眉巖先生集卷之十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癸酉 萬暦元年我宣廟七年 *1573,선조6,계유년
8월 【22일】성균관 유생들이 26일에 상소하여 네 분 유현(儒賢)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반드시 정일두(鄭一蠹 정여창)의 행장(行狀)을 태상시(太常寺)에 바친 뒤에 시호(諡號)를 논의하고, 시호가 하사된 뒤에 《유선록(儒先錄)》을 인쇄하여, 주상께서 자세히 보신 뒤에 배향을 청원할 수 있다. 질서를 무시하면서 서둘러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여 대사성(大司成) 구봉령(具鳳齡)에게 편지를 보내 타일러 말리게 했다.
二十二日。聞館中諸生以二十六日上疏請四賢從祀。余以爲必鄭一蠧行狀呈于太常然後議諡。賜諡然後印儒先錄。御覽之詳然後從祀之請可申。不可欲速而無序。通簡于大司成具鳳齡。使諭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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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집(眉巖集) 유희춘(柳希春)생년1513년(중종 8)몰년1577년(선조 10)자인중(仁仲)호미암(眉巖), 연계(漣溪)본관선산(善山)시호문절(文節)특기사항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김인후(金麟厚)와 교유
眉巖先生集卷之五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戊辰 皇明隆慶二年我宣廟二年 *1568,선조1,무진년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56 | 4월, 응교가 되다. ○ 朝講 후 탑전에 나아가 趙光祖의 推崇을 건의하다. ○ 外祖인 崔溥의 「錦南集」을 교정하다. |
十五日。太學儒生詣闕上疏。請趙光祖,李彦迪,金宏弼,鄭汝昌四先生文廟從享云云。上答曰。爾等以太學之士。游心道學。追慕眞儒。封上疏章。請以四賢從祀文廟。爾等趨向之正。亦可知矣。然一朝至於從祀。似爲重難。聖上嘉納善言。至矣。
十七日。是日政事。趙公光祖追贈領議政。金啓爲承旨。余卽送致賀書。
4월
【15일】태학 유생들이 대궐로 들어가 상소하기를, 조광조ㆍ이언적ㆍ김굉필ㆍ정여창 등 네 분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했다 한다. 성상께서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태학의 선비로서 도학에 마음을 두고 참된 선비를 추모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사현(四賢)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간청하니, 너희들이 추구하는 바가 바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것 같다.”
하였다. 성상께서 좋은 말씀을 받아들임이 지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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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 11월 4일 을묘 1번째기사 1567년 명 융경(隆慶) 1년
조강에서 《대학》을 강했는데 이황이 《소학》을 강조하며 기묘 사림을 기리다
○乙卯/朝講。 進講《大學》, 自富潤屋, 止功不可闕如此云。 李滉臨文啓曰: "古人先讀《小學》, 涵養本源, 故《大學》先言格物致知。 後人不讀《小學》, 故學無根本, 不能知格致之功。 《小學》非但年少所讀, 長成之人, 亦可讀也。 小學之書, 流布東土已久, 而人無能知其大義。 有金宏弼, 聚徒講明, 其書大行於世。 至於己卯年, 人皆以《小學》爲本。 不幸, 賢人君子陷於罪網, 至今閭巷之間, 無讀《小學》之人, 此敎化不明之致也。 自上雖進講《大學》, 而《小學》亦可留覽也。" 講訖, 又啓曰: "小臣, 頃日以臺諫入侍, 論趙光祖之賢, 而不幸被罪之意, 言語之間, 不得分明啓達, 至爲惶恐。 光祖非凡常賢士也, 天資粹美, 絶出等夷。 