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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자.
분단된 한국은 지금 지정학적으로 병자호란 시대와 같은 상황을 당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참담했던 굴절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오늘내일 없이 다투고 있는 여야의 현재의 모습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지금까지 70년 동안 북한과 비교하여 괄목할만한 성장을 해온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비교가 되는 것은 공산주의가 부르짖는 민족끼리의 경제 운영과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운영 방식에서 보듯 공산당들 국가 대부분이 경제의 몰락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지난 문 정권은 세계 최 빈국인 북한과 함께 경제 대국을 이루자고 5년 동안 내내 민족 갱생을 외치고 부르짖었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었던가를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지도자의 무능을 탓하기 전에 그를 선택했던 국민들이야 말로 지금 어떤 말로 해야 좋을지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문정권의 통치는 대한민국을 10년 20년 뒤로 역회전을 한 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분열시켜 지금까지 혼란을 부추기고도 있으니 어쩌랴. 이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인 것을. 이모 든 것은 국민들이 교육의 부재에서 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국가가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던지 인조와 같은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국제 정세와 맞물려 앞으로 더 큰 무엇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우린 준비가 되어 있을까. 너무도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더불당은 국회의석수를 내세워 사사건건 국정운영을 방해하며 공산주의자들의 앞잡이처럼 국민 선동까지 부추겨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70년 내내 이런 정치 행태를 히면서서도 국가가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참으로 위태위태한 날마다.라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70년 동안 국민들은 정치권력들의 이전투구에 휘둘리면서도 내성이 생겼는지 아니면 정신에 문제가 생겼는지는 몰라도 겉으로만 보아서는 모르겠다. 더욱 내성이 생긴 것은 공산당이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간과하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럴 때일수록 모두는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성장은 미국과 일본의 동맹 관계 속에 성장을 해온 것을 부연 설명을 안 해도 알 것이지만 우리는 성장을 해오면서 수많은 시련과 난관에 봉착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중국과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공작으로 인하여 분열과 대립을 자초하며 무수한 혼란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문 정권의 후유증은 윤정부가 들어선 지금까지 입법 사법 행정. 언론 방송 군에까지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안위 위주적인 국정 운영도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사사건건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더불당의 극심한 대립은 국가가 잘 되기 위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정치 대립이 아닌 이념을 달리하기 때문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공산주의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것조차 믿기 힘들겠지만 이런 것이 가능하겠나 도 생각 하겠지만 어느 사이에 모두가 방관한 사이 자유의 풍만함에 젖어 감성에 젖어 안방에 둘러앉아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공산주의를 미화하는 연속극을 매일밤 보는 사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사실인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산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자유민주주의는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자.
어느 전쟁이나 전쟁에 지면 지도자나 백성들은 아주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전쟁은 정확히 1636년 (인조 14년) 12월 9일에 시작되어서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에 끝난 걸 봐도 두 달이 채 안된 짧은 전쟁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전쟁을 겪기 40여 년 전에 임진왜란이란 전쟁을 겪은 바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보통 몇 년 전쟁이라고 얘기하죠? 7년 전쟁이다. 그런데 두 달 남짓밖에 안된 병자호란이 사실상 7년이나 이어졌던 임진왜란보다 정신적으로는 그 충격이 오히려 더 컸다고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두 달 밖에 안된 전쟁이 7년 전쟁보다 더 충격이 컸을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전쟁에서 조선 국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선 국왕과 조정은 만약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조정을 서울에서 강화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까 그런 애초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636년 12월 9일에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에 도착했던 청군 기마대가 지금 서울의 녹번동 부근에 나타난 것이 1636년 12월 14일 오전이었다. 불과 5일 만에 달려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발군의 기동력을 갖은 청나라의 기마대를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특별히 뭐라고 별명을 붙였느냐고 하면 철기(鐵騎)라고 불렀다. 강철 할 때 철鐵자와 말기騎자죠. 그러면 철기란 무슨 뜻이 되겠나? 강철 같은 기마대라 하는 뜻이다.
