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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발의된 형제복지원특별법안이 제대로 된 논의도 진행되지 않고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다면 내년 총선 등에 밀려 사실상 19대 국회에서 처리하기 어려워 질 수 있는 상황이다. 즉, 지금이야말로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을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이에 비마이너는 다시 한 번 형제복지원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과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짚어보는 기획을 연재한다. 첫 번째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팀’에서 활동한 서중원 씨의 기고를 통해 ‘부랑인’이라는 낙인의 존재가 국가-시민사회의 공모 속에서 탄생했던 배경을 살펴보고 역사적 반성의 필요성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이어 현재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인터뷰와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의 현재적 의의와 과제를 짚어보는 칼럼이 실릴 예정이다. - 편집자 주 |
들어가며 - 자가진단서
이 나라에서 권력은 언제나 절차의 부당함보다 다급함으로 자신의 입지와 그 불가피함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역사는 그 겉 표면에 있어서만큼은 그러한 권력의 행태를 그대로 용인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현 정권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번번이 국가 체제를 뒤흔드는 불온한 세력으로 유족들을 향해 허위포장하거나 과잉대응하지 않는가? 밀양의 상황은 어떤가? 이전 정권들에서 행해진 강정과 대추리의 모습은 또 어땠는가? 언제나 문제가 된 것은 권력이 행하는 절차의 부당함이 아니었다. 오로지 권력 자신의 다급함이었다. 대저 국가대책을 지연시키는 이기적 소요세력들에 의해 곧 국가 체계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 견고한 매도.
다급함의 프레임은 용이한 통치전략이다. 민주주의와 공정사회 윤리를 위반한 부당한 절차와 권력 자신의 무능, 부패를 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국민과 비국민을 손쉽게 구분할 수 있다. 즉 권력에 순응하는 편과 그렇지 않은 불온한 편을 나눌 수 있고, 또 불온의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다. 이토록 다급한 때에 권력에 이의제기하지 말라! 이의제기 자체가 곧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권력은 언제나 승리한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의 관습에 가깝다할 시나리오다.
2015년 4월 16일.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기괴한 차벽이 나타났다. 꼭 1년 전, 참담했던 자신의 무능을 기껏 주차실력으로 만회해 보려는 심산인 양 그 어느 때보다도 촘촘했던 공권력의 차벽 덕분에 경복궁 북단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돌고 돌아 가야하는 귀갓길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겨우 잡아탄 돌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이젠 좀 그만하지, 가뜩이나 먹고 살기 어려워 죽겠는데’ 라는 야간 운행 기사의 푸념과 마주할 때, 나는 그날따라 국내에 있지도 않은 권력의 실체, 저 텅 빈 무능이 그럼에도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는가를 깨닫는다. 전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각한다(혹은 생각하도록 유도되어 진다). 먹고 살기 어려운 원인, 즉 내 찌든 삶의 피로는 바로 ‘너’ 때문이라고. 네가 일으키는 이기적인 소요가 전체인 ‘우리’를 좀 먹는다고. 척결 대상 1호인 너. 그리고 그런 너를 차단해 주는 고마운 권력. 바야흐로 권력과 결탁한 전사회적 구분과 도려내기가 시작된다. 아무런 가책 없이. 왜냐하면 여기서 연민이란 감정은, ‘너’ 때문에 살기 어려워진ㅡ하여 그 어마어마한 공격성을 드러내고도 오로지ㅡ‘나’에게로만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런 ‘나’들이 ‘우리’를 이룰 때, 역사에서는 파시즘이 창궐했었다.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도 못할뿐더러 사태파악도 못 하는, 퍽 위험한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너’로 지목된 사람들
그렇다면 그간 ‘너’로 지목되어온 사람들에는 누가 있을까?
빨갱이, 폭도, 불순세력…. 최근 종북에 이르기까지, 이 불온한 말들의 계보에는 어떤 위급함의 정서와 책임전가의 증오, 때문에 손쉽게 ‘나’로부터 분리, 배제, 타자화하여 차단(심지어 “처단”)하려는 의지의 기미가 엿보인다. 분단체제라는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한국 사회 내 배제의 논리는 훨씬 광범위하다. 밀양 할매들에게조차 붙는 불순세력이라는 표식이고 보면, 저 계보 위 이지러진 진주알같이 엮인 말들이 뿜어내는 기괴한 기운은 진위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라도 가서 들러붙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번번이 권력은 그러한 명명의 속성을 집권 유지의 전략으로 이용하였다. 즉 특정한 존재로 누군가를 명명하는 순간, 그 구분법에 따라 권력은 자신의 구미에 맞춰 포섭 가능한 국민과 그렇지 않은, 고로 얼마든지 탄압하고 공격해도 되는 비국민을 나눌 수 있었다. 가깝게는 광화문에서, 밀양에서, 강정에서, 대추리에서. 멀게는 광주에서, 여순에서, 제주에서…. 추후에 가치가 복권되었든 아니든, 그 자리의 사람들이 참담한 소외를 겪었다는 사실만큼은 공인된 역사이다. 여기에 ‘부랑인’이라는 낯선 구분의 지표를 하나 추가한다.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어떻게 비국민이 되었나? 대한민국 내에서 권력의 작동 방식이 꾸준한 배제의 논리에 근거해 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 논리에 무수한 ‘나’들은 어떤 방식으로 길들여져 왔는지를 살펴보면서, 이들의 빗금 쳐진 역사를 복원해 보기로 하자.
