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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김용직은 고월 이장희의 시「봄은 고양이로다」를 해설하면서 ‘모더니스트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감각적인 언어를, 그것도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시인에게 씌어진다.’1)고 말하고 있다. 객관적 감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의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요소에 대한 반성, 혹은 비판이 드러나는 1920년대의 이장희, 정지용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면서 이승훈2)은 이들로부터 모더니즘이 출발한 것으로 단언한다.
여기서는 초기의 몇 작품들을 살펴 본 후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 세계까지 일별하고자 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은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벋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봄은 고양이로다」
한국시단에 주관의 범람, 감상적 낭만주의가 넘쳐날 때 이장희는「봄은 고양이로다」를 통해 이미지를 제시해 보인 것이다. 쓰인 주요 시어들은 ‘꽃가루, 고양이, 향기, 생기’와 같은 말들이다. 표준적 일상어가 사용된 것3)이다. 이승훈은 김소월류의 토속어, 황석우류의 비일상어도 아닌 표준적인 일상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또한 ‘고양이’라는 객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물의 사물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말하고 있다. 즉 주체와 객체의 일정한 거리 유지로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는 형상화를 보인 점이다. 고양이에 대한 단순한 설명의 차원을 넘어선 이미지 구현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적 자율성 획득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봄과 고양이가 은유적 등가성을 띠는 것도 그렇지만 이 시의 경우 감각적 이미지가 독특한 시적 공간을 전개한다는 것은 1연에서 고양이의 털이 꽃가루와 동일시되면서 그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린다는 묘사가 결국 고양이의 털/꽃가루/향기의 경계가 해체됨으로써 동물/식물/공기의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는 독특한 시적 공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력의 세계는 2연에서 고양이의 눈/금방울/불길의 경계 해체를 통해 동물/광물/공기의 세계가 하나로 융합되고, 3연에서는 고양이의 입술/포근한 봄 졸음의 경계 해체를 통해 활동/졸음, 혹은 삶/죽음의 동일성이 획득되며, 4연에서는 고양이의 수염/푸른 봄의 향기의 경계 해체를 통해 동물/공기의 세계가 하나로 융합된다.4)
매우 치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다시 각 연별로 주에 표로 정리한다.5)고양이의 입술/포근한 봄 졸음의 경계 해체, 활동/졸음, 혹은 삶/죽음의 동일성 획득΄΄˽ȜҰ䤨˽ȜҰ䤨2ÁáﱈĚ尰͡0त뀂윀 이를 통해 후각과 시각에 호소하여 생명력을 구현하고 있는 점에서 이미지즘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순이 버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먹음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달, 포도, 잎사귀」
장만영은「달, 포도, 잎사귀」에서 이장희처럼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상을 강조하는 이미지스트의 면모를 보인다. ‘버레 우는 고풍한 뜰’과 같은 전원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으나,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라는 감각이 이 시편에서 강조하는 점이라고 볼 때 이와 더불어 3연의 형태주의적 시행 배열은 고풍한 뜰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장만영은 사물을 관념이나 정서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사물 그 자체로 보려는 노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전원주의를 극복한 이미지스트라고 본 이승훈의 견해는 설득력을 가진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바다와 나비」
거대한 바다와 한 마리 흰 나비의 대비가 의외성을 지닌다. 그 누구도 흰나비에게 바다의 수심을 일러 준 적이 없다. 그렇기에 바다가 무서울 리 만무하다. 흰나비의 눈에는 바다가 청무우밭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한 마리의 나비에게 바다는 너무나도 크다.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삼월달 바다’에 ‘꽃이 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시사철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흰 나비에게는 그것이 서글픈 일이다. 끝 연에서 여리디 여린 ‘나비 허리’에 시려오는 ‘새파란 초생달’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부각된 점도 이 시의 미학적 성취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흰나비가 있는 바다’라는 자율적 공간의 제시와 더불어 감각적 인상이 놀라운 상상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는 점에서「바다와 나비」는 1930년대라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이채롭게 읽힌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설야」중에서
은밀한 장면과 청각적 이미지에 눈을 대비시킨 참신한 결합으로 눈 오는 겨울밤의 정서를 아주 효과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눈 오는 소리는 물론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서 우리는 마침내 듣게 된다. 도저히 못들을 소리조차도 시인이 제시한 적절한 비유로 ‘눈 오는 소리’를 듣는 효과를 얻는다.