그런데 말 자체를 잘 다루고 말 자체가 잘 달릴 뿐 아니라 말 위에서 칼이나 창을 들고 활을 쏘는 솜씨가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훈련 때문에 일품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조총이나 화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전에서 청나라 철기를 상대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 조선 국왕 인조는 할 수 없이 강화도를 포기하고 올림픽 공원 부근에서 별로 멀지 않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서울 경기도 일대 주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자 요새로써 활용되어 온 것이 남한산성인데 남한산성에서 송파나 잠실 쪽을 쳐다보면 경사가 50도가 넘기 때문에 겨울철 눈이나 비가 내려서 얼어붙으면 제아무리 청군이 강군이라고 하더라도 남한산성을 돌파해서 함락시킨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이 애초부터 모든 전쟁준비를 강화도로 들어가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을 해왔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대상지가 바뀌었을 때는 전쟁준비가 전혀 안 되었다. 그다음 날인 12월 15일부터 청군의 포위가 시작되는데 청군이 다 내려왔을 때 병력이 대충 14만 명 정도로 추정했다.
그런데 당시 남한산성의 조선군대는 얼추 만 4천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십 분의 일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병력이 적은 것 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 만 4천 명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식량을 계산해 보니까 대충 45일에서 6일 정도가 지나면 군량이 전부 고갈된다고 하는 계산이 이미 12월 말에 나왔다.
거기에 겨울이니까 뭐가 제일 문제이겠나? 이 살벌한 추위에 병사들을 성 위에 올려서 보초를 서게 하니까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온몸과 다리에 손발이 동상이 걸려가지고 심지어는 손과 발을 절단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처한 병사들이 속출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바깥으로부터의 원병이 차단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다가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지 45일 만에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의 서문이라고 하는 곳을 나와 가지고 지금 삼전도(三田渡)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오게 된다. 삼전도가 지금 어디냐? 하면 송파 쪽으로 가다 보면 석촌호수(石村湖水)라고 하는 곳이 있고 석촌호수 옆에 옛날 삼전도 비석을 이 자리를 고지로 해서 옮겨놓았다.
실록에 보면 인조가 항복하는 장면은 대단히 처참하다. 인조는 서문에서 나와서 말도 타지 못한 채 삼전도로 걸어와서 청나라 황제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다시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구도 라고 하는 가장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절을 마친 다음에 청나라 황제는 이제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승전이 이루어졌으니까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다.
풍악을 울리고 술을 돌리고 음식을 떠들썩하게 나눠 먹으면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활쏘기 시합을 시킨다. 그래서 오후 3시가 지나서야 청 태종은 행사를 파하고 자기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가고 인조에게 이제 궁궐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인조는 이제 삼전도에서 강을 건너기 위한 배를 타게 되죠. 지금이야 그 부분에 강이 보이지 않지만 옛날 한강의 지형이 바뀌기 전에는 서울로 들어가려면 송파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했다. 그런데 인조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 배를 타는 장면을 묘사한 인조실록의 기록 또한 대단히 처참했다.
배에 오르는데 어떤 신하는 왕보다 먼저 타겠다고 왕의 옷자락을 잡아 끄는 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전부 정신이 빠진 상태에서 배에 올라서 잠실벌에 상륙을 하게 된다. 인조가 이제 창경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가마에 오르고 청나라 군사들이 인조를 호위하는데 그 겨울의 잠실 벌판 곳곳에서 호곡소리가 진동을 한다.
누가 소리를 질렀느냐 하면 바로 이 전쟁이 시작된 와중에 서울 주변에서 청군에 사로잡혔던 포로들 약 1만여 명이 잠실벌판에 바로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청군에 의해서 선양(瀋陽)으로 끌려가게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왕이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인조실록에 이렇게 쓰여 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시고 과연 어디로 가십니까? 진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이렇게 일제히 외쳤다고 휜다. 그러나 이미 항복한 군주이자 청 태종을 섬기기로 했던 인조는 그 포로들을 구출해 낼 아무런 힘도 권한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괴로워서 이 호곡소리를 못 들은 척하면서 서울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을 따름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와서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오늘날 병자호란이라고 전쟁을 재조명해야 되는 것은 인조가 항복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참혹한 전쟁을 통해서 인조 이외에 다른 백성들이 얼마나 끔찍한 체험을 했는지 그것을 한번 되새겨 보고 다시는 이런 끔찍한 전쟁과 비극이 한반도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직후에 다짐을 받아낸다. 무슨 다짐이냐 하면 내가 이번 원정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예외 없이 다 만주의 선양으로 끌고 간다. 만약 끌려가는 포로들을 되돌려 받고 싶으면 나중에 나의 신하들하고 적정한 협상을 해서 몸값을 치른 다음에 도로 데려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만일 단 한 발자국이라도 만주 땅을 밟은 다음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포로가 있으면 인조 그대가 도로 붙잡아서 우리한테 보내 주어야 된다. 이런 조항에 다짐을 받아낸다.
