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완역된 18세기 영문학의 보석
이성의 시대에 태어난 낭만주의의 선구자 제임스 톰슨의 대표작 《사계》
‘18~19세기의 가장 인기 있는 영시’《사계》는 1726년 처음 등장한 이후 100여 년에 걸쳐 132판이 출간될 정도로 대단하고 지속적인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노래하는 이 시편은 톰슨이 정밀한 과학적 관찰과 섬세한 낭만적 감수성으로 그린 우주, 만물, 신에 대한 찬가로, 영국문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자연시다.
18세기의 사상적 토대에서 탄생했으면서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태동을 예시하는
《사계》는 변화무쌍한 한 해의 싱그러운 봄, 찬란한 여름, 황금빛 가을, 매서운 겨울에 대
한 세밀하고도 장려한 묘사로 동시대와 후대의 수많은 작가들, 화가들, 작곡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그 회화적 정경의 아름다움으로 삽화의 주제로도 높은 인기를 끌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역동적인 양상들을 탁월한 묘사로 스케치하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당대의 문학적, 역사적,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관념들뿐만 아니라 시인의 정치적 신념, 지적 흥미, 애국적 예찬, 낭만적 감수성까지 발견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18~19세기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읽힌 시’
제임스 톰슨의《사계》는 1730년 처음 완성본이 출간된 이후 약 150년 간 ‘성서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거실에 놓여 있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끈 영문학의 고전이다. 출간 뒤 거의 백 년이 지난 19세기 초엽에도 톰슨이 여전히 영국 비평가에게 ‘모든 시인 중 가장 인기 있는 시인’으로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그의 대표작《사계》가 거둔 압도적인 대중적 성공을 증명한다.
그러나 영어권에서의 중요도와 영향력에 비해 국내에서《사계》는 그 방대한 분량 중 일부 구절이 발췌 번역되어 있을 뿐이어서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한국현대영미시학회 회장을 지낸 영미시 전문가 윤 준 교수의 유려하고도 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국내 독자들과 연구자들이 처음으로《사계》의 완역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문학사적 의미가 깊다.
서정적 상상력과 과학적 정밀함이 결합된 사계절의 묘사
《사계》는 영문학에서 ‘이성의 시대’로 불리는 18세기의 신고전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
으면서도 ‘감성의 시대’인 19세기의 낭만주의적 조류를 예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뉴턴의 광학을 비롯한 18세기의 자연과학적 발견에 큰 영향을 받은 톰슨은《사계》에서 세계에 대한 정밀한 과학적 관찰과 낭만적 감수성을 설득력 있게 결합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신에 바치는 찬가로 이루어진《사계》의 묘사는 우주가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당대의 과학적 이론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서정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톰슨은 황야와 숲과 대설원과 바다와 사막과 강과 들판을 아우르는 자연의 장대한 경관, 목가적 전원부터 번잡한 도시에 이르는 인간의 삶의 터전, 천체의 궤도, 기상학적 현상, 식물과 동물의 생태, 빛과 색채의 변화를 망라하는 폭넓은 소재를 통해 신과 그의 위대한 작품인 자연의 다채로움과 충만성을 예찬한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이상향적 자연의 풍경
영국문학에서 자연을 소재로 한 가장 빼어난 묘사-명상시 중 하나로 평가되는《사계》는 당대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은 톰슨의《사계》를 토대로 같은 제목의 오라토리오를 완성했고,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와 존 콘스터블은《사계》에 묘사된 빛과 색채의 인상주의적 효과들에 깊이 매료되어 시의 일부 구절을 전시의 모토로 인용했다. 낭만주의를 개창한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톰슨의 ‘상상력 넘치는 시인으로서의 천재성’에 주목하면서《사계》를 ‘영감의 작품’이라고 평했다.《사계》의 목가적 풍경들은 가장 인기 있는 삽화 주제가 되었으며, 특히〈여름〉에서 무시도라가 목욕하는 장면은 토마스 게인즈버러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다. 이처럼 서양의 문학, 미술, 음악, 대중문화에 두루 영향을 미친《사계》의 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은 이번 번역을 통해 현대 한국의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따뜻한 한 해의 봄바람으로 홍조를 띤 처녀의 빰에서는 이제 차츰 분홍색이 옅어지고, 한결 더 청신한 붉은 빛이 넘쳐흐른다. 입술은 한층 더 진한 향기를 풍기며 붉어지고, 그녀는 젊음을 발산한다.
빛나는 윤기는 더 환하게 흐르면서 부풀어 올라 눈 속으로 들어가고, 갈망하는 가슴은 격렬한 두근거림으로 들먹거리고, 사랑의 격정이 혈관을 사로잡아, 그녀의 나긋나긋한 영혼은 온통 사랑의 포로가 된 상태다. 그 귀한 황홀한 힘으로 가득하고 한숨짖는 나른함으로 병든 그녀의 연인은 열렬한 응시를 피해 몸을 돌린다.
봄
해는 더는 맹위를 떨치지 못하고, 기울어 가면서 생기를 주는 온기와 생명의 광채만을 지금 내쏜다. 그러고는 다채로운 햇살로, 낭만적인 형상으로 끊임없이 천변만화하는
하늘의 저 아름다운 의복들인 구름들을 불 밝히며, 깨어있는 상상력의 꿈을 보여 주는구나! 아래쪽 지상에서는 두루, 익어 가는 과일들로 뒤덮이고 빠르게 부풀어 올라 완벽한 한 해를 기약하면서, 풍성한 대지와 그녀의 온갖 족속들이 너나없이 기뻐한다. 홀로 머나먼 산속을 찾아, 거기에서 자연과 대화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가슴을 자연과 하나 되게 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래로 그 일체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걸 좋아하는 이에게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산책의 시간이다. 자연과의 행복한 영적 합일을 경험할 수 있게 된 벗들 무리의 격조 높은 눈에는 속된 이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실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 매력을 드러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탁월한 빛인 심오한 상념들이 가득 들어 있고, 그들의 가슴에서는 제 잇속만 차리는 이들이 공상이라고 치부하는 미덕이 열렬하게 불타오른다.
