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 초요갱(楚腰輕) |
조선시대에서 대군(大君)이란 임금의 정궁(본부인) 몸에서 태어난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
잘 아시다시피, 조선시대 대군들 사이에선 왕권을 놓고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
보통은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왕의 형이 되는 대군들은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
하여 늘 경계의 대상이 됐다. |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스님이 돼 세상을 등졌다. |
관악산 등산을 하다보면 연주암 한 켠에 효령대군 사당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
효령대군은 번뇌를 잊기 위해 북가죽이 늘어나도록 북을 쳤다. |
축 처진 모양을 빗대 ‘효령대군 북가죽 같다’라는 속담까지 생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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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에 “왕자들은 기생을 좋아했다” 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
그 책에는 초요갱(楚腰輕)등 조선시대의 유명한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
궁궐 속 왕자들과 고관대작의 자식, 지방관료 등 숱한 남자들의 넋을 빼앗었던 허리 가늘고 미모가 뛰어난 |
'초요갱' 과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유명한 기생들 이야기이다. |
그 중 초요갱은 세종대왕의 세 아들 왕자들이 번갈아 차지했었던 대상이었으며, |
세조가 여는 궁궐 행사 연회 떄만 되면 단골로 불려다니던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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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을 거느리고 쿠데타에 성공하고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단종을 옹호하던 왕실 |
사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
그 대상이라는 게 실은 그의 동복(同腹)·이복(異腹)형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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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3년(1455) 2월 27일 수양대군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은 화의군 이영(李瓔) 등이 금성대군 이유(李瑜)의 |
집에서 무사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경연을 하며 잔치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영 등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
어린 단종을 몰아세웠다. |
그런데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반역의 죄목(罪目)은 없다면서 화의군 이영이 동생 평원대군 이임(李琳)의 |
기첩 '초요갱'과 간통한 것을 구실삼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여기서 문제의 기녀 초요갱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
대단한 미모와 재예(才藝)를 갖춘 요염한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그 이름도 초나라의 미인은 허리가 가늘다고 한 데서 누군가가 붙여준 것 같다. |
배가 다르긴 하지만 아버지(세종대왕) 가 같은 형제끼리 기첩을 놓고 다투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대단한 |
궁중 비사다. |
화의군 이영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고,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과 소헌왕비 사이의 일곱 번째 |
아들이다. 화의군이 평원대군보다 한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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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기화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 이유는 옥고를 치루며 화의군 이영은 외방으로 유배를 |
떠났다. 초요갱은 ‘장(杖) 80대’의 중형을 받았다.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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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초요갱은 세종 말년에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세 아들 중 막내인 신자형(申自衡)과 눈이 맞았다. |
눈이 맞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방을 꿰차고 들어앉았다. |
세조 3년(1457) 6월 26일 사헌부에서는 왕실의 장례를 담당하는 예장(禮葬)도감 판사 신자형이 본부인을 |
멀리하고 초요갱에게 빠져서 초요갱의 말만 듣고 여종 두 명을 때려죽였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
그러나 신자형은 계유정난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배는 가지 않고 직첩(職牒)만 빼앗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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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석 달여 후인 10월 7일 사헌부에서는 훨씬 충격적인 보고를 올린다. |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덮치기 위해’ 다짜고짜 신자형의 안방으로 들이닥쳐 |
신자형의 아내 이씨는 놀라서 달아나다가 땅에 뒹굴고, |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은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처럼 요염한 기녀 한 명을 둘러싼 사내들의 쟁탈전에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貴賤)이 따로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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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예(才藝)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초요갱을 악적(樂籍)에 올려 궁궐로 불러들이자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
동복아우인 계양군 이증(李)이 초요갱을 범했다.
세조 9년의 일이었다. |
그래서 세조는 당장 이복아우이기도 한 이증을 불러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 형제끼리 서로 간음을 하는가”라며 |
호통을 쳤다.
이증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딱 잡아뗐다. |
하지만 실록은 “이증은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고 적고 있다. |
심지어 변대해라는 인물은 초요갱의 집에 묵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증의 종들에게 몰매를 맞아 목숨을 잃기까지 |
하였다.
계양군 이증은 세종의 끔찍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다. |
학문을 좋아하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그래서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주요 국무를 그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
“일찍이 귀하고 세력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
다만 주색(酒色)으로 인하여 세조 10년 8월16일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
이런 면에서 보면 초요갱은 남자들에게 횡액(橫厄)을 가져다 주는 ‘요부(妖婦)’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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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
자신이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 |
사내들이 그저 자기를 놓고 싸우다가 그들끼리 벌어진 불상사일 뿐이었다. |
죽음도 불사한 사내들은 부나방처럼 초요갱을 향해 달려들다가 날개를 태워버리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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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를 비롯한 세조의 측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
초요갱의 이름은 이때도 나온다. |
정확히 누구의 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종 1년 2월 8일 실록에는 ‘난신의 첩’ 초요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
남이에게는 탁문아라는 기첩이 있었던 것을 보면 남이와 함께 했던 또 다른 고위층 인사의 첩으로 있다가 |
남이세력이 제거될 때 추방당했다. |
초요갱은 역사의 패자 편에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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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하다는 팔자는 바로 이 초요갱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지 모른다. |
5개월 후 초요갱은 평양 기생으로 변신한다. |
아마도 남이가 제거된 후 탁문아가 진해의 관비(官婢)로 내쫓겨갈 때 초요갱은 평양 관기로 보내진 것 같다. |
예종 1년 7월 17일 평양부의 관비인 대비(大非)라는 여인네가 사헌부에 신고를 하였다. |
평안도 도사 임맹지가 초요갱과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
당시는 아직 세조가 죽은 지 얼마 안되는 국상(國喪) 중이었기 때문에 고위 관리의 이 같은 행위는 국법을 |
어기는 중죄였다. |
당시 기생과 놀아났다 하여 처벌을 받은 사람은 임맹지만이 아니었다. |
평양시장격인 부윤 이덕량의 반인(伴人·오늘날의 보좌관) 박종직은 기생 망옥경(望玉京)과 관계를 가졌고 |
이어 기생 소서시(笑西施)와 사통하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소서시의 어미까지 때려죽이는 악행을 |
저질렀다가 의금부에 붙들려왔다. |
평안도 관찰사 어세겸도 함로화와 사통한 죄로 압송되었다. |
실록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임맹지와 달리 초요갱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
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이라는 이름은 실록 등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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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은 실록에 16차례나 나오지만, 황진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
초요갱이 놀았던 인물이 황진이가 놀았던 인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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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되는 것인가? |
그래야 역사의 한페이지라도 기록되는 것인가? |
이 사건에 비추어 보아 도통 모르는게 사내의 일생인것 같다. |
오! 애통할지어다. |
부나방들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