당시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명나라와 한참 군사적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 데 명나라에 연전연승하고 있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명나라에 비해서 너무 인구가 적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기들이 피땀 흘려 얻어낸 포로들을 그냥 공짜로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은 청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농성하고 있을 때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는 아주 처참한 포로사냥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합니다만 최명길이라고 하는 분이 대충 최대로 쳐서 50만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천만명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그 천만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진짜 5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는 것은 이건 어마 어마하게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많은 포로들을 청군은 예외 없이 다 선양으로 연행해 갔다는 것이다. 나만갑이라는 사람이 쓴 병자록이라는 책을 보면 대체로 조선 포로들을 남녀 성별로 나뉘어 가지고 스무 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목에다 돼지꼴 형식으로 연결을 해서 스무 명을 한 단위로 해서 선양까지 끌고 가는데 몇 개월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니 스무 명 단위로 끌려가던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은 바로 겨울이었고 그 겨울에 이들에게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질 리 없었고 식사나 위생상태가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우리가 안 봐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까 조선포로들 상당수는 끌려가는 도중에 동사하거나 굶어 죽거나 혹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맞아 죽거나 하는 비극이 속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선양까지 끌려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잡아온 청군이나 혹은 딴 사람에게 매매되어서 바로 노비로 살아가게 된다는 결말이 너무 비참했던 것이다.
1637년 여름철부터 선양에서 조선인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러시를 이룬다. 정식기록에 의하면 많은 날은 하루에 천명씩 조선포로가 선양에서 탈출했다 이런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포로들은 선양을 떠나서 조선을 향할 때 기본적으로 만주 벌판을 걸어올 수밖에 없는데. 낮에는 주로 숲 속에 숨어서 몸을 은신해 있다가 밤에만 주로 걷는 데 한번 생각해 보라. 밤에 누가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도 아니고 또 적절한 보호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대부분이 굶어서 아사하거나 심지어는 짐승에게 물려서 죽는 사람도 속출했다.
선양에서 압록강까지 오는 데는 한 200km 이상을 걸어야 되는데 더 비극적인 일은 이 사람들이 압록강변에 도달했을 때 벌어진다. 요즘은 그 관련 소식이 좀 뜸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널 때 겪었던 여러 참상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다만 병자호란 당시에 조선인 포로들에게도 압록강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과 원이 맺힌 그런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청 태종이 인조한테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도망쳐 오는 포로는 도로 붙잡아서 우리한테 돌려보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래서 이미 압록강변 조선 측 강변에는 도망쳐오는 조선인 포로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강변까지만 가면 살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이 자국에서 못 건너오게 막는 상황을 맞이하니까 서운하고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입국이 좌절된 포로들은 거의 자포자기적 행동을 하죠. 무조건 강 상류로 올라가서 수심이 좀 얕은 곳을 찾아보던가 아니면 감시가 좀 덜한 곳을 찾는데. 그런데 막상 어디에도 감시가 덜한 곳도 드물고 수심이 얕은 곳도 별로 안보였다. 그러다 보니까 강물에 뛰어들어서 헤엄쳐 건너려다가 익사한 사람이 태반이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 계속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해서 도로 청나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조국의 행태에 실망해서 강물에 그냥 몸을 던지거나 나무에 목을 매서 죽는 사람도 속출했다. 1637년 여름철부터 이 압록강 지역을 답사하고 온 중앙조정의 어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강변에 조선인 도망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리고 그들이 벗어 논 옷가지나 신발들도 무지하게 많이 있다. 이 불쌍한 참혹한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그런 한탄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사실 자체는 제대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가장 끔찍한 사연은 이런 것이다. 조선 쪽에서 받아주지도 않으니까 입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기 계속 있자니 굶어 죽을 것 같고 할 수 없이 선양으로 돌아가는 탈출 시도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도로 돌아온 이들 포로들에게는 청나라의 형법(刑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노비가 도망쳤다가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죽이지는 않는데 발뒤꿈치를 도끼로 자르게 되어있었다. 심양장계란 책에 보면 바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도로 돌아온 조선인 포로가 발뒤꿈치를 잘려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실제로 나온다.
