문에는 "정통 13년 무진 3월 7일 인손시 입주상량"이라고 상량한 날짜가 적혀 있고, 그뒤에 제조에는 의정부 좌참찬 정차(鄭茶)와 형조판서 민신(閔伸), 하부조직의 감독과 자재의 출납을 담당한 하급관리 감역관은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 이명민(李命敏), 별감역(別監役)에 채균경(蔡均卿)이 적혀 있고 그 다음에 기술자들인 공장에 대해 적혀 있다.
장인의 우두머리로서 대목에 사직 최건(崔健), 도석수(都石手)에 사직 신내행(申乃行), 그뒤에는 좌우변목수(左右邊木手)와 석수(石手)의 관직과 이름이 적혀 있으며, 나머지 장인들의 이름과 숫자, 동원된 잡역부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또 1479년의 상량문에도 상량한 날과 제조와 감역관들의 관직·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그밑에 장인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대목의 이름 부분은 해독이 되지 않았으나 관직이 적혀 있어 어오장군(禦俉將軍)임을 알 수 있다. 도석수에는 여절교위(勵節校尉) 김원계(金元繼), 화원(畵員)에는 적순부위(迪順副尉) 김여문(金汝文)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뒤에 기술자들인 장인들의 기록이 이어진다.
두 상량문을 통해 기술자인 장인도 관직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대목과 도석수가 받았던 사직은 정5품 무관계에 속하고 우변목수는 정7품인 사정(司正), 좌변목수는 그보다 1단 낮은 종7품인 부사정의 관직을 받았다. 또 성종 때의 상량문에서는 대목은 정3품 당상관인 어오장군의 관직이었고 도석수의 관직은 종6품의 여절교위인데, 관직 뒤에 행(行)이란 글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위는 높으나 실제 관직은 그보다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때의 상량문에는 대목과 도석수가 같은 직위였으나 성종 때의 상량문에서는 차이가 난다. 이는 세종 때의 공사는 전체를 다시 짓는 공사인 데 비해 성종 때는 숭례문의 하부인 석축부 수리 위주였기 때문에 비중이 큰 건물공사를 담당한 대목보다 낮은 직위였던 것이다. 숭례문의 정확한 건축연대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 장인조직을 알 수 있는 한국건축기술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
'남문안장' 또는 '신창안장'이라고도 불렸다. 그 기원은 조선 태종 14년(1414) 새 도읍지인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였으며, 1608년(선조 41) 포(布)·전(錢)의 출납을 담당하던 선혜청이 남창동에 설치됨에 따라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데서 유래한다. 그후 이 시장은 1921년 3월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개시 초기 거래물품은 미곡·어류·잡화·과실 등이었는데, 주로 거래되는 물품은 곡물류였다.
1922년 경영권이 일본인 소유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넘어갔으며, 1936년 3월 남대문시장에서 중앙물산시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8·15해방 후에는 남대문상인연합회가 운영했으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미군의 군용·원조 물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활기를 띠었다. 6·25를 겪은 후 빈손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잿더미가 된 이곳에 몰려들어 천막을 치고 억척스럽게 상권을 장악하면서 한때 '아바이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대문시장 상권의 70%는 북한 출신의 실향민들이 쥐고 있었으나 최근 젊은이들로 바뀌고 있다.
1953년 화재발생으로 시장이 전소되었다가 1958년 대지 약 1만 2,000평, 건평 약 2,000평 규모의 건물이 세워졌다. 1963년 남대문시장주식회사가 발족되었지만, 1968년 대화재가 발생하여 시장의 중심부가 전소되기도 했다. 규모는 대지 약 2만 2,000평, 건평 약 6만 8,000평으로 노점상에서부터 현대식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상품을 고루 갖추고 있다. 건축자재와 가구류를 제외한 의류·식품·청과·잡화 등 모든 업종이 총망라되어 있고, 대부분의 상품을 직접 제조·생산하여 전국에 판매하며 새벽 3시면 전국의 소매상(중간 도매상)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룬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체제에서 매출이 절반 수준에 머무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품질에 비해 가격이 싼 장점을 앞세워 자생 공동상표로 중국 등지에 제품을 수출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재래시장이 점차 위축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백화점식 서비스 강화, 첨단 판매기법 도입, 사이버 쇼핑시장 진출, 시장정보지 〈월간 남대문시장〉 발간, 도매고객에게 회원권 발급, 독창적 디자인과 새로운 홍보전략 등으로 현대화·고급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2000년 3월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남산(南山)
고려 시대의 수도 개성에도 남산(南山)이 있었고 경주 서라벌에도 남산은 있다. 남산이란 말 그대로 도성의 남쪽 산을 의미하지만 그렇게 지리적으로 간단히 개념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곳은 아니다.