‘부랑인’이라는 불순의 지표
1970-80년대 국내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로써 위용을 자랑하던 부산 형제복지원은 모범적인 사회복지시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87년 3월 22일, 탈출을 시도하던 원생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숨지고, 이에 수용자 35명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부랑인 임시 보호소로 시작한 이 시설에서는 부랑인에 대한 구제책으로 종교 선도와 숙식제공, 직업재활교육이 행해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이사장 박인근 집안의 재산 증식을 위한 중노동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 구타와 감금, 성폭행 등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2년간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513명에 달하고, 이들은 야산에 암매장 되거나 해부용 시신으로 팔려나가기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나마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만 집계한 것이므로 실제 피해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시설에 수용하고자 규정한 ‘부랑인’의 근거가 매우 모호했다는 점이다. 증언에 따르면 이 시설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극빈층, 고아, 장애인, 무연고자 등 사회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약자 계층뿐만 아니라, 휴가 나왔던 군인, 자기 집 앞에서 놀던 어린 아이, 친구들과 영화 구경 나온 학생 등이 납치되어 강제 수용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부산에 있는 친척 집을 찾아왔다가, 길을 잃어 인근 파출소에 들렀다, 거리에서 TV를 보느라 어슬렁거리다, 단지 술에 취해 귀가가 늦었을 뿐인 사람들이, 주거지가 분명하고 가족의 연락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경찰 공무원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형제복지원으로 인계되기도 했다. 통반장들에 의해 동네에서 생계가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선별되어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진 사례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시설이 수용하고 있던 ‘부랑인’은 누구였을까?
위와 같은 증언에 따르면 이 시설에 당시 합법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부랑인’은 기실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일 수가 없다. 단지 살기가 남들보다 어려웠거나 운수가 조금 사나운 날이었다면 누구든지 ‘부랑인’이라는 언어의 그물에 포획될 수 있었단 뜻이다.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설령 ‘부랑인’이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라 해도 그들을 보호라는 미명 하에 자유의사와 관계없이 가둬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이 대목은 87년 당시 위선적인 ‘나쁜 시설’의 사례로 이사장 박인근에게 2년 남짓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것으로 일단락됐던 이 사건의 복합적인 성격을 암시한다. 문제의 본질이 박인근 개인과 그의 기만적인 시설 운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근 30년이 지난 오늘,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목소리가 다시금 웅성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넘어가는, 그래봐야 독재정권 치하에서 거리 정화와 치안 유지의 일환으로 추진된 부랑인 단속은 당시 정권들의 폭압성을 교묘히 가리고 정당화하고자 한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75년 발표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서는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자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는, ‘부랑인’이라는 개념 적용의 모호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거론된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권의 대대적인 단속과 이들의 강제 수용에 그 자체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서 독재정권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반공교육이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상기시켜 내부 갈등과 모순을 서둘러 봉합시키려는 것이었다면, ‘부랑인’ 단속은 내부의 불순 요소들을 걸러내는 거름망으로써 사회 안정에 기여하는 강력한 공권력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이었다. 애초 고아원으로 출발한 형제복지원이 이러한 정권들과 궤를 같이 하며 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상정한 내적 불순 요소인 부랑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에 과도한 표창과 특혜, 지원금들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부랑인을 선도(?)한 공적으로 일선 경찰들에게는 승진 가산점이 적용되는 등의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파출소나 경찰서에서 고아나 미아, 장애인, 집이 없이 떠도는 극빈곤층 등 낙인찍기 쉬운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한 것은 당시로서는 이상한 절차가 아니었다. 게다가 통반장들이 동원되거나 주민신고가 적극 장려되었던 것을 보면, 행정당국뿐만 아니라 전 국가 차원에서 누군가를 ‘부랑인’으로 색출하는 시기였던 것인데, 이렇게 색출된 이들이 사회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격리하는 역할을 바로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이 담당했던 것이다.