‘머언 곳에서 여인이 옷 벗는’ 장면을 상상한 시인의 상상력은 놀라움을 준다. 살아 있는 이미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늘 새롭다. 절묘한 비유의 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설야」는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秋日抒情」
김광균은「秋日抒情」을 통해 모더니즘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첫 행에서 낙엽을 두고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본 것은 예기치 못한 발상이다. 세실 데이 루이스는 이미지의 역할로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秋日抒情」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낙엽을 보며 시공간을 한참 뛰어넘어 ‘포화에 이지러진/도룬시의 가을하늘’을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은 실로 남다르다. 신선하다. 강렬하다. 환기력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다.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는 한 줄기 길의 이미지를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로 형상화한 대목이 그렇다. 세련된 수사의 한 모델이 될만하다.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도 이 시가 씌어진 시기로 볼 때 매우 참신한 표현이다. 그 다음 행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라는 대목도 예사롭지가 않다. 가을이 아니면 떠올릴 수 없는 서정이다. 그러한 정감을 시인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육화해 보인다.
「秋日抒情」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적막감, 쓸쓸함, 허전함은 우리의 정서 맨 밑바닥을 은연히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정감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처음 부분의 3행이 주는 이미지의 신선감과 강렬성 그리고 환기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수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 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이상,「꽃나무」
「꽃나무」는 ‘나’와 ‘꽃나무’의 대립을 노래한다. 꽃나무는 벌판 한가운데 서 있다. 그 부근에는 다른 꽃나무는 없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지만,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다고 진술한다.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여 여러 번 되씹게 한다. 꽃나무가 한 행동처럼 그도 ‘이상스런 흉내’를 낸다. 꽃나무는 자연의 한 표상이다. 그에게는 한 대상이기도 하다.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이승훈6)은 이런 소외를 두고 스피어즈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단절 개념을 환기한다고 말한다. 꽃나무가 선 ‘벌판 한복판’은 시인의 내면 혹은 뇌리 속의 한 공간으로 읽힌다. 분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자연과 분열된 자연
→꽃나무와 꽃나무가 생각하는 꽃나무
* 시인과 분열된 시인(자아, 자아가 생각하는 자아)
→꽃나무로부터 도망감과 도망가면서 꽃나무의 흉내를 냄
자연과 자아의 단절, 대상과 주체의 단절뿐만 아니라 자연의 내적 분열, 자아의 내적 분열이라는 2중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고뇌나 불안이나 절망을 등한시하고 감각적 인상에만 골몰한 1930년대의 적잖은 이미지스트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상은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적 주제를 육화한 것이라고 보겠다. 주체와 객체의 단절, 주체의 내적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꽃나무」는 시사적 의미를 가진다.