풍수지리상 남산은 화산(火山)인 관악산의 불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남산 아래 숭례문 옆으로는 남지를 팠다. 그런데 남지를 팠는데도 도성에 화마가 끊이질 않자 이후 연못은 메워졌다 복원되기를 반복한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는데 남지가 복원되면 남인이 득세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당시 남지는 남인 세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남산 아래에 거주하는 지식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나가 출세하려는 남산골 샌님들이 그 한 부류이고, 또 한 부류는 정계에서 은퇴하기는 했으나 정치와 완전히 담을 쌓지는 못하고 다리 하나를 슬쩍 걸친 지식인들이다. 그 경계가 되는 지점이 바로 남산이다. 그래서 남산 위에 올라가 도성을 바라보면 궁궐 사정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남산에는 설마현(雪馬峴) 고개가 두 개 있는데 설마(雪馬)란 눈썰매를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옛 이름) 남쪽의 서빙고 동쪽 고개를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 한남동 방면에 있는 고개를 작은 설마라고 한다. 또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는 목멱산 남쪽 이태원(梨泰院)에 있는 들에는 고산사(高山寺) 동쪽으로 흐르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성 안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갔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孟思誠), 신장(申檣) 등이 썼다. 55권 25책. 목판본.
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조선 시대의 야사총서(野史叢書). 59권 42책. 필사본.
산의 높이는 262m이며, 목멱산·인경산·마뫼로도 불렸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때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다. 남산타워라고도 하는 N서울타워는 산정에 솟아 있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휴식·관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총면적 2,971㎢의 남산 일대가 시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부터 서울특별시의 ‘남산 제모습찾기 종합계획’이 추진되면서 남산의 옛 모습 복원을 통해 남산의 역사적 위상과 자연경관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민 휴식 공간으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남산의 명소는 N서울타워·팔각정·장충단공원·남산케이블카·야생화원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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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의 복판에 솟아오른 민조의 영산 남산의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케이블카는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시설이다. * 남산 남산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진 산이다. 무학산, 북한산, 인왕산등 도성의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있는 이른바 '내사산'과 함께 도읍지를 감싸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한양 정도 후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남산'으로 불렸고 목멱대왕을 모신 신당이 있다해서 '목멱산'으로 불리었다.해발 262m의 남산은 오늘날엔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한 '도심 속의 생태 공원'으로 서울 시민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서울의 상징과도 같은 산이다.
남산 수제돈까스 예담집에서 맛난 왕돈까스를 먹네요..
'남산돈가스' 맛집을 소개합니다
1992년 남산에서 돈가스를 판매한 30년 역사의 수제 돈가스 전문점으로 2015년 이후부터 현재는 백범광장 맞은편에서 영업 중이다. 가게 간판명은 '남산돈가스'다. 옛날 돈가스와 함께 수프, 김치, 깍두기, 고추와 쌈장을 반찬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수프와 반찬은 무한리필이다. 식당 벽에는 'SINCE 1992 박제민 남산돈까스 최초집 역사'라고 안내되어 있다. 남산 돈가스는 1980년~90년대 남산 케이블카가 서울 여행의 인기 코스로 자리 잡으면서 외식 메뉴로 흔하지 않던 '돈가스' 식당들이 남산 케이블카 주변으로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름나기 시작했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4번 출구에서 4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N서울타워(영어: N Seoul Tower)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남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이다.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m, 해발 479.7m이다. 수도권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 타워를 이용하여 전파를 송출한다.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에 있어서 보통 남산타워라고 널리 부르고, 서울에 있어서 서울타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행정안전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올라간다. 남산타워까지 걸어가, 이 탑은 국가 상징물이자 도시 경관으로 유명하다. 남산(243m 또는 797ft)에 236.7m(777ft)의 탑이 있다.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과 현지인을 끌어 당긴다. 특히 타워에 불이 들어오는 야간에는 더욱 그렇다. 사진 작가는 타워가 제공하는 탁 트인 전망을 즐긴다. 매년 약 840만명이 N서울타워를 방문한다. N서울타워는 남산공원 과 남산골 한옥마을 등 한국이 제공하는 많은 명소들로 둘러 싸여 있다. 방문객은 어린이, 노인, 십대, 성인과 같은 단체에 따라 유료로 탑을 올라갈 수 있다. 요금은 패키지 및 그룹 크기에 따라 다른다. N서울타워는 N로비, N플라자, N타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N플라자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N타워는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N로비에는 N기프트, N Sweetbar, BH스타일, 살아있는 박물관, Memshot, 간호실, 정보부스, 카페 및 전망대 입구가 있다. N Plaza에는 2층이 있다. 1층에는 티켓부스, N테라스, N기프트, 햄버거 가게가 있다. 2층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Place Dining과 "Loves of Locks"이있는 Roof Terrace가 있다. N타워는 1층, 2층, 3층, 5층의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N서울타워에는 4개의 전망대가 있다. 선물 가게와 2곳의 레스토랑도 존재한다. 서울의 대부분을 정상에서 볼 수 있다. N서울타워는 두 번째 격자 전송 타워다. 이 타워에는 32인치 LCD 화면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360도 파노라마 보기가 있는 디지털 전망대가 있다. 이것은 N타워의 3층에 있다.