사실 형제복지원은 7~80년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많은 시설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형제복지원 사건을 하나의 나쁜 시설의 사례라던가 과거 부산을 거점으로 하는 한 지역사회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들의 융성에 대대적인 정권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중 발군의 실적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원장 박인근의 전국적 규모의 시설 커넥션 때문이다. 한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형제복지원 시설 운영방법을 배우기 위해 전국 시설장들이 형제복지원에 와서 일정기간 동안 함께 생활하는 단체교육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수용자들은 형제복지원 외 다른 시설의 확장 공사 등에도 종종 노동력으로 차출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형제복지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타지역 타시설에서 인계된 수용자들의 존재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에 있었지만, 사실상 운영자였던 박인근의 시설 영향력은 지역사회를 초월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시설 사업 자체가 국가정책 차원에서 독려되었기 때문이다.
낙인, 대중-시민사회의 공모
독재정권 하에서의 사회정화 사업이 갖는 모순은 정권의 폭압성을 은폐하는 데에 기실 시민 사회가 공모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전 국가 차원에서의 ‘부랑인’ 색출이란, 나에게 향하는 독재라는 큰 폭력을 타인-‘부랑인’이라고 상정한-을 향하는 다른 폭력(배제, 격리)으로 정당화함과 동시에 나 또한 그 폭력에 가담하는 행위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대중-시민사회는 독재라는 큰 폭력에 저항하는 대신 자신들의 분노를 약자 청소의 제노사이드에다 투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즉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부당한 권력의 횡포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라고, 그러니 당신들은 여기로부터 배제된 거기(시설)에, 잠자코 격리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인식으로 말이다. 그러한 인식의 확산 아래, 잠재적 소요들을 차단하여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로써 정권은 자신의 독재와 폭압 형태의 권력을 어느 정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다 보면, 형제복지원으로 강제 이송당할 때 제지는커녕 아무도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았던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대해 고요한 분노감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왜 하필 자신이어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랑인’이라는 낙인은 사회 속에서 더 이상 공존 불가능한 존재로 자신을 배제시키고 격리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설 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부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형제복지원에서 실제로 실시된 ‘부랑인’ 교화교육은 폭력과 강압 속에서 주로 “너희는 부랑인이다”라는 주입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애초 ‘부랑인’의 실체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교화교육은 ‘부랑인’ 수용을 위해 시설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시설의 존재를 위해 ‘부랑인’을 만들어낸 것임을 시사한다. 그 시설을 채워나가기 위해서 ‘부랑인’이라는 언어의 그물은 일차적으로 사회적 보호와 연계망이 약한 계층(고아, 무연고자, 극빈층 등)부터 포획하기 시작해 급기야 나중에는 여느 사람 납치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부랑인’ 문제는 그 개념 적용이 모호했기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설령 ‘부랑인’이 특정 누군가를 적확하게 지칭하는 개념어였어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렇다고 ‘부랑인’을 배제하고 격리하여 가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나에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부랑인’에겐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폭력적이며 반인권적임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형제복지원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피해생존자들은 그 안에서의 피동적인 생활과 억압 때문에 87년 시설 폐쇄 이후 사회로 제대로 복귀하지 못한 채 떠돌아야 했다. 시설에서의 삶만큼이나 시설 이후의 삶은 결국 사회가 나에게 찍은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2차로 내면화하였는데, 피해자들 중 이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아존중감이 무너지고, 경제적 빈곤, 고립감, 화병, 우울증 등으로 인한 자살 시도나 끝내 자살에 이른 경우까지를 다 고려하자면, 형제복지원 사건은 87년에 이미 법적으로 판결이 끝나버린 과거의 일로만 머물 수는 없게 된다. 동시에 위선적이고 기만적이었던 한 나쁜 시설의 문제만도, 피해자 개인의 지독한 불운의 문제만도 아니게 된다. 당시 정권과 시설의 공생관계를 짚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 대중-시민사회가 ‘부랑인’이라는 상상적 개념의 양산과 확산에 기여한 공모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나오며
구분(부랑인 낙인)과 전가(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부당한 권력이 아니라 부랑인이라는 인식), 배제(시설 수용)의 맥락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이야기한 이유는, 사실 이러한 도식이 한국 사회에서 매우 도드라지는 특별한 경우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권력은 그것이 어떤 의도를 가졌든지 간에 권력 혼자만으로는 작동하지 못 한다. 또한 그러한 권력의 작동을 묵인하거나 공모하는 대개의 평범하고 두터운 지지에는 엉뚱한 과녁에 쏘아진 불안에 대한 책임 전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달 초 한 신문지상에 ‘87년의 세월호’라는 제목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이 소개된 것을 보았다.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과 현재 세월호. 두 사건 모두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으며 특별법 제정과 적용을 둘러싸고 국회와 갈등 중인 공통점이 있지만, 그보다 그 30년 사이에, 또는 각각의 사건들 전후로도, 한국 사회가 여전한 도식으로 구분하여 도려내어지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라는 사실은 마냥 부끄럽고 가슴 아파야 한다. 부끄럽고 아파야만 한다는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마땅히 겨냥해야 할 것에 제대로 눈뜨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