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131. 세계외교사-만주사변
배경
대공황으로 열강이 국내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가운데 동북아 지역의 일각에서는 침략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바로 일본의 만주침략이 그것인데 미국 국무장관 스팀슨(H.L. Stimson)의 말대로 일본은 시기를 잘 선택하였다.
장쭤린의 폭사사건 이후 그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정부와 제휴해 만주에 국민정부기(國民政府旗)를 게양한 이른바 역치(易幟)를 단행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장차 국민군이 만주 전역을 석권하는 경우 만주에서 얻은 기득권을 어떻게 보존하느냐는 문제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30년 가을부터는 국민정부가 곧 혁명외교를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국민정부는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기하고 외국이 보유한 모든 이권을 회수하는 조치를 곧 취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관세 자주권의 회복, 치외법권의 철폐, 그리고 조계 · 조차지 · 철도이권의 회수 등의 문제를 열강과 교섭하고 만일 열강이 이에 반대한다면 일방적인 행동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특히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은 크게 동요되었다. 랴오둥 반도의 조차지, 남만철도 등의 권익이 위협을 받는 경우 그 누구보다도 먼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이들 일본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조약들의 사수, 그리고 생존권의 보장 등을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러일전쟁 직후에는 1만 6,000명에 불과했으나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1년 전에는 무려 23만 명에 달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군인, 관리, 철도 종사원, 그리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공업 종사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본국 정부나 일본의 국내 여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만주는 역사, 지리,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일본 본토와도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것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만주 일본인(滿洲 日本人)이라고 자칭하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만주군벌(滿洲軍閥)의 압제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 새로운 만주국가(滿洲國家)를 창설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31년 3월 시데하라 외상이 귀족원에서 발언하는 도중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현지 중국인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있으며 본국 정부에게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호소하는 일이 있다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이에 크게 격분해 전만주일본인자주동맹(全滿洲日本人自主同盟)이란 단체를 결성하고 만주와 몽골의 자주독립을 제창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완바오 산(萬寶山) 사건과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郞) 대위 피살 사건이 그것이다. 완바오 산 사건이란 1931년 7월 창춘(長春) 교외에 있는 완바오 산에서 조선인 농민이 중국인 농민으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자 일본인 경관이 출동해 중국인들과 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조선인 농민들이 중국인 지주와 계약을 맺어 수로 공사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발생된 분쟁이 발단이 되었다. 또한 1931년 6월 일본 참모 본부의 나카무라 대위가 만주 서북지방을 여행하는 중에 펑톈군(奉天軍)에 의해 피살되자 일본과 난징 정부는 다시 긴장상태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일본 국내 여론은 극도로 분개해 중국에 대하여 어떤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이에 관동군이 군사적으로 만주와 몽골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나서게 되었다.
관동군의 도발계획
일본이 만주에 군대 주둔권을 획득한 것은 포츠머드 조약 추가 약관에 규정된 철도 수비대의 주둔권에서 비롯되었다. 이 일본 군대는 1906년에 창설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산하에 있었고 도독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격화되자 1919년에는 군 · 정이 분리돼 관동군이 창설되었다.
기존의 1개 사단과 6개의 독립 대대가 관동군으로 편성돼 정치권 밖에서 활동하였다. 이 관동군의 목적은 만주와 몽골을 지배하고 소련에 대항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 목적에 따라서 만몽 지배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자가 1928년 10월 관동군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령이었다.
이시하라의 기본 구상은 다음과 같다. 전략상으로 보아 일본의 직접적인 대상은 소련이지만 대륙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진정한 적은 미국이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 될 것이고 아울러 최후의 세계전쟁이 될 것이다. 일본은 이 전쟁에 대비해 자원 공급지인 만주와 몽골을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
그의 이와 같은 구상은 그가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강의한 『구주고전사』(歐洲古戰史)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1930년 7월에 「국운전회(國運轉回)의 근본국책(根本國策)」이란 것을 건의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일본의 국내 불안을 해소하려면 해외 진출을 해야 되고 또 일본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인구 · 식량 · 자원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국의 배일 운동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만주 · 몽골을 점유하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관동군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도 이에 적극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관동군은 1930년 9월에 점령지 통치안이란 것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은 본국의 육군 참모본부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참모본부도 1931년 6월에 「만몽문제해결방책대강」(滿蒙問題解決方策大綱)이란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관동군은 즉각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호기라고 하는 우연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하며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관동군의 작전계획은 1만 명에 불과한 일본군이 22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과 어떻게 대적하며 열강의 간섭을 어떤 방법으로 회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었다.