바닥에게는 낮은 창문도
희망이고
몸이 무거운 나무에게는 떨어지는
잎 하나도 기쁨이다
층계 위에 오래 앉아 있은 나는
내려가는 것이 희망이고
엊저녁에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수술을 하고 지금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앉아 있는 아이와, 어제까지 몰랐던 여자와 아침까지 자고 지금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와,
그러고도 아직 사랑에 굶주린
이 아이들의 공복으로 배가 접혀 오는 내 머리 위의 도시에 그늘을 펴고 있는 라일락의 꿈이 당신은 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쉽게 짐작하겠지만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라일락의 꿈은
시든 꽃을 흔들어버릴 4월의 바람이고
바람도 아니 부는 4월의 봄은
꽃피는 절망이다
-오규원,「분식집에서」
그럴 것이다. 바닥이 보았을 때 낮은 창문도 희망으로 보일 것이다. 바닥이 창문이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몸이 무거운 나무에게는 떨어지는/잎 하나도 기쁨’이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시집『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를 펴내는 시점에 와서 확연하게 느끼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층계 위에 오래 앉아 있은 나’는 ‘내려가는 것이 희망’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오규원은 다른 작품에서 ‘나는 내가 무거워/시가 무거워 배운/작시법을 버리고’라고 노래한다. 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왜 무거워지는 것일까? 중심을 잡게 되면 무거워진다. ‘온몸의 무게로 앉으니까’ 그렇다. 김현7)은 구체성을 잃고 개념화해버린 시원의 감정들을 시인은 무겁다고 느낀다고 본다. 그러기에 그 무거운 감정들을 싣고 있는 시도 물론 무거울 수밖에 없다. 무거울 때는 조그만 것이라도 떨어져나가면 홀가분해진다. 한 세계의 무게는 때로 감당하기 힘든 것이기에.
4연과 5연의 특이한 정황 즉 어제 낙태수술 후 라면 먹고 앉아 있는 아이와 처음 본 여자와 잠을 자고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 그리고 이 아이들의 공복으로 ‘배가 접혀오는 나’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본다. 뒤이어 등장하는 라일락은 이 시에서 특별한 의미로 놓인다. 라일락의 꿈은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 시든 꽃을 흔들어버릴 4월의 바람이라고 말한다. ‘바람도 아니 부는 4월의 봄은/꽃피는 절망’이라는 결구의 의외성은 의미심장하다.「분식집에서」는 분식집의 정경과 그 주변의 풍경에서 꽃피는 것이 기쁨이거나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길임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소시민이 즐겨 드나드는 분식집에서 삶의 어두운 단면을 포착하여 희망과 절망의 얼굴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몸부림치면서
달려가던 누나가
언제나 비만 내리던
가을 저녁이
여기 있다
수척한 정신이
고여서 빛나는
날개도
상처도
사랑도
여기 있다
하아얀 피가 있다
하얗게 마르는 피가 있다
불꺼진 밤들을 기억하는
육체가 있다
숨어서 불타던 육체가
참담히 머물던 다리가
자라서 서로 죽이던 인간들이
여기 있다
도무지 잠들 수 없던
육체의 기름이
불타서 소금이 된다
다가오는 소금은
초록이 아니라 흰빛
아직 덜 속은 육체가
비로소 완전히 속은 육체가
부르르 떨면서 질주하는 육체가
울 수도 없는 여기는
어느 나라의 入口
얼음 속의 아우성만
한없이 머무는 곳
-이승훈,「염전」
자동기술법으로 시를 쓴다. 하여 의미가 모호하다. 의도적이다. 비대상시라고 스스로 명명하고 작업을 한다. 천성적이다. 그렇다고 뜻으로 풀지 못할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자동기술법이요, 비대상시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언어로 표출된다.「염전」이라는 제목에서도 뜻을 읽는다. 염전은 ‘몸부림치면서 달려가던 누나’가 있는 곳이다. 그밖에도 많은 것들이 거기에 있다.
비만 내리던 가을 저녁
수척한 정신
날개
상처
사랑
하얀 피
불타던 육체
서로 죽이던 인간들
육체의 기름이 불타서 소금이 된 곳이다. 부르르 떨면서 질주하는 육체가 울 수도 없는 여기는 어느 나라의 입구이자 얼음 속의 아우성만 한없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끝 구절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지럽게 혼합된 이미지가 단순하게 마무리되면서 염전이 주는 흰빛의 잔상이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염전」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희망하는 성서의 한 구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생선을 변질되게 하지 않는 ‘소금’이기에 끝 연에서 동등한 역할을 하는 ‘얼음’이 놓인 것으로 보인다.
