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야!"
후훗. 민영이다.
언제나 첫인사가 '야!'인 아이는 민영이 뿐이다.
항상 먼저 말걸어주고, 웃어주는 아이. 아침마다 민영인 한번씩은 내자리에 들러준다.
내가 1분단 창가에 앉고, 민영이 자리가 4분단 뒷줄임을 감안할때, 민영인 참 먼걸음을 하는거다.
(그래...멀기도 하다....--;)
"또 그렇게 엎드려 있어?"
"응..."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냐?"
"생각은.. 그냥 수면보충중이었는데...^ ^"
(내가 명상에 잠겨있었을거란 근거없는 추측은 어떻게 한거지?)
"자, 이거."
?
분홍빛 고운 한지에 싸인 작은 상자.
정성들여 포장한 테가 확 나는.....
"뭐야 이게?"
"어제 친구 생일선물 보러 갔다가, 너 생각나서 그냥 사봤어.
난 니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니까, 그냥 지금 주는거야."
"머야..그게....싱겁기는....내생일 아직 멀었어~~"
"그냥 받어. 미리 투자 해두는 거야. 내생일 얼마 안남은거 알지?
내생일 5월 15일이야. 까먹으면 내생일날이 니 제삿날 되는거야..흐흐흐..."
(--;; 이걸 받아야돼..말아야돼....)
"그..그래... ^ ^;;"
후훗...재밌는 아이....
"얘들아~ 오늘 우리반에 뉴담탱이 뜬단다~"
반장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아이들이 술렁인다.
솔직히 고3은 감정을 상실한 괴물에 가까워서 쉽게 설레이지도, 남의 일에 큰 관심을 갖는 일도 드물지만, 우리반은 예외다. 몇몇 아이들은 지금 이순간도 눈이 핑핑 돌것같은 영어사전에 코를 박고 눈물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새로올 담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분주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새 고3이다.
입시외엔 더이상 큰 이슈가 있을수 없는 고3.
떨어진단 말을 감히 누구도 쓸수 없는, 그래서 책상에서 연필이 떨어져도 "연필이 바닥에 붙었어"라고 해야하는.
어떤 할일없는 인간들이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합격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가을이면 한무더기의 아이들이 나무주위에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연출하는....
비웃을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냥 고3이란 타이틀 만으로도, 어쩔수없이 수긍해야 하는 모든 부담스런 것들....
드르륵.
앞문이 열리는 소리.
새로온 담임의 등장을 알리는 소린가?
아..귀찮아...고개를 들어야 하잖아.....
무거운 머리를 들어,
또각또각. 교실안을 울리는 당당한 구두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비취색 바지 정장.....
에이??? 비취색 바지 정장???????
엇!
버스안의 정의의 아줌마!!!!
<선진>
"반가워요~ 나 '이현희'라고 해요. 국어가르쳐요.
어때요? 첫출근인데?"
"예..마냥 떨리죠, 뭐.
잘 할수 있을지도 걱정이지만, 아이들 첫대면이 참 두려워요....^ ^;"
"젊은사람이라 그런지 당당함이 보이는데, 뭘.
잘 할거에요. ^ ^ "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따뜻하고 호의적인 미소...
세월에 찌든 흔적이 아닌 많이 웃어 얻은 훈장같은, 눈가에 얕게 패인 잔주름...
좋은사람이란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분이다.
"앞으로 아마 많이 귀찮게 굴거에요, 저~ ^ ^ "
"그래요, 그럼. 오늘은 맘 편하게 하구, 여기 생활기록부. 한번씩 봐요~"
......
또깍 또깍.
내 발자국 소리에 내가슴이 떨려......
드르륵.
문이 열림과 동시에 100여개의 눈들이 날 향해 달려든다.
쫄면안돼....선진아. 쫄지말자.
한명한명 눈을 맞춰가며 교탁앞에 다다렀을때,
어? 저얼굴은....
아~ 맞다! 뺑소니 소녀!! 우리반이었구나?!
그다지 좋은 만남은 아니었지만, 왤까?
적군도 낯선곳에선 반갑게 느껴진다는데, 아는얼굴 한명이 이렇게 친근하게 힘이된다니...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하고 1년간 같이 생활할 문선진이라고 합니다."
키득키득.
머야...내말투가 너무 교과서 스타일인가...?
에라이 모르겠다.
"흠흠. 역시 이거 너무 닭살이지?
반가워. 문선진이다.
편하게, 언니 동생처럼 친하게 지낼수 있었음 좋겠어.
그렇다고 너무 친근하게 오바하면 국물도 없다. 물론! 건더기는 더더욱 없어. --;;"
"어우~~~~뭐에여~~! "
"왜. 썰렁해? 빨리 익숙해지는게 너희한테 편할거야. ..."
역시....나의 유머도 이제....ㅠ.ㅠ
"흔히들 고3은 인간이 아니라고들 하던데?
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인생을 가르치고 싶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줬으면 해.
너희가 내 첫 제자들인 이상,. 첫사랑이나 다름없다.
내 처녀수업을 듣게 되는 사람들이기도 해.
평생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될거다, 너희들이.
잘해보자. ^ ^ "
"후~후!!"
아이들의 환호성.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박수소릴 받아본적이 있었던가.
순수한 저 소리에 왜이리 가슴이 저며오지....
"그럼 오늘 좋은 하루 보내고, 이따 영어시간에 보도록 하자."
"차렷!"
"아, 그리구!
오늘부터 우리반 급훈은 "뻔뻔한 사람이 되지 말자"야.
예를들면,
길에서 자기 잘못으로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쌩~하니 달아나는 따위의 행동을 삼가하자는거지.
알겠지?
3학년 7반 37번!?!"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는 벙찐표정의 아이들. 37번이 누구였더라..??
쿡쿡.
뺑소니 소녀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는군...
"그런 의미로 자넨, 교무실로 좀 와줘야겠어~ 알았지?"
하하하하하.
어쩌지? 순순히 지갑을 돌려주기엔 아까의 충격이 멍이되어 남았단 말이지...
아...어떻게 골려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나....?
가만.
나 이러고도 선생님 맞아?
후후.
첫발을 말캉말캉한 젤리안으로 뗀 기분.
뭔가 상큼하고도 재밌는 예감에 마음이 설렌다.
재밌는 일이 생길것같은 기분.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