남산 팔각정
남산 팔각정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우남정을 1960년 4.19의거 때 철폐한 후 1968년 11월 11일 건립된 역사를 갖고 있다. 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아래 펼쳐진다.
장충단비(奬忠壇碑)
196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 장충단비와 사당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신라호텔 쪽이었는데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장충단비의 앞면에 씌여진 글자는 순종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친필이고 뒷면에 새겨진 찬문(撰文)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을 지내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지었다.
장충단 공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영조 임금 때 서울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으로 고종 임금이 이곳 남소영 터에 장충단을 꾸민 뒤로는 장충단이라 불리어 왔다. 1894년(고종 31)에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어려운 시국을 진정시킨다는 핑계로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하여 결국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왕조의 내정에 관여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에는 러시아의 개입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친밀관계에 있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1895년 8월 19일 밤 궁내대신(宮內大臣) 이경식(李耕植)은 궁중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8월 20일 새벽 일본의 난군(亂軍)과 자객(刺客)들이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乾淸宮)을 습격하는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이 때 이경식은 명성황후를 보호하려다 순사(殉死)하였고 또 당시 부령(副領)이었던 홍계훈(洪啓薰)도 이날 새벽 경복궁으로 밀려드는 난군들의 총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와 광화문을 가로막고 난군의 진입에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수없는 총칼의 상처를 입고 역시 순사하였다.
그 후 고종 임금은 1900년(광무 4) 옛 남소영 터에 제단을 꾸며 을미사변 당시 순사한 두 사람의 충신 및 군졸들의 혼을 받들고 이 제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고 하였다. 장충단에서 제례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기도 하였는데 그 광경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남산 밑에 장충단 짓고/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일세”라 하는 민요가 불리어졌다고 한다. 장충단에는 원래 사당과 부속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졌으며 장충단비만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장춘단공원(奬忠壇公園)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공원.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0년 11월 대한민국 고종이 설치한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기원으로 하며, 일제에 의해 1919년 공원이 되었다. 1900년 고종이 을미사변으로 순사한 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호위 장졸들의 위패를 모신 장충단을 세워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다. 이후 민족정신 말살 정책에 따라 장충단공원으로 격하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건물은 완전히 소실되고, 장충단비가 남아 있다. 1984년 9월 22일, 건설부고시 제 374호 근린공원이 되어 현재는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합병되었다. 장충단 공원은 광장·놀이터·분수대 등의 공원시설과 석호정·장충단비석·이준열사동상·사명대사동상 등이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DDP에 가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도 꼭 같이 둘러보자. 원래 DDP 부지에는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다. DDP를 짓는 과정에 운동장을 철거하기 위해 땅을 팠는데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유물 1000여 점이 발견됐다. 조선시대 훈련도감인 하도감이 있던 자리라는 것도 밝혀졌다. 무엇보다 이수간문과 치성 등은 값진 문화 유적이다. 이수간문은 성곽에 물이 지나가도록 만든 수문이다. 치성은 성곽의 바깥으로 쌓은 또 하나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인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치성은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가면 복원된 이간수문과 치성을 볼 수 있다. 또한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유구전시장',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등의 전시관에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터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DDP
도심 한복판에 불시착한 우주선. DDP의 첫인상이다. DDP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ongdaemun Design Plaza)의 약자이면서 '꿈꾸고 만들고 누린다(Dream, Design, Play)'는 의미도 있다. DDP는 복합문화예술공간답게 디자인, 예술, 역사, 문화 등을 한데 아우른다. 아이들에게는 건물의 독특한 생김새가 첫 번째 관심사다. 건물을 보고 하나의 사물을 떠올리게 한 후 탐험하듯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흥미로운 예술 체험이다.
DDP 건물의 표면을 잘 들여다보면 은색의 알루미늄 판이 보인다. DDP의 외관은 총 4만 5133장의 알류미늄 판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건물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그래서 4만 5133장의 판 크기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것을 모두 만드는 데 18개월이 걸렸다. 판의 모습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고려청자 위에 바둑판 무늬를 그려 이 같은 형상을 얻었다고 한다.