무의미시나 비대상시도 의미와의 상관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이승훈,「사물A」
이것은 시인 자신의 젊은 시절의 내면 풍경8)이라고 말한다. 김영태가 아름다운 환상을 지향하는 반면에 그는 어두운 환상을 지향한다고 한다. 이런 세계는 잠재의식 자체이므로 언어가 일상어의 관습과 문법을 벗어난 것이다. 장면의 연결이 비논리적이고 환상적이어서 난해시의 전형적 표본이 되지만 이런 세계가 강조하는 것은 포착하기 힘든 어둡고 캄캄한 내면세계이고 편집광적인 이미지 결합 방법9)이라고 말한다. 앞서 살핀「염전」과 연계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달아나는 사나이의 팔, 한 마리 흰 닭의 잃어버린 목 좇기,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생각의 따스한 닭들 키우기, 정신의 땅 파기, 피를 흘리는 소리,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과 같은 기괴한 구절이 주는 이미지가 서로 얽히고설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이것을 두고 그가 의도적인 ‘어두운 환상 지향’이라고 말했지만, 이 시를 쓸 당시의 그의 내면 정황을 적나라하게 육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바람 불면 무조건
배고팠지
무조건이란 말 속의 수평선 좀 봐
배고프면 무조건
길 떠났지
수평선이란 말 속의 갯바위 좀 봐, 뻘밭 좀 봐
떠난 길은 무조건
주막집이 그리웠지
염소 뜯어먹는 갯바위 좀 봐
코뿔소 빨아먹는 뻘밭 봐
저놈 봐
-강현국,「가을 식욕」
‘바람 불면 무조건/배고팠’다는 진술에서 ‘가을에 혼자 떠나는 먼 길’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무조건’이라는 말에서 떠남에 대한 체질화된 모습을 읽는다. 배고프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탐구에의 강열한 욕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이라는 말 속에서 ‘수평선’을 보게 된 것이다. 망망대해의 수평선은 길 떠남의 한 영역으로서 자력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배고프면 무조건 길 떠남은 시의 화자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4연에서 수평선이란 말 속에서 갯바위와 뻘밭을 본다. 혼자 보고 말 생각이 없으므로 ‘좀 봐’를 세 번, ‘봐’를 두 번 씩이나 쓰고 있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머지 타자에게 동의를 구하면서 함께 보기를 연해 권한다.
무조건이라는 말 속에서 수평선을 떠올리는 일은 앞서 살폈듯이 화자의 체질상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수평선이라는 말 속의 갯바위와 뻘밭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떠난 길에서 주막집이 그리운 것도 또한 그러하다. ‘무조건의 여정’에서 술이 함께 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맨 정신으로 바라볼 때의 세계와 취하여 바라보는 세계는 다르다. 그렇다면 탐색의 경중이나 그 정도도 다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6연의 이미지가 아연 놀라움을 주고 있는 데서 시인의 창작 태도 즉 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염소 뜯어먹는 갯바위, 코뿔소 빨아먹는 뻘밭’이라는 장면 설정이 그것이다. 자연물인 갯바위와 뻘밭이 동물―바다에 사는 짐승들도 아니다.―인 염소를 뜯어먹고, 코뿔소를 빨아먹는다. 왜 이 대목에 와서 이러한 낯선 충돌의 이미지를 서로 접맥시키고 있는가. 여기서 얻고자 하는 시인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길을 잘못 들어 산에서 내려온 염소가 갯바위에까지 다다라 혹 갯바위에 붙어있는 해초를 뜯어먹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순간 갯바위의 왕성한 식욕에 의해 염소가 희생될 수 있다. 시인은 그 순간 그러한 정황을 상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뻘밭은 코뿔소를 빨아먹는다. ‘빨아먹는’으로 표현한 것은 ‘뻘밭’의 속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갯바위가 거친 느낌을 주면서 ‘뜯어먹는’이라는 말이 적절하게 놓였듯이 ‘빨아먹는’은 한 마리의 코뿔소를 흡수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다.
