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아시는 주님을 만나다
♣ 우리 마음을 아시는 주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급하게 진행했는데 시기상조였던 경우가 있고, 거의 완벽하게 갖춘 것 같은데 하는 일마다 지독히도 안 풀리는 경우도 있고, 물건너간 일이다 싶었는데 상황이 완전 바뀌어서 성공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봐도, 항상 "저 사람은 다 틀렸어. 희망이 없어. 다 끝났어"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 주님 앞에 깨지고 회개하면서 변화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세리장 삭개오 형님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막장 인생을 살았던 형님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변화 가능성 제로'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한 지 오래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세리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원수에게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천하의 못된 놈'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세리로 성공했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민족이고 핏줄이고 염치고 양심이고 전부 내던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거의 회복 불능인 막장 인생인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형님은 우연히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형님에게 긴 말을 늘어놓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딱 두 문장으로 끝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19:5)
예수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며 뽕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 눈에는 삭개오 형님의 엉덩이 두 쪽만이 보였을 겁니다. 얼굴보다는 엉덩이를 먼저 보셨습니다. 삭개오 형님에 대해 예수님께 알려 준 이는 없었고 그 역시 주님이 찾으실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엉덩이 두 쪽만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의 이름을 아셨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셨습니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어떤 갈망이 있는지도 단번에 파악하셨습니다.
이 점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얼굴과 몸 전체를 주님께 보여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 형님보다 우리가 더 유리합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조건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사모하면서 언제든 훌렁 뒤집어질 줄로 믿읍시다. 할렐루야!
어쨌든 주님은 그저 "삭개오야, 어서 내려 와라. 내가 오늘밤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희한하게도, 싹수가 노랗다 못해 말라 버린 삭개오가 그 말에 훌렁 뒤집어져서 놀라운 변화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어라 모으던 돈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가치를 돈과 맞바꿨던 그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19:8)
삭개오가 이렇게 말하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9)
주님도 삭개오가 정말로 변했다는 걸 확증해 주십니다.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진짜 회개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삭개오 형님은 이 말을 직접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헌금이나 선교헌금, 기부금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성도가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왜 자꾸 교회에서 돈 이야기를 해서 '은혜 떨어지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영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모자란데, 거북하게 왜 자꾸 돈 내놓으라는 얘기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돈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어쨌든, 고래 심줄처럼 질기고 모질게 살던 삭개오 형님은 단 두 문장밖에 안 되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 그 어떤 지식보다 높으신 주님
요한복음 1장에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리를 놓아 준 사람은 친구 빌립이었습니다. "이봐, 나다나엘. 나 메시아를 만났어!"
빌립은 금방 가슴이 뜨거워져서 설치는 사람이고, 반면에 나다나엘은 평소 생각이 많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너는 정말 범사에 설치는구나. 대체 또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메시아 타령?"
나다나엘은 일단 빌립을 진정시키고는 호수 조사부터 시작합니다.
"어디 출신 사람이야?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 어느 파인데? 훈련은 어디서 받았어?"
"응? 저기, 나사렛 출신이라던데 ... "
나다나엘은 너무 황당해서 빌립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뭐? 나사렛? 아니, 잘못 안 거 아냐? 나사렛 같은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어?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니 빌립도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님도 너무하신 분입니다. 정말 주님의 '스펙'만 갖고는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뭐 하나라도 그럴 듯해야 내세울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에도 일류학교는 존재했습니다. 그런 학교를 나오거나, 아니면 당대의 유명한 스승 밑에라도 있거나 박사학위를 따시면 전도하기 유리했을 겁니다. 또는 해외 유학을 하거나 하다못해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기라도 하셨어야 훨씬 더 당당하게 전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상황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다들 무시하는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걸까요. 왜 하필이면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록"(사53:2) 하고 오셨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보다는 제가 더 잘생기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저는 고운 모양까지는 아니어도 풍채는 좋으니까요.
이렇게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주님은 뭐 하나 변변히 내세울 게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주님을 소개하기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의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 흥행할 만한 뭔가를 쥐어 주고 나서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셔야지. 그런 것 전혀 없이 무조건 가라고만 하시니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밖에요.
어쨌든 나다나엘에게 오히려 면박만 당한 빌립이, 말로는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야! 그럼 일단 와서 한번 봐! 일단 보고 이야기하자니까?"라고 말하며 나다나엘을 억지로 끌고 갑니다. 여담이지만, 빌립 형님에게서 그 유명한 '와보라' 전도법이 유래된 것 아닙니까?