류탸오거우 사건(1931년 9월 18일)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펑톈 역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위치한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만주철도의 노선이 폭파되었다. 관동군은 중국군의 폭거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관동군의 계획적인 공작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계획, 준비 등을 맡은 실무자들이 바로 이시하라 중령, 이타가키 대령이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곧 펑톈 성(省)을 장악하였고 19일에는 안둥(安東) · 펑황 성(鳳凰城) · 잉커우(營口) 등 만주철도 연변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21일에는 지린(吉林)으로 진격하였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도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지린, 안둥 방면으로 북진하였다. 관동군의 침략적인 계획으로 이른바 만주사변이 발발하였다. 일본 정부는 기정사실을 추후에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사실 류탸오거우 음모에 관한 소문은 8월 중순부터 유포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펑톈 주재 일본 총영사의 보고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시데하라 외상이 미나미 지로(南次郞) 육상에게 그런 소문의 진위를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지의 관동군은 당초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였다. 펑톈의 특무대원 하나야 다다시(花谷正)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화(昭和) 6년(1931년) 봄쯤에 류탸오거우 사건이라고 부르는 계획이 성립되었다. 계기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나 그 후의 처치가 문제이다. 장쭤린 폭사사건의 교훈을 살려서 계획을 면밀히 세웠다. ··· 이번에는 전광석화같이 군대를 출동시켜 하룻밤 사이에 펑톈을 점령하여 열강의 간섭이 들어오지 않도록 신속히 예정 지역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에 정부라든가 일선 외교관으로부터 방해가 있을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여기에 주저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때로는 중앙의 명령을 사실상 무시하여 강행할 필요가 있으며 관동군의 행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중앙부(中央部)의 중견장교를 끌어들이고 내부로부터 조력을 얻고 또한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일파의 국내 쿠데타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더욱이 인접 조선군으로부터 시간에 맞추어 증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일본의 침략
일본 정부는 9월 24일과 10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제1차 성명은 9월 19일 내각이 이미 결정한 사태 불확대 방침을, 그리고 제2차 성명은 시데하라 외상이 10월 10일 유럽 · 미국주재 일본 공관에 발송한 바 있는 이른바 5개 항목을 각각 되풀이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의견이 대립되어서 어떤 일관된 정책을 펴 나가지 못하였다. 민간 정치인과 군부, 군부 내에서도 육군 중앙부와 일선기관인 관동군의 의견이 크게 대립되었다. 그러나 내각은 결국 군부의 독주에 끌려가게 되었고 군부도 강경한 주장을 내세운 관동군의 행동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이 관동군에게만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주와 몽골의 경영은 당시 일본 정부 전체의 희망이었으며 단지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수단에 관해 의견이 갈라져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여론은 더 과격해 침략을 충동질하였다.
철도의 안전, 일본인의 생명, 재산의 안전이 보장되면 모든 군대는 본래의 주둔지로 철수하겠노라는 제1차 성명은 일본 정부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군부와의 의견을 조정하지 못한 단계에서 발표된 것이었다.
시데하라 외상 자신은 류탸오거우 사건이 발발한 것을 19일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날 일본 내각은 사태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육군성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만주와 몽골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일본의 조약상 권익을 완전히 보장받도록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관동군에 대해서는 그 군사행동을 추인하는 한편 필요 이상의 행동은 자제토록 당부하였다.
이에 대해 관동군은 차제에 만주 전역을 점령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3개 사단의 증원 부대를 요청하였다. 이런 증원군의 요청이 거절되자 관동군은 22일 선통제(宣統帝)를 두수(頭首)로 하는 지나정부(支那政府)의 수립을 결정하고 그 공작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에서는 침략행위가 계속되었다.