이 일들은 모두 천고마비의 계절, 식욕이 가장 왕성한 가을이기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종내는 염소를 잡아먹는 ‘갯바위’, 코뿔소를 삼켜버리는 ‘뻘밭’에 시인의 감정이 온전히 투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놈 봐
그런 까닭에 7연을 한 줄로 처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거듭 말하지만「가을 식욕」은 길 떠남을 통해 세계에 대한 부단한 탐색과 거기에 따른 열정을 숨김없이 육화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시편에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강열한 도전의식의 일단을 드러낸다.
아래 작품도 거침없는 연상 작용의 산물이다.
한 허공이 한 허공을 데리고 꽃 피는 동안
한 하늘 기러기 맨발자국이
지붕까지 내려와서 기럭, 기럭, 하는 동안
한 허공이 한 허공을 데리고 꽃 지는 동안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베란다 흔들의자가
해 뜨는 동쪽으로 기우뚱하는 동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를 어떻게 잡아먹지? 기러기란 기호 뒤의 죽은 누이를 어떻게 삶아먹지? 기러기란 기표의 외로운 산 능선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기러기를 구워서 꼭꼭 씹어먹지?
-강현국,「세한도 ․ 3」
1연과 3연, 2연과 4연이 의미론상 서로 대칭을 이룬다. 1연에서 ‘한 허공이 한 허공을 데리고 꽃’ 핀다는 것은 두 허공이 서로 일체화 즉 동일성에 이른 것을 말한다. ‘데리고’는 동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때 꽃은 핀다. 생성의 순간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단서를 본다. ‘동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3연은 꽃 짐 즉 소멸이다. 역시 한 허공이 한 허공을 데리고 꽃은 진다. 여기서 생성과 소멸이라는 의미론상의 대칭10)을 보게 된다.
2연은 기러기 맨발자국이 지붕까지 내려와 ‘기럭, 기럭’이라고 운다. 하강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4연은 베란다 흔들의자―물론 그곳에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가 동쪽으로 기우뚱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기러기 맨발자국’과 ‘베란다 흔들의자’와의 대비 혹은 상관관계에서 묘한 울림을 느끼게 된다. 다른 서체로 쓴 끝 연인 5연은 베란다 흔들의자의 주체가 혼자 내뱉는 독백 형식을 차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은연중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사람이 기러기를 잡아먹는 일이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러기란 기호 뒤에는 죽은 누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러기를 잡아먹는 행위는 곧 죽은 누이를 삶아먹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기러기란 기표의 외로운 산능선’을 먹는 일이기도 하다. ‘기러기를 구워서 꼭꼭 씹어 먹’는 일은 사람에게는 습관화된 다반사일 수 있겠지만, 네 번의 ‘동안’이 되풀이 되는 사이 시의 화자는 5연에서 살핀 것처럼 세한의 때에 삶을 깊이 있게 사색한다. 인간다운 길이 무엇인지 부단히 되묻고 있는 것이다.
허공으로부터 범람하는 폭포로부터 솟구치는 연어 떼로부터 태평양으로부터 힘 센 절벽으로부터 푸른 식욕 붉은 성욕으로부터 아아 어느 날 멀어진 아버지로부터 살로부터 피로부터 바람의 경전으로부터 하루가 이렇게 저무는구나 늪으로부터 생선가시로부터 비린 세월의 밥상으로부터 휘영청 달밤으로부터 불면으로부터 모기 떼로부터 홍콩감기로부터 아아 뭉개어진 내 꿈의 이, 목, 구, 비로부터 마침내 속상한 고목나무 밑둥으로부터 퍼질러 앉은 권태로부터 권태의 새끼로부터 병정개미 떼로부터 범람하는 갈가마귀 폭포로부터
-강현국,「세월의 밥상」
「세월의 밥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이다. 완전한 한 문장을 가지지 못하고, ‘로부터, 으로부터’가 체언 뒤에 붙어 미완으로 끝나고 있다. 거듭하는 되풀이를 통해 의미의 증폭을 의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래에서 보듯 23가지의 이미지들이 숨 가쁘게 열거되고 있다.