其篤學力行, 鮮有比倫。 晩屈科擧, 以大臣薦擧, 陞授六品職。 及其科第, 一時賢士, 皆以光祖爲領袖。 四五年間, 中廟擢拔, 置之宰相之位, 物望以爲允當。 光祖自以遭遇聖明, 欲行道術、淑人心, 措世唐 虞, 致君堯、舜爲心。 不幸, 小人因緣讒間, 竟致大罪。 其時被罪之人不一, 而光祖, 則以一國之人欽倚仰重, 故被罪尤酷。 厥後中廟、仁廟, 亦知其無罪矣。 其時爲士者, 皆讀《小學》, 故至今朝廷之上、閭巷之間, 猶有興起之心, 皆其餘化也。 頃日, 小人欲害賢士, 而無可名之罪, 則曰此乃《小學》之徒。 《小學》乃聖賢之法言, 其間雖有一二人讀《小學》, 而心不正者, 豈《小學》之罪哉? 自上先定是非, 然後人心興起。 金宏弼受業于金宗直, 一日作詩曰: ‘《小學》書中悟昨非。’ 宗直見之, 以爲作聖根柢。 宗直則家行卓異, 金宏弼、鄭汝昌, 則學問純至, 燕山朝, 俱被大罪。 至中廟朝, 伸雪無辜被罪之人, 而此人等則以一時道學之宗, 皆贈右議政, 春秋賜祭焉。 光祖學行, 與宏弼、汝昌一般人物也。 一樣追贈, 則後人必有所矜式矣。 李彦迪事, 前日亦已啓達, 而以先王朝得罪之人, 表章爲難, 聖意至矣。 但彦迪之罪, 則大不然。 初曰有功, 而參於勳籍。 彦迪之賢, 以參勳爲未安, 則李芑、尹元衡以爲異己。 削其勳而罷其職。 旣而殺宋麟壽, 又加遠竄之罪。 雖曰得罪於先王朝, 而其實李芑、元衡罪之也。 彦迪學問無愧於宏弼、汝昌, 必須一樣伸雪表章, 然後是非可明也。 身在魑魅之鄕, 不忘愛君之誠, 至於著書以寓其志。 頃日敎以搜訪遺書, 此盛擧也。 然臣竊聞之, 則彦迪推《中庸》九經之旨, 倣西山眞氏之說, 作爲一秩, 欲資備問之益, 其心誠可悲也。 問于朝廷, 處置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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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19일 임인 1번째기사 1572년 명 융경(隆慶) 6년
1568년 선조 1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한 상소의 내용
○壬寅/戊辰 夏, 館學儒生上疏, 請以金宏弼及鄭汝昌、趙光祖、李彦迪從祀文廟。 其論宏弼曰: "生當絶學之後, 早奮有爲之志, 以聖賢爲必可至, 服《小學》以培根本, 遵《大學》以立規模, 力持誠敬, 動遵禮法。 及其造詣旣深, 踐履益篤, 乃以闡明斯文爲己任, 敎人不倦, 循循有序。 凡賢人吉士之名于世者, 多出其門。 風聲所及, 莫不向善而興起, 一時稱爲道學之宗。" 疏至三上, 是時兵曹參判白仁傑請以趙光祖從祀文廟。 上下其疏于大臣李浚慶等議曰: "以道學之功言之, 欲祀光祖, 不可不竝祀金宏弼也。 及羅文章之士, 彬彬輩出, 然義理之學, 實自宏弼啓之也。 宏弼生於我朝絶學之後, 首慕聖賢之學, 盡棄舊習, 專心《小學》, 不求聲利, 一動一靜, 必循禮法, 專力致敬, 眞積力久, 道成德立, 而不幸身遭亂世, 臨禍之際, 從容就死。 雖不克有所施設於世, 而其中之所得, 益驗於此。 至於誨誘不倦, 使我東方之士, 知有聖賢之學, 實此人之功也。" 今年春, 副提學柳希春獻議於經席曰: "金宏弼、鄭汝昌, 請賜懿諡, 以示聖朝崇奬儒先之意。" 敎曰可。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19일 임인 1번째기사 1572년 명 융경(隆慶) 6년
1568년 선조 1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한 상소의 내용
무진년022) 여름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소에 김굉필을 논하기를,
"학문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서 일찍이 큰 뜻을 품고 분발하여 ‘성현도 배우면 될 수 있다.’ 하고 《소학(小學)》을 익혀서 근본을 배양하고 《대학(大學)》의 가르침에 따라 규모를 세웠으며, 성(誠)과 경(敬)을 힘써 지키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조예가 깊어지고 실천이 더욱 돈독해짐에 이르러서는 사문(斯文)을 천명(闡明)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고 순서있게 가르치니 세상에 이름 있는 현인 길사(賢人吉士)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가르침이 미치는 곳이면 누구나 선(善)을 향하여 흥기(興起)되었으므로 한 시대가 도학의 종주(宗主)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세 번째 올라오자 당시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상소를 대신에게 내렸다. 이준경 등이 의논드리기를,