4만 5133장의 판을 어떻게 정확히 제자리에 붙였을까? 판 뒤편에는 각기 다른 번호가 새겨져 있다. 이를 활용해서 정확한 위치에 붙일 수 있었다. 판 한 장 한 장이 모여서 DDP의 독특한 겉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2007년 12월 철거된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됐다. 2009년에 착공하여 2014년 3월에 개관했다. 설계는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맡았다. 건축물 외부와 내부에 직선이나 벽이 없이 액체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공간적 유연성이 특징으로 우주공간처럼 느껴지는 대규모 공간감을 구현하였다.
동대문의 평화시장은 의류를 생산 판매하는 도매 시장으로 60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동대문 주변에 고층 쇼핑몰이 들어서고 인터넷 쇼핑이 활발해졌지만, 평화시장은 여전히 점포 2,070개, 종사자 5,300여 명, 1일 이용객 5만여 명의 규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K패션을 선도하는 시장으로서 디자인에서 제작, 배송까지 72시간 만에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도매 시장입니다. 평화시장은 과거에는 유통된 옷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의류와 모자, 스카프 등의 상품들을 직접 생산하는 공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1층에 상점이, 2~3층에는 봉제공장이 들어서 생산과 유통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이곳은 한국의 경공업, 더 나아가 산업발전의 아이콘과 같은 시장입니다. 한때 대한민국 의류업계를 주름잡았던 동대문이지만 전쟁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의 산 현장이었던 평화시장은 여느 시장과는 다른 특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 살던 수많은 피란민은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넘어왔고 그중 일부는 청계천 근처에 거주하면서 의류를 제작하고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전쟁으로 대부분의 생계 기반을 잃어버린 이들은 팔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물건이라도 팔고자 했고, 청계천 주변에서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활용한 옷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동대문 주변은 무허가 건물과 노점이 즐비했고 이에 서울시가 1958년 청계천을 도로로 복개하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재래시장은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인들은 당국의 조치에 집단 대응하여 서울시로부터 부지를 제공받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들 상인 중 약 60%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평화 통일의 염원을 담아 상가의 이름을 평화시장으로 지어 1962년에 오픈했습니다. 하지만 평화시장 개설 이후에도 인근에는 여전히 판자촌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유입된 값싼 노동력으로 가내수공업 형태의 의류제조업이 성행하였고 이렇게 열악한 노동조건이 이곳에서 일하던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낳은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 서울 성곽의 동쪽에 있는 대문으로,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불린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 소실되면서, 도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축조된 원형을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에 소재한다.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국보 제1호인 숭례문과 비교하면 전체 모습과 규모는 비슷하되 화려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특이하게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조형을 보여준다.
서울의 풍수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빈약하다 하여, 이를 보강하기 위해 꾸불거리는 산맥의 모습을 한 '지(之)'라는 글자를 이름의 중간에 넣은 까닭에 다른 성문보다 1자(字)가 많은 4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반달형의 옹성도 같은 이유로 문 밖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 다포계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동대문종합시장(Dongdaemun Shopping Complex)은 1969년에 개장한 원단, 부자재 종합 상가이다. 서울 종로구 종로 272에 위치해 있다. 원단류, 의류 부자재, 수예품이나 뜨개, 커튼 등과 같은 섬유 및 의류 관련 액세서리, 혼수용품 매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구관과 신관 모두 지하1층에서 지상 5층까지 A동에서 D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3천여 개 점포가 입점해 있다. 통일상가나 동화상가와는 달리 샘플 제작 공장이 없다. 지하 1층에는 실, 이불, 수예, 레이스, 커튼, 인테리어 원단, 소파 커버링과 제작, 패브릭 맞춤 제작소가 모여 있다. 지상 1층에는 의류 부자재, 이불, 수예, 그릇, 양복 원단, 커튼, 카펫, 타월 상가가 있고 2층에는 옷감, 한복, 주단, 면직물, 부자재 가게가 있다. 3층과 4층은 패브릭, 밍크, 방모, 화섬, 실크, 공단을 판매하며 5층에는 전문 부자재 상가들로 구성되었다. 상가 D동 지하 1층에는 숙련 재봉사들이 근무하는 바느질집이 모여 있다
1905년 7월에 개설되었다고 하나, 18세기 전반에 이미 이곳에는 큰 규모의 시장이 사상도매(私商都賣)의 본거지로 발달하고 있었다. 개설 초기는 동부 이현(梨峴)에 세워졌다고 해서 배우개장이라고도 불렸으나, 개설되던 해 11월 시장관리를 위한 광장주식회사(廣場株式會社)가 설립되면서부터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대에 여러 상가가 생기고, 특히 1970년 12월 종로6가 동대문 맞은편에 기존의 동대문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큰 동대문종합시장이 개설됨으로써, 현재의 동대문시장은 종로5·6가 일대의 전체 상가를 가리키며, 과거의 동대문시장은 광장시장에 한정되고 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