허공→폭포→연어→태평양→절벽→식욕, 성욕→아버지→살→피→바람의 경전→늪→생선가시→세월의 밥상→달밤→불면→모기 떼→홍콩감기→이, 목, 구, 비→고목나무 밑둥→권태→권태의 새끼→병정개미 떼→갈가마귀 폭포
이들의 상관관계가 모호한 면이 있지만, 연쇄적으로 부딪쳐서 세월의 밥상 즉 세월이 차려주는 밥상을 이룬다. 이들을 아래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물 : 허공, 폭포, 태평양, 절벽, 바람의 경전, 늪, 달밤
생명체 : 연어, 아버지, 살, 피, 생선가시, 모기 떼, 이, 목, 구, 비, 고목나무 밑둥, 병정개미 떼, 갈가마귀 폭포
기타 : 식욕, 성욕, 세월의 밥상, 불면, 홍콩감기, 권태, 권태의 새끼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여 빚는 세계는 곧 삶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생활 속에서 비근하게 마주칠 수 있는 이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다잡기도 한다. 아울러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시편의 중간 부분에 단 한번 나오는 ‘세월의 밥상’은 뼈대구실을 하고 있다. 세월이 차려주는 밥상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순기능을 하든지 역기능을 가져오든지 이들은 모두 ‘나’의 인생을 견인해온 중요한 요소들이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썩어 있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권리가 있고 2분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소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고 하루 열두 번이나
열 세 번 설사를 할 권리가 있소 참되고
바른 소리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무설탕 껌에 중독될 권리가
있소 안 주는 상을
안 받을 권리가
있고 굴러들어 온 급살을
시간 맞춰 맞을 권리가 있소 끝까지
찌꺼기로 남아 냄새를 풍길 권리가 있고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소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부
모를 똑바로 보지 않을 권리가
있소 믿는 도끼에 발등을 내어 줄 권리가 있고 무엇보다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소 대공원의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
똥을 눌 권리가
있는 것처럼
-김언희,「마그나 카르타」
김언희의 법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향한 시인의 설법이다. 기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배반한다. 부정한다. 상식을 뛰어넘는다. 왜 일반적인 올가미 혹은 도덕이나 법을 정해놓고 모든 것을 그 안에서 잣대를 들이대고 가두려하는가에 대해 강력한 시위를 보는 듯 하다. 새로운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법을 온전히 따르는 자는 이제 시인의 문하에 들게 된다. 시인의 자유분방한 세계 속의 한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무려 열일곱 번이나 나온 ‘권리’가 권리를 행사한다. 그리고 이 말이 되풀이 나오면서 묘한 리듬으로 곳곳에서 율을 퉁긴다. 현을 뜯는 느낌을 준다.
‘아침부터 썩어 있을/권리가 있’는 사람은 끔찍하게도 ‘굴러들어 온 급살을/시간 맞춰 맞을 권리’가 있고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으며, 결국에는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똥을 눌 권리가/있는 것’까지 인정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권리장전’이다. 의미에 따라 행갈이를 하지 않는 것도 의도적이다. 뒤틀기 위해서 시인은 그 어떤 방법도 다 동원한 전례가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시에 비해 정상적(?)이다.