"도학의 공으로 말하자면, 조광조를 종사(從祀)하려면 김굉필도 종사하여야 합니다. 신라로부터 고려까지 문장에 능한 선비는 빈번하게 많이 나왔으나 의리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로부터 계도(啓導)되었습니다. 김굉필은 우리 나라의 학통(學統)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제일 먼저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舊習)은 모두 버리고 《소학》에 전심하여 명예와 이욕을 구하지 않고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반드시 예법에 따르며, 치경(致敬)에 전력하여 오래도록 힘을 쌓아 도덕(道德)을 이루었는데 불행히 난세를 당하여 화를 당할 때 조용히 죽음에 임하였으니, 비록 세상에는 포부를 펴지 못하였지만 그 마음속에 자득(自得)함이 있음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생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우리 나라의 선비들로 하여금 성현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입니다."
하였다. 금년 봄에도 부제학 유희춘이 경연에서 헌의(獻議)하기를,
"김굉필과 정여창에게 좋은 시호를 내려 선유(先儒)를 숭장(崇奬)하는 성조(聖朝)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좋다고 전교하였다.
[註 022] 무진년 : 1568 선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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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권, 선조 1년 6월 4일 壬午 2번째기사 1568년 명 융경(隆慶) 2년
이조에서 정몽주의 6대 봉사손으로 관직이 없는 인원에게 서반 군직을 주도록 청하다
○吏曹啓曰: "鄭夢周及深源爲國忘身; 金宏弼、鄭汝昌, 皆厲志聖賢之學, 有功於斯文; 趙光祖、李彦迪, 相繼而起, 講明斯道, 學行如彼卓卓, 而其子孫有未及敍者, 誠爲闕典。 鄭夢周以下六人等, 奉祀子孫, 未授職人員, 依尹根壽進啓, 量付西班軍職, 以奉其祭。 且世其祿, 其中可用之人, 隨才隨敍, 以示國家褒賢勸忠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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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20일 癸亥 7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정광필 등이 금은의 유출 방지책과 정몽주의 문묘 종사에 관해 의논하다
○鄭光弼、申用漑、高荊山、南袞、韓世桓議曰: "金銀挾持之禁, 旣詳且嚴, 無以加矣, 而冒法者甚多, 防禁誠難。 然而赴京之人, 法應齎持之物與卜駄之數, 自有呈限, 令使及書狀官, 點檢本人元持之物及中朝賜物, 而準計貨買之數, 其過當物件, 竝皆沒官治罪, 使無所利於己, 則雖不用重典, 自不至於濫矣。 書狀官檢察一行, 其任重矣, 而例以監察差遣, 職秩旣卑, 經歷亦淺, 糾擧之際, 多致疎緩。 近來冒禁者滋多, 未必不由於此。 質正官則曾經選擇, 多是諳練之人, 今後監察, 適無可當人, 以質正, 兼帶御史遣之。 如是則事體嚴重, 庶無前日之弊。 凡有抱冤之民, 許令上言陳訴, 國家仁政也。 近年懷奸挾詐之徒, 無其實, 而巧爲冤悶之辭, 陳訴不已, 亦甚紛紜, 有妨治道。 自今凡干刑戮及身、父子、嫡妾、良賤分揀等項, 情理切害者, 毋過三度, 其他詞訟, 則毋過再呈, 以爲令式, 何如?"