옛날이나 현대사회에서나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비극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노약자들이나 여자들이다. 병자호란 당시 서울과 경기도 강화도 일대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여인들이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에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로 피난 갔던 양반 집안의 여자들이 갑자기 강을 건너서 상륙해 온 청군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목을 매거나 일제히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 자체가 대단히 처절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바다에 뛰어들었느냐 하면 그 여자들이 갖고 있던 머릿수건이 바다 물 위에 둥둥 떠가지고 그게 마치 꽃 잎처럼 보였다 이런 기록이 나올 정도로 처참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붙잡은 여자들을 청군은 선양으로 끌고 가면서 이 여자들을 자기의 첩으로 등록을 했다.
그런데 아주 끔찍한 일은 청군 장수들 중에서 일부 녀석들이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부하 녀석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첩보다 예쁜 여자를 데리고 있으면 강제로 교환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히 상품으로 거래가 됐던 것이다.. 더 끔찍한 비극은 이들이 선양에 도착했을 때 벌어진다. 청군 장수들의 10명 중에 7, 8명은 다 유부남들이죠.
유부남이라고 하면 만주에 누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자신의 본처가 있겠죠. 두 달 내지 세 달 만에 조선 원정에서 돌아왔는 데 자기보다 훨씬 예쁜 여자를 2-3명씩 데리고 와서는 같은 집에 산다고 선언해 버리면. 질투심을 못 이긴 청군의 본처들이 그 질투심을 누구한테 다 전가하느냐 하면 조선인 첩에게 전가를 했다.
그런데 또 청나라 기록에 나올 정도로 아주 쇼킹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만주족 본처가 조선인 여자에게 끓는 물을 퍼붓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여자의 얼굴을 망가뜨려야 내 남편의 마음이 나한테 돌아온다고..
이 소식이 청나라 황제의 귀에 까지 들어갔고 청나라 황제가 결국 신하들을 모아놓고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앞으로 첩들에게 그런 극악한 행위를 일삼는 본처들은 남편이 죽는 즉시 땅에다 파묻어 버려라. 순장해 버리라고 포고령을 내릴 정도로 청나라에서도 굉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반도 지도를 보시면 중앙에 중국대륙이 있고 바로 배후에 일본열도가 있는 데 이렇게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어 있는 한반도에서 지난 오백 년 동안 조선 왕조의 역사를 대충 국제적 시각으로 살펴보면 일종의 법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뭐냐 하면 한반도 주변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강대국의 힘이 점점 빠지고 그 언저리에서 새로운 신강국이 등장해서 힘이 빠져 가고 있는 강대국에게 도전하는 상황을 맞게 되면 한반도는 거의 예외 없이 전쟁터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전쟁 역시 기존의 강대국인 명나라가 쇠퇴하고 신흥강국인 청나라가 떠올라서 쇠퇴하는 명나라에게 도전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피해를 입었던 전쟁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병자호란 말고도 이런 사례가 조선시대에 언제 있었느냐. 크게 네 차례를 들 수가 있는 데 제일 첫 번째는 14세기 후반이다. 정확히 1368년에 중국대륙에서 원나라가 사라지고 한족의 명나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원명교체이다. 이런 양자의 대결구도 속에서 강남지방에서 일어났던 한족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이라고 있었다. 한족 출신의 홍건족 가운데 관선생이라고 하는 자가 이끄는 홍건적의 일대가 강남을 탈출해서 만주를 거쳐 가지고 고려를 침략해 오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게 바로 1361년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략이다.
우리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홍건적이 왜 쳐들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홍건적이 쳐들어왔다는 사실만 나와 있지 홍건적이 갑자기 어떤 연유로 고려에 쳐들어왔는지에 대한 배경설명이 없었다. 바로 홍건적의 침략은 거시적으로 놓고 보면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패권교체 즉 몽골족의 원에서 한족의 명으로 교체되는 과정의 역사다.