10월 8일 시작된 진저우(錦州) 공격은 열강의 태도를 경화시켰다. 진저우는 장쉐량 정권의 본거지이며 만주철도 연변의 일본인 보호지역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진저우 공격은 바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겠다는 명백한 침략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시데하라 외상을 신뢰하고 일본의 민간 정치인이 군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국 국무장관 스팀슨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대공황의 와중에서 동북아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후술키로 한다.
진저우 공격이 있은 직후 시데하라 외상은 유럽 · 미국 주재 공관에 일 · 중 양국이 협정을 체결할 대강오항목(大綱五項目)을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양국은 서로 침략적인 행동 또는 정책을 펴지 않는다.
② 적대적인 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고 서로 약속한다.
③ 일본은 만주를 포함한 중국의 영토보전을 존중한다는 방침을 다시 천명한다.
④ 중국은 만주 각 지방에 거주하고 여행하며 평화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일본 국민을 유효하게 보호한다.
⑤ 양국 정부는 파멸적인 경쟁을 예방하며 만주에 있어서 철도에 관한 현존 조약을 실시하기 위하여 양국 철도계통 사이에 필요한 협정을 해결한다.
일본 정부의 제2차 성명은 이 5항목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군 철수 이전에 이 5항목에 관한 중 · 일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열강의 태도는 더욱 경화되었고 중 · 일의 교섭 가능성은 전혀 없게 되었다.
10월 하순에 이르러 일본 정부는 만주의 자치적인 치안이 이루어지면 스스로 철병하겠다고 결정하고 11월 초에는 평화적인 북만주 경영을 위해 기밀비 300만 엔의 지출을 결정하였다. 이제 사태는 5항목의 차원을 넘어서 만주 점령이라는 국면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미국의 태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 동북아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문제의 성격으로 보아 소련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국가였으나 일본의 만주침략을 실력으로 저지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더욱이 소련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영국 · 미국 · 프랑스 등이 반(反)소 전략의 하나로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소련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데 급급하였고 일본에게 불가침 조약 체결을 제의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일본은 물론 소련의 이러한 제의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와카스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의 민간 정치인들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진저우 공격이라는 사태가 발발하자 미국의 태도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스팀슨 국무장관은 11월 말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으로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공언하였다. 그런데 이 발언은 도리어 일본의 여론을 자극해 더욱 침략을 부채질하였다. 와카스키 내각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국제연맹의 조사위원회 구성 문제로 물러나고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이 들어서자 미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그리하여 1932년 1월 7일 스팀슨 국무장관은 다음과 같은 강경한 입장을 중국, 일본 양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이것을 스팀슨주의 또는 불승인원칙이라고 부른다.
··· 미국 정부는 중국의 주권, 독립, 그리고 영토적 · 행정적인 보전 및 일반적으로 문호개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에 대한 국제정책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미국과 미국 국민이 보유한 중국에서의 조약상 권리를 침해하려는 모든 사실상의 상태의 합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 · 일 양국 정부 또는 그 대리자가 체결한 일체의 조약, 협정에 대하여서도 이것이 앞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 그리고 중 · 일 양국과 미국이 당사국으로 되어 있는 1928년 8월 27일 파리 조약의 약속과 의무에 위반되는 수단에 의하여 성립된 일체의 상태, 조약, 협정을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하는 것을 의무라고 인정한다.
이와 같이 일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조약 혹은 상태의 국제법적인 효과를 부정하는 이 입장은 3월 국제연맹 총회의 결의로써 연맹 가맹국의 의무라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국제법적인 평가는 학자에 따라 다르나 이 스팀슨주의는 그 후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국제연맹
중국은 당초부터 만주 문제를 국제연맹에 회부해 열강의 개입으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저항 정책을 전개하면서 9월 19일 국제연맹에 문제 해결을 부탁하였다.
9월 30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만주 문제에 관해 최초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일본군의 신속한 철수와 중 · 일 양국 관계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의 실시를 권고하고 폐회하였다.