李坫、韓世桓、柳湄、金克愊、方有寧、許硡、金安老議曰: "吾東方歷世雖久, 其間儒者, 率以文章相尙, 莫知所以爲學, 而獨
夢周, 超然自得於心, 倡明性理之學, 誠所謂東方理學之祖, 其從祀文廟, 固無愧矣。 議者但以事辛爲疑, 然若知其僞辛而甘心事之, 則是隨世取功名者之所爲, 當擧朝廷趨赴眞主之時, 豈肯獨爲王氏死節乎? 果事二姓, 則大節已虧, 論夢周者, 豈以忠孝稱之, 而史臣亦無一言及之者耶? 況我太祖、世宗之聖, 親逮見聞, 而褒贈爵諡, 圖入忠錄, 昭示後來, 俾爲矜式, 二聖豈褒寵失節人乎? 臣等意以爲從祀爲當。
金宏弼, 潛心聖學, 踐履篤實, 思企前賢, 開發後學, 今之學者, 多知所趨向, 不爲無功。 然從祀重事, 苟小有異論, 不可遽爲, 公論之發, 終不可泯, 徐竢後日, 衆論皆同然後, 更議施行, 亦無所妨。"
南袞議曰: "鄭夢周, 以英邁絶倫之資, 深探性理之奧, 能造乎諸儒所不及處, 充養旣極, 發爲事業, 乃能扶顚持危, 砥柱乎頹波之中, 變左袵爲衣冠, 明彝倫於庠序, 民至于今, 尙受其賜, 其有功於斯世、斯文, 大矣。 至於事辛之疑, 則又有說焉, 我朝龍興之時, 夢周尙未脫罪籍, 其後因權近上疏, 而始蒙崇褒之典近之智, 足以知夢周, 而太宗之聖, 又親見夢周事君終始之節, 至諡以文忠, 而當時無異議, 乃何至於今日, 徒據勝國之史, 而遽議大賢行事之跡哉? 其升於從祀之列, 永爲萬世矜式, 斷不爲過矣。
金宏弼, 生當絶學之後, 能奮發獨詣, 以誠正之學, 爲諸儒倡, 雖身逢昏亂, 事不著於設施, 而其爲啓發後學, 以衛吾道, 功亦大矣。 然從祀至重, 雖以楊時、李侗諸賢, 尙不得與焉。 因一時之議, 而遽許之, 恐歸於率爾。 謹按, 禮有祭鄕先生於社之文, 臣意爲, 宜考宋朝褒賞濂、洛諸賢故事,
贈以尊官, 錄其子孫, 又取平日講道之所, 置之祠宇, 列於群祀, 官爲致祭, 如此則雖不與於廟庭之享, 於國家崇儒重道之意, 一無所欠。
臣又按, 儒臣鄭汝昌, 與宏弼生於一時, 相爲切磋之益, 如考亭之於南軒也, 今旣奬宏弼, 而不及於汝昌, 則恐爲闕典。"
李自堅、李自華議曰: "夢周, 命世醇儒, 篤於理學, 可謂儒宗。 逮于末路, 臨亂不避, 可謂死節。 在國初, 贈爵與諡, 至于成廟, 錄用其子孫。 其從祀文廟, 則歷朝未遑, 豈無謂歟? 不可輕議於今日。 金宏弼, 稟性純正, 操履端方, 務爲拘檢, 且有學行, 果爲一時推重, 亦爲後輩矜式, 謂之苦節、淸修之士則有矣, 未聞博極群書, 發揮聖經, 垂世之言, 功力及人, 如濂、洛諸儒也。 若以一端爲右, 而敢爲旌異, 則朝家文運之久、人物之多, 豈止此一人哉? 前日大臣等議, 國是判然, 朝議以定, 豈可紛紜異議?" 李思鈞、鄭光國議: "夢周從祀文廟之議, 正待期會而發。 但此重大, 議或少駁, 行難率爾。 一二人應祀而未祀, 雖爲聖治之欠, 尙足明其尊聖、重祀之義, 不猶愈於輕擧, 而有後世之議乎? 夢周學問設施, 忠孝形著, 如彼其卓卓, 而議在百世之後, 尙有異同, 則宏弼似難與此人, 同日陞祀。" 鄭光弼、申用漑啓曰: "新蠶室, 當革罷, 而三醫司官員, 雜錯於臺諫、侍從之列, 不當於瞻視, 依西班、宗親先立之後, 各於班末序立之例, 何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