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년 만력 16년 선조 21년(1588년)
봄 1월.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시전(時錢)의 소굴을 태워 없애고 4백여
급(級)의 목을 베다.
○ 일본의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국왕 신장(信長)을 대신하여 스스로 관백(關伯)이 되어 여러 섬들을 모두
차지하고 대마도(對馬島)의 왜인 귤광련(橘光連) 등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관백의 사실은 뒤의 경자년(1600, 선조 33) 강항(姜沆)의 장계에 자세하게 나온다.
○ 사신 유홍(兪泓)이 명 나라에서 돌아오다. 황제는 칙유(勅諭)를 내리고 《대명회전(大明會田)》중 본국 기사를
실은 것 한 책을 먼저 보내오다. 곧 임금이 그 일을 친히 종묘에 고하고 8도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敎書)
를 반포하다.
왕은 말하노니, 천자의 은혜를 받들어 더럽혀진 수치를 영원히 씻어 버리게 되었으니, 나라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이에 흐뭇한 은혜를 펴노라. 만물이 함께 즐겁고 나라가 다시 살아났도다. 돌이켜 생각건대,
하찮은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지키고 있으면서 조상의 세계(世係)가 모욕당함을 마음 아파하였노라.
어찌 비단옷 입고 쌀밥 먹는 것을 편히 여기겠는가. 역적의 이름으로 잘못되어 있으매, 효성 있는 자손으로서
고치기 어려움을 안타까이 여겼노라. 비록 칙서가 여러 차례 내리기는 하였지만, 《대명회전》이 책으로
완성된 것을 못 보았으니 어찌하리오. 내 마음은 의심했다 믿었다 하며 천자 있는 곳을 바라보고 어쩔 줄
몰랐더니, 천자의 말씀이 실처럼 풀려 나와 보배로운 교훈이 선포되었도다. 조상의 원류(源流)가 옥적(玉籍)에
바로잡혔고, 나의 충성스러운 분개는 금장(金章)에 찬양되었도다. 역대의 선왕(先王) 2백여 년에 걸쳐 부르짖는
상주(上奏)가 얼마나 간절하였던고. 동쪽 땅 수천 리 전체에 끊겼던 윤기(倫紀)가 비로소 밝아졌도다. 다 같이
기뻐해야 할 때에 있어서 반드시 비상(非常)한 은혜로운 특전이 있어야 할 것이로다. 종묘 사직에 두루 밝혀
고하였거니와 신민들에게도 널리 혜택을 입혀야 할 것이기에 이에 교시하노라 운운.
○ 서울의 선비들이 무려 백명 천명으로 떼를 이루어 미친 짓, 괴이한 짓들을 하는데, 그것이 천태만상으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때로는 무당 흉내를 내면서 덩실거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혹은 초상과 장사
지내는 일을 꾸며 껑충거리고 흙을 다지기도 하며, 동으로 갔다 서로 달렸다 웃었다 울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저희들끼리 묻기를, “무슨 일로 웃느냐? 무슨 일로 우느냐?” 하고는, 큰 소리로 스스로 답하기를, “장상(將相)들
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어서 웃는다. 국가가 위태롭고 망해 가고 있어서 우는 거다.” 하면서, 다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곤 하다. 한때 이것을 ‘둥둥곡[登登曲]’이라고 부르다.
당시 이것을 주창한 사람은 정효성(鄭孝誠)ㆍ백진민(白震民)ㆍ유극신(柳克新)ㆍ김두남(金斗南)ㆍ이경전(李慶全)
ㆍ정협(鄭協)ㆍ김성립(金誠立) 등 30여 인이었고, 이들을 추종하여 법석을 떤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이때부터 더욱 심각해져서 각자가 자기의 이해를 도모하고 나랏일은 버려두고 잊어버려서,
기축년(1589, 선조 22)의 화에는 선비들이 살육되었고 임진왜란에는 나라가 거의 망할 뻔했으니, 아! 비통하다.
당시 가곡(歌曲)에는 낙시조(樂時調)가 있었는데 그 소리가 처량하며, 모양인즉 머리를 내젓고 뒷덜미를 놀리곤
하여 부끄러움도 없이 몸을 움직인다. 또 계면조(啓眠調)가 있는데 그 소리가 슬프며 가련하고 서글펐다.
또 오평조(於平調)ㆍ우조(偶調)ㆍ막막조(邈邈調)는 다 비참한 것을 숭상하고, 옷은 흰 것을 숭상하여,
식자들은 소리가 애처롭고 옷이 희다 해서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여기다.
○ 이해에 황달(黃疸)이 전국에 가득 퍼져서 앓지 않는 사람이 없다.
[주-D001] 기축년의 화 :
전주에 사는 선비 정여립(鄭汝立)이 반역한 사건에 연루되어 동인(東人) 수백 집이 화를 입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