결국 나다나엘은 억지로 예수님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 이 녀석 진짜 귀찮게 하네'라고 투덜대며 슬리퍼를 찍찍 끌고 온 겁니다. '대체 그가 누구야? 뭐가 그리 대단해서 이렇게 난리야?'라고만 생각하는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서로 명함도 주고받기 전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
이에 나다나엘이 깜짝 놀랍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참 이스라엘'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바로 꼬리를 내린 나다나엘은 "저에 대해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1:48)
이 말은 곧 나사렛 출신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주님을 비하한 것까지 죄다 들으셨다는 게 아닙니까? 결국 나다나엘은 주님 앞에 고꾸라집니다. 이 콧대 높은 형님 역시, 주님의 몇 마디 말로 한방에 나가떨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변화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외모가 잘 생기거나 두뇌가 명석하거나 몸매가 근육질이어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한 번만 들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탁월한 머리로 만들어 낸 설교나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뛰어난 화술 때문도 아닙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을 말을 듣고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낳아 준 부모도 못 바꾸는 나를 그 누가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안 되는 일입니다.
깨지고 변화되는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은혜를 주셔야만 나타납니다. 이는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십니다.
♣ 목마른 이들에게 찾아가시는 주님
이처럼 주님을 만나면 약간의 대화로도 웬만하면 다들 단번에 무릎을 꿇습니다. 심지어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 누님 역시 주님의 말씀에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오랫동안 대화하면서도 잘 넘어가지 않고, 팽팽히 맞섰던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수가 성 근처를 지나시던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물가의 여인.
이 누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제정신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 누님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길게 끌 것도 없이 다들 금세 뒤집어졌는데, 이 누님만은 달랐습니다. 이 누님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가 요한복음 4장 전체를 다 채우는 것을 보십시오.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날도 주님은 제자들과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일부러 피해 다니는 사마리아 수가 성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술에 취해 헷갈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유대인들은 절대 그쪽으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차마 대놓고 물어보진 못해도 속으로 계속 의아해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 주님도 참 희한한 분 같습니다.
수가 성 근처에 도착하자, 밥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제자 형님들은 특히 배고픈 걸 가장 힘들어하는 분들입니다. 배 타고 고기 잡으며 살던 육체파 터프가이들이 대부분이라, 그걸 가장 못 참습니다. 항상 '밥은 언제 먹지? 무얼 먹지?'를 고민하던 분들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식사를 향한 제자 형님들의 세심한 배려 덕에 일어난 게 아닙니까? 그분들은 정말 제때 밥을 못 먹으면 이성을 잃고 불안해하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 주님만을 남겨 놓고서, 전부 밥을 구하러 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홀로 우물가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은 물뜨러 오는 여인을 만나시게 됩니다. 이 여인은 바로 사마리아 수가 성 누님입니다. 성경에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정말 예사 사람이 아닙니다.
마태 형님 역시 주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고 부르시니, 아직 일이 끝나려면 한참 멀었음에도 짐도 하나 안 꾸리고서 그날 바로 퇴사하지 않았습니까? 쇠가 자석에 끌리듯 예수님에게로 딸려 간 겁니다. 주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설마 우리처럼 시시하게 전도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 하더라도, 아무려면 늘 헷갈려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우리 같겠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물건을 팔라고 하면 그렇게까지 주눅 들어 하지 않을 텐데. 왜 꼭 전도하라고 하면 도둑놈이 훔쳐 온 장물 넘기듯 묘한 분위기를 취하는 걸까요?
다들 쭈뼛쭈뼛 말도 잘 못 꺼냅니다. 그러다 큰 맘 먹고 "저, 혹시 교회 다녀 보신 적 있으세요?"라고 물었는데 상대방이 눈을 치뜨면서 "뭐? 교회?" 하면서 마구 퍼부어 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그 사람은 교회 장로라는 놈이 뭘 떼어먹고 도망갔다는 둥 교회는 전부 기업 같다는 둥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선하고 많이 베푼다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우리보다 교회에 대해 더 잘 아는 듯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그 사람에게 거꾸로 전도당해 그냥 돌아오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솔직히 인정합시다. 정말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는 뭐라고 푸념합니까? "전도는 너무 어려워요. 요즘 같은 때에 이런 식의 전도는 안 먹혀요."
제대로 전도해 보고 나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제대로 말도 못꺼내고 그저 망신만 당하고 돌아올 뿐이 아닙니까? 늘 그런 식이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급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 두 번 정도의 대화만으로도 다 뒤집어졌으니까요.