그게 한반도로 뻗쳐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다음 사건은 뭐냐 16세기 중반 후반에 바로 한반도 등 쪽에 있는 일본열도에서 전국시대라고 하는 것이 점차 통일의 국면으로 가게 되고 그 와중에 잘 아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자가 일본을 통일한다.
그리고 이 무렵 일본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확 커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정도의 군사력이면 지금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명나라 하고 한판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1587년에 대마도를 정복한 다음에 조선에다 대마도 사람들을 보내서 뭐라고 협박을 했느냐 하면 우리가 명나라로 쳐들어갈 테니 조선 너희가 길잡이 노릇을 해라 이렇게 조선을 협박한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국초부터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겼고 명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본의 요구를 일축해 버렸다..
거기에 한 마디로 격분했던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으로 쳐들어왔던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1592년)이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7년 전쟁은 단순한 일본의 조선침략이 아니라 일본의 전반적인 국가적 역량이 커지면서 기존의 패권국 명나라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는 데 그 불똥은 가장 먼저 조선으로 튀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제 임진왜란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명나라 군대가 일본하고 싸우는 동안에 청나라의 주도세력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서서히 세력을 키워서 결국 나중에 청나라가 명에게 도전했고 그 명이라고 하는 대국과 신흥 강국 청나라 사이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이 침략을 당했던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그러면 네 번째 사건은 뭐였냐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서 정확히 7년이 있다가 1644년에 명나라가 농민반란으로 망한다. 그리고 이제 청나라가 북경을 접수해서 중원의 패권국으로 등장한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청나라는 동아시아의 제일 국으로 등극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세력들이 서서히 아시아 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걸 조금 유식하게 말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얘기하죠. 이 서세동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산업혁명의 성공에서 새로운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찾아 나선 영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그 영국이 청나라와 한판 붙었던 사건이 1840년대에 유명한 아편전쟁이다. 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이긴다. 아편전쟁 이후에 서구를 모델로 삼아서 열심히 이른바 근대화에 매진했던 일본이 아편전쟁이 일어난 약 50년 뒤인 1894년에 청일전쟁에선 청나라와 싸워서 일본이 이긴다.
이게 아시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충격이었다. 청나라가 영국에 진 것도 충격이었는데 동아시아의 강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청나라가 다시 동아시아의 변방 국가인 일본에게 졌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청나라가 일본에 졌다고 하는 그 충격보다 우리의 입장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 청과 일본이 싸우는 청일전쟁조차 한반도를 그냥 비껴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청일정쟁은 바로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충청도 아산 그리고 성환 그리고 경기도 평택 일대에서 불이 붙기 시작해서 서울을 할퀴고 평양을 거쳐서 만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1894년 19세기 후반에 청일전쟁조차 한반도는 그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G2 시대라고 하는 얘기를 사용하고 있다. G2라는 말은 Group of 2라는 말에 약자인데 한 마디로 얘기하면 중국이 이제 초강대국의 반열로 진입할 가능성이 상당히 커다란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오바마와 시진핑 회담에서는 시진핑 국가 주석이 뭔 얘기까지 했느냐 하면 이제 미국과 중국은 신형대국관계라고 하는 것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
미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떠오른다고 하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미래 학자들이 예측하는 것만큼 현실로 나타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미국이나 중국 두나라 모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한반도, 특히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패권교체의 조짐이라 하는 것이 지난 오백 년 동안의 네 개의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놓고 보면 결코 밝은 미래만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굉장히 불투명하고 그 와중에서 우리가 해야 될 여러 가지 과제들을 남기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역시 한반도의 비극은 오백 년 동안에 네 차례의 사례로 꼽았을 때 항상 결론이 명확하다. 강대국들이 패권경쟁을 할 때 어느 두 나라, 둘 중에 하나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되는 비극으로 내몰리게 되면 한반도는 백발백중 전쟁에 휘말렸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런 사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전쟁이다.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30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오늘날 우리가 미중 패권교체를 운운하는 상황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강대국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려서 그들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기로로 내몰리지 말아야 되고 또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상당한 정도의 역량과 그 역량을 뒤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통합능력을 키워야 된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그 출발부터 결과까지 되돌아보고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를 단순한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리고 미래에 다시 재현될 수 있는 그 무엇이란 차원에서 재음미하고 대처할 수 있고 방어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교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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