김언희의 최근의 시를 두고 ‘환멸 혹은 구토, 지독한 동어 반복의 지옥’이라고 함돈균11)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인은 치밀한 음모―김언희식 발언이다. 달리 말하면 ‘계획’이다.―아래 1989년 등단 무렵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대단한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트렁크』로 그로테스크와 성적인 기괴함의 극치를 보인 이후 그의 시는 한결같이 그러한 세계에 심도를 더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함돈균은 또한 ‘환멸의 세계에 대한 고독한 권리 선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 대한 반기라기보다 옳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단한 저항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객기어린 것이 아니라 ‘무한히 창궐하고 영원히 회귀하는 악의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의 보들레르적 자기 선언12)’인 것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틀었다
나는 누웠다
그녀는 나를 위해 온기를 마련하고
잘 익은 포도주 한 병
나는 힘차게 코르크 마개를 열었고
그녀는 몸을 열었고
반쯤 붉은 술을 채웠다
그녀는 내 위에서 웃고
나는 누워서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낮은 음으로
그녀의 눈을 보았다
부드러운 입술
자꾸 부풀어 오르는 젖가슴
생리가 시작되기 이틀 전의 밤
그녀는 나에게서 달아나
라디오를 틀었다
나는 누웠다
그녀는 조금씩 달아올라
내 위에서 웃었고
잘 익은 포도주 한 병
나는 힘차게 마개를 열고
그녀의 몸에
반쯤 술을 채웠다
-박상순,「낮은 음으로 삼세번」중에서
사랑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낮은 음은 부드럽다. 삼세번은 확실한 일을 뜻한다. 한 병의 포도주 코르크 마개는 젖히어졌다. 생리가 시작되기 이틀 전은 자못 불안한 시간이다. 라디오를 틀었다는 표현이 두 번 거듭되고 있다. 초조함을 이기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무릇 서로를 위해 온기를 마련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그것은 끊임없는 열정과 관심인 것을 은연중 암시한다.
조금씩 달아오른 그녀의 몸에 낮은 음으로 반쯤 붉은 술을 채우는 일이 반복된다. 그녀가 어둠으로 돌아가 돌아오지 않아도 그 일은 이어진다. 생략된 끝 연에서 ‘삼세번’이 세 번 되풀이 되고 있다. 완벽을 지향한다. 은밀한 일을 어렵지 않게 묘사하면서 화자는 조금도 들뜨지 않고 있다. 그의 시편들은 독특한 언술로 어떤 한 경계를 넘어선 세계를 지속적으로 노래바 있는데, 이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매 웨스트 입술 소파에 앉아
觀, 淫한다
찢고
까발리고
물어뜯고
할퀴고
네 발로 기고
머리끄뎅이 질질 끌고
수갑 채워 침대에 묶고
등짝에 채찍이 기어가고
배꼽에 담뱃불 지지고
으으으 제발 그만
새디와 혼돈과 마조를
접붙였다 으깨어
마시고
21세기의 밤은 깊어간다
그렇게 흘러왔다
그, 렇, 게,
-박진형,「입술 소파」-퍼포먼스 시편․15
퍼포먼스는 온몸으로 보여주는 행위 예술이다. 여러 가지 소도구들을 활용한다. 그 과정 자체 즉 연쇄적인 몸짓에서 관객들은 인생을 느낀다. 삶의 길에 대한 자각을 한다. 이 시는 21세기의 밤을 이야기한다. 전위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통해서이다. 그의 작품 ‘입술 소파’에 앉아 한 수행인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淫’을 ‘觀’하는 일이다. 이 근원적인 욕구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2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일탈 행위이다. ‘찢고/까발리고/물어뜯고/할퀴고……배꼽에 담뱃불 지지고’와 같은 짓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새디와 혼돈과 마조를/접붙였다 으깨어/마시’는 극단의 연출은 현대인들의 광기와 폭력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일이다. 오죽하면 ‘으으으 제발 그만’일까. 견디기 힘든 이 미치광이 짓은 퍼포먼스를 하는 이나 보는 이들에게는 그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 되는 측면도 있다.
「입술 소파」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추악의 지경이 어디까지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나 이렌트13)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참관한 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해낸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학살의 원흉이라 해서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아이히만의 악행은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 결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사는 일상적 삶이 악의 근원’이라는 그의 견해를「입술 소파」가 펼치는 퍼포먼스 행위와 연계지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극단의 연출 과정에서 사고하는 삶 즉 사고력 신장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편은 ‘생각하는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 듯 하다.