그런데 수가 성 누님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누님은 정말 희한한 분입니다. 아무리 사람들 얼굴이 보기 싫다고 해도, 중동 지방의 그 뜨거운 햇볕도 마다 않고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겁니다. 이 누님은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경험하며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개발한 은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거미 손'의 은사입니다. 이게 뭐냐면 괜찮게 생긴 사내를 향해 "저거 내 거" 하고 손을 뻗으면, 벌레가 거미줄에 달라붙듯 그놈이 꼼짝 못하고 딸려 와서 착 달라붙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이분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이 되시겠죠? 결혼을 다섯 번 했는데 모두 실패했습니다. 요즘도 이혼을 좋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그 옛날은 오죽했겠습니까. 아무리 마음씨 착한 랍비라도 두 번 이상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던 시대에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했다면,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결혼과 이혼을 많이 겪으면서, 누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게 되었을까요? "나 건드리지 마라. 응?" , "내 인생 내가 사는 거니까 참견하지 마."
매사가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요? 완전히 비뚤어지고, 완전히 막나가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남들처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혼을 다섯 번째 겪고 나서는, 어떤 남자든 외모만 마음에 들면 그냥 붙잡아서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수틀리면 바로 차 버리고, 또 다른 남자를 다시 붙들고 ... 이런 삶을 반복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역시 유부남을 거미손으로 붙잡아서 같이 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것이고, 주님께 딱 걸렸던 겁니다.
♣ 늘 우리를 기다리며 인도하시는 주님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이 물 길으러 온 여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7)
전도할 때 가장 난처하고 황당한 경우가, 말을 걸었는데 '소 닭 보듯' 할 때입니다. 좋든 싫든 의사를 표현해야 그냥 돌아서거나 진도를 나가거나 할 텐데, 멀뚱멀뚱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수가 성 누님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 역시 딱 이랬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눈인사를 하든 긴장해서 경계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의식해야 정상일 겁니다. 그런데 이 누님은 바로 옆에 있는 예수님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저 물만 긷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분위기가 워낙 좋지 않자, 예수님은 물 한 잔을 청하며 말을 거셨습니다. 정말 관심이 없고 불편했으면 물이나 한 잔 주고 말면 될 텐데, 이 누님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예수님을 죽 훑어보며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요4:9)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이 대낮에 왜 집적거리고 난리야?"
정말 흉악한 여인네 아닙니까? 아무리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더라도, 예수님이 다른 남자들과 똑같으시겠습니까? 아무튼 여인의 이러한 태도에 예수님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아무리 영적으로 둔하더라도 이렇게 말하면 '아, 이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중요하고 진지한 이야기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야 정상이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시면 얼른 알아듣고 "아이고,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며 납작 엎드려야지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이 내게 주기 원하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누님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거듭된 배신과 상처, 수모 때문에 꼬장꼬장한 성격만 남아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대대로 사마리아인을 구박하고 천대했던 유대인에 대한 민족 감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4:11-12)
생수를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에 이 누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호호호. 이분 말씀 정말 재미있네. 당신에게는 물을 담을 그릇도 없잖아요. 그릇은 내게 있으니 물을 줘도 내가 주지, 어떻게 당신이 준다는 거예요? 당신네 잘난 유대인들은 늘 우리 사마리아인을 무시했었죠. 그런데 여기 이 우물이 어떤 우물인지 아세요? 당신네와 우리 조상 야곱이 직접 판 우물이란 말이에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이래 봬도 나 산전수전 다 겪고 말귀 다 알아듣는 사람이거든요. 이거 왜 이래요?"
이렇게 누님은 예수님께 싸움을 겁니다. 꼬 범사에 시비 걸기로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려들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3-14)
주님은 " 이 우물물은 마셔도 그때뿐이고, 언제고 또 다시 목마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한 번 마신 이후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적어도 여기까지 진전되면, '지금 이 사람이 그냥 마시는 물이 아니라 뭔가 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고 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누님은 여전히 삐딱하게 듣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어머나, 이분 좀 보게. 대체 그게 어떤 물이라서,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요, 좋아요. 솔직히 나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땡볕에 물 길으러 나오는 게 넌덜머리가 나요. 정말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빨리 줘요. 쭉 한 잔 들이켜서, 다시는 여기까지 나오지 않도록 말이에요. 어서 줘요. 빨리 달라니까요."
더는 대화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겁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말씀하셔도 농담으로만 받아치니 말입니다. 저 같으면 못할 일입니다. 성격상 저는 주님처럼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지도 못해요. 뭣하러 힘 빠지게 이런 대화를 이끌어 간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