여름
서서히 사라지는 저쪽의 구름들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을 온통 부드럽게 만들면서, 차분한 저녁이 중간 대기층의 익숙한 장소에 자리 잡고는, 고갯짓 하나로 무수한 그림자들을 부른다.
한결 더 상쾌한 저녁 바람이 숲을 물결치게 만들고 개울물을 흔들기 시작하더니, 아둑한 돌풍으로 곡물밭을 쓸고 가고, 그새 메추라기는 달아나는 짝을 소란스레 뒤쫓는다.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자, 엉겅퀴 무성한 초원 위로 드넓게 쏟아져 내리는 식물들의 새하얀 솜털들이 경쾌하게 떠다닌다.
양떼를 우리에 안전하게 집어넣는 양치기는 서둘러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불그레한 얼굴로 젖을 짜는 아내의 넘칠 듯한 양동이를 차례로 운반한다.
굽은 샛길 사이의 생울타리마다 깨똥벌레는 제 보석의 빛을 내뿜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광채가 반짝거린다. 저녁은 육중한 직물로 짠 스틱스강 같은 겨울옷이 아니라 암갈색 망토를 걸친 밤에게 세상을 넘겨준다.
여름
아침이 하늘에서 몸을 떨며 퍼져 가는 빛을 눈에 띄지 않게 펼치자마자 잘 여문 낟알들이 달린 보리밭 앞에 보리 베는 이들이 적당히 대형을 이루고 서 있는데, 각자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 옆에서 좀 더 힘든 역할을 떠맡아 이름 없는 고결한 직무로 그녀의 노고를 덜어 주기 위해서다. 일제히 그들은 허리를 굽혀 실팍한 보릿단을 쌓아 올리고, 그새 화기애애한 무리 사이로 시골의 수다와 시골의 스캔들과 시골의 농지거리가 무해하게 날아다니면서 지루한 시간을 잊게 만들고, 찌는 듯한 시간을 어느덧 훔쳐간다. 뒤에서는 주인이 걸어오며 보리 가리를 쌓아 올리고, 종종 흐뭇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며 가슴이 기쁨으로 설레는 걸 새삼 느낀다. 이삭 줍는 이들은 사방에 퍼져, 여기저기에서 떨어진 보리 이삭을 하나하나 살피며 보잘것없는 수확물을 거둔다.
가을
종종 한 해의 노고를 좌절시키곤 하는 무척 뜨거운 남풍은 강력한 돌풍을 모은다. 처음엔 작은 숲들이 부들부들 떠는 우듬지들을 흔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조용한 속삭임이 부드럽게 기울어지는 보리밭을 따라 달린다. 하지만 공중에서 태풍의 세력이 좀 더 강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막강한 흐름 속에서 격동하는 대기 전체가 소란스러운 세계 위로 맹렬하게 돌진하자, 허리를 굽힌 숲은 뿌리까지 긴장한 채 아직은 바작거리는 때 이른 낙엽들의 소나기를 쏟아붓는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주변의 산들은 노출된 황야로부터 소멸된 폭풍을 회오리바람 속에 모아서는, 급류처럼 계곡 아래로 보낸다.
돌풍의 극심한 맹위에 노출되고 발가벗겨 곡물 의 바다 전역을 빙빙 도는 큰 파도 같은 보리밭은 온 사방을 떠돌고, 비록 돌풍에 순종하면서도 돌풍의 움켜쥐는 힘을 피하지는 못한 채 공중에서 소용돌이치거나 까발려 텅 빈 겨만 남게 된다. 때로는 시커먼 지평선으로부터 쓸려 온 느닷없는 폭우도 사방에서 계속 억수로 쏟아진다. 여전히 머리 위에서는 여러가지가 뒤섞인 사나운 비바람이 두터운 어둠을 엮어 짜고, 여전히 폭우는 맹렬해져, 결국 들판 전체가 흙탕물에 잠겨 평평해진다. 갑자기 도랑들이 넘쳐 나고, 목초지들이 둥둥 떠다닌다. 주변 언덕에서 쓸려 내려온 무수한 갈래의 붉은 색 토사류가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개울 둑 너머까지 범람하고, 그 돌진하는 격류 앞에서 소 떼와 양 떼와 곡물들과 농가들과 농민들은 뒤섞여 굴러 내려온다. 농민들의 큰 희망이자 한 해의 노고 끝에 당당히 얻은 보물들로 숱한 바람에도 잘 견딘 모든 것들이 소란스러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가을
저녁에 바람은 덜 매섭게 남쪽에서 나직하게 공허한 함성을 지르며 불어온다. 진압된 서리는 녹아 물방울로 뚝뚝 떨어진다. 눈이 드문드문 쌓인 산들은 빛나고, 진눈개비가 성기게 내리고, 주위의 들판이 물에 잠긴다. 속박에 견디지 못하고 개울은 부풀어 오른다. 눈이 녹아 만든 무수한 급류가 널찍하고 세찬 갈색 물줄기로 갑자기 언덕에서부터 바위들과 숲들 위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급류들이 돌진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지는 평온은 금방 드높은 진창으로 변한다. 혹한의 극지를 두들겨 대는 저 음울한 바다들은 강력한 북극의 족쇄 아래에서 더는 쉬지 못하고, 제 파도란 파도를 다 깨우며 제멋대로 굽이친다.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