다시 이사회가 소집됐을 때에는 시데하라 외상이 이른바 5항목의 우선 실시를 주장한 이후여서 이사회의 분위기는 경직돼 있었다. 10월 15일 이사회는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옵서버로 이사회 심의에 참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 이사회 회의 일자인 11월 16일 이전에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1월 이사회에서 조사위원 파견을 제의하였고 이에 따라 12월 10일 이사회는 조사위원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리튼(V.A.G.R. Lytton) 경을 위원장으로 한 조사단의 구성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후술하기로 한다.
제1차 상하이 사변(1932년 1월 18일)과 만주국의 성립(1932년 3월 1일)
관동군이 당초 만주와 몽골 점유를 주장했으나 정부와 중앙 군부의 반대에 부딪혀 만몽자주국가(滿蒙自主國家) 건설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전술한 바 있다. 류탸오거우 사건 이후 군사 활동의 범위가 만주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이른바 자치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일본군의 계략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32년 1월 초에 진저우와 산하이관(山海關)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열강의 태도는 다시 경직됐고 세계의 이목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열강의 관심을 만주로부터 멀리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 이른바 상하이 사변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략을 계획한 자가 바로 상하이에 주재하고 있던 무관인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소령이었다.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된 중국인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3인을 습격하였다. 이를 빙자해 일본의 해군 육전대가 상륙하고 중국군과 충돌하였다. 일본은 육군 3개 사단을 증파해 무력충돌을 확대하였다. 열강이 다시 경악하였다. 일본도 열강의 간섭을 우려하고 5월에 가서야 중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해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상하이 사변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창설하려는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일본은 괴뢰국 수령으로 선통제를 지목했는데 그는 만몽 3,000만 주민의 추앙을 받고 있었고 만주계의 가문임은 물론, 일본과 쉽게 협력할 수 있는 인물로서 만주국의 집정(執政)으로서는 적격이었다.
그런데 그는 당시 톈진의 일본 조계에 머물면서 관동군의 진의를 의심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관동군은 다시 공작을 자행하였다. 톈진에 폭동을 일으키고 선통제 푸이(溥儀)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핑계로 1931년 11월 그를 만주로 호송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3월 1일 그를 수령으로 하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리튼 보고서와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1년 12월 국제연맹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영국의 리튼 경을 단장으로 하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대표들이 위원이 되었다. 미국의 대표는 미국이 국제연맹의 가맹국이 아니기 때문에 옵서버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하순 일본에 도착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상하이, 난징은 물론이고 만주 현지를 순회하면서 방대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1932년 10월 초 제네바에서 공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18~19일 당시 일본군의 행동은 자위의 범위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만주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 중 · 일 양국은 양국의 권리, 의무에 관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만주로 하여금 중국의 주권하에서 상당한 자치를 갖도록 하되 외부의 침략에 대한 그리고 질서유지를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수립된 만주의 새로운 정권은 현행 국제 조약의 근본 원칙에 합치하지 않으며 중국의 이익에 위배되고 또한 중국 국민의 희망에도 배치된다. 따라서 결국에는 일본의 이익에도 합치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런 내용의 리튼 보고서에 일본이 찬성할 리 없었다. 11월 하순부터 이 보고서를 심의하는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은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를 대표로 파견해 보고서 채택을 저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일본 군부는 러허(熱河) 작전을 시작하고 국제연맹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 총회는 1933년 2월 24일 찬성 42, 반대 1, 기권 1의 투표로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반대표는 물론 일본이었다. 마쓰오카는 일본의 입장을 궤변으로 옹호하면서 회의장에서 퇴장하였다. 일본 정부는 3월 27일 정식으로 탈퇴선언을 하여 반(反)국제협력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제연맹 탈퇴 후 일본군은 러허 작전을 계속해 4월에는 베이징, 톈진 지역으로 육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계속하여 화베이(華北) 지방으로 진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또 국민정부도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5월 말 양국은 탕구(唐沽) 휴전협정을 체결해 일본군은 만리장성의 선으로 철수하고 그 이남 지역에 방대한 중립지역을 설정토록 하였다. 이로써 만주국의 서남국경이 확정되고 만주사변은 일단 끝맺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주사변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