땅 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어둠 속에서
딸꾹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여섯살의악마가다가와열두살의나를지목할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불안에 떠는 광대처럼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 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황병승,「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은 ‘21세기 한국 시단의 한 극단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또는 아니다’라는 말이 논객들 사이에 퍼져 있다. ‘미래파’라고도 말한다. 그에 대한 해석을 미래의 어느 날로 유예시킨 평론가14)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 전 이미 이상이한 전범으로 보여준 것이다. 황병승의 시를 두고 한글로 쓰였으되 해석 불가라고 한다. 기존의 모든 문법 너머에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번역(?)을 시도한 노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적 자아의 혼란
둘째, 개인의 언어
셋째, 형식 파괴15)
시적 자아가 복수이다. 1인칭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빈번하다. 비유 자체도 짐작을 어렵게 한다. 소통을 염두에 둔 시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장시도 보인다. 시가 길어지는 것에 대해 ‘시도 되고 소설도 되는, 시도 안 되고 소설도 안 되는 시와 소설의 모호한 경계에서의 밀고 당기는 재미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시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 중의 하나이다.’라고 답한다. 일종의 유희라는 것이다. 이것은 장난삼아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사산(死産)된 두 마음」에는 해석 불가라는 문제가 목전에서 어른거리지만 삶의 고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른여섯살의악마가다가와열두살의나를지목할때까지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이러한 대목에서 무언가 연상되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장면 설정은 전혀 근거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난해의 정도가 심하고 몹시 그로테스크하지만 굳이 해석한다면 제목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혼돈된 자아의 내면 혹은 극심한 갈등과 불안과 광기의 세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표출한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현대시의 초창기 모더니즘 시들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까지 일별하여 보았다. 부단한 실험의식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소통 불가, 해석 불가에까지 치닫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문학이지만, 삶의 의미를 고양하거나 심화시키는 일에 등한시 한다면 일반적인 삶과 점점 그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종국에 가서는 시의 죽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황병승의 시를 읽으면서 서정성 회복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1) 김용직,『한국현대시요람』, (박영사, 1982), 275-276쪽.
2) 이승훈,『한국모더니즘 시사』, (문예출판사, 2000), 16쪽.
3) 이승훈, 위의 책, 22쪽.
4) 이승훈, 앞의 책, 23쪽.
5)
연 | 강조점 | 결과 |
1 | 봄의 향기→고양이 털 | 털/꽃가루/향기의 경계 해체, 동물/식물/공기의 세계의 통일 |
2 | 봄의 불길→고양이 눈 | 고양이의 눈/금방울/불길의 경계 해체, 동물/광물/공기의 세계의 융합 |
3 | 봄 졸음→고양이 입술 | 고양이의 입술/포근한 봄 졸음의 경계 해체, 활동/졸음, 혹은 삶/죽음의 동일성 획득 |
4 | 봄의 생기→고양이 수염 | 고양이의 수염/ 푸른 봄의 향기의 경계 해체, 동물/공기의 세계의 융합 |
이로 볼 때「봄은 고양이로다」는 주도면밀한 관찰 끝에 생산된 시편임을 알 수 있다.
6) 이승훈, 앞의 책, 112쪽.
7) 김현,「무거움과 가벼움」, 오규원 시집,『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120쪽.
8) 이승훈, 앞의 책, 243쪽.
9) 김준오,「순수, 참여와 다극화 시대」,『현대시사상』, 319쪽 재인용.
10) 김소월의「산유화」가 미시적으로 1연의 생성과 4연의 소멸이 의미론상 대칭을 이루는 것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11) 함돈균,「환멸 혹은 구토」,《열린시학》2006년 여름호, 212쪽.
12) 함돈균, 위의 책, 223쪽.
13) 전체주의를 비판한 독일 출신 여성 정치철학자(1906-1975)
14) 권혁웅이다.
15) 중앙일보(2006년 8월 26일자, 23면) 문화부 손민호 기자가 신문에서 대담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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