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연중 제11주, 6월 18일, 화, 마태오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찬미예수님
최재천 교수의 『숙론』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에서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다. 이걸 요즘 우리는 ‘토론’이라고 번역해 사용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토론은 서양의 discussion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심히 결연하다. 한때 〈백지연의 끝장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제목부터 자기모순이다. 토론은 끝장을 보려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결기로 충만해 토론에 임하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행위는 discussion 이 아니라 debate에 가깝다. Debate는 주로 ‘논쟁’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는 지금 논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토의discussion를 하자는 제안도 있다. 토의가 토론보다 어감상 덜 논쟁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좀 뜻밖이다.
나는 기왕에 너무 많이 오염된 용어인 ‘토론’대신 숙의(熟議) 또는 숙론(熟論)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개인적으로 숙론이 더 마음에 든다. 굳이 이에 상응하는 영어 표현을 찾으라면 나는 ‘discurse’를 제안하고 싶다. 영어권에서 discourse는 dialogue(담화)나 discussion(토론)의 좀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 serious discussion을 의미한다.”
최교수는 우리들에게 토론 문화의 상실을 우려하여 숙론을 통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하는 과정을 가지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우리 사회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5,44-45)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기도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옹졸한 마음에 하느님을 가두려고 합니다. 작가 이외수의 글중에 “좁쌀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하느님은 좁쌀만하고, 태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하느님은 태산만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좁쌀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태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단죄합니다. 좁쌀만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남과의 토론이나 숙론이나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마음과 귀가 필요합니다.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는 이상 토론이나 숙론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와 다른 뜻을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토론이 아니라 논쟁이 되어서 해결이 아니라 편을 가르는 현상을 보입니다. 편을 가르면서 상대방을 미워합니다. 들으려고 하는 마음, 남의 혜안을 내가 가지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내 뜻과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들을 때 우리는 조금 편하고 좋아지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무태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 찬미예수님
먼저 내마음을 열고 낮추어야
상대방의 말 뜻을 바르게 알아
듣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지혜가
생길 수 있는 혜안을 열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마음은 내가 열고 싶은 만큼만
열고, 제 눈에 색안경을 낀 채,
보이는 대로 보고 내린 결정 을
고집 하는것은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의견을 서로 주고 받아
서로간의 공통된 의견을 한데 모아
충분히 의논 한 숙론이,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 할 때,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말다툼으로 치졸한 언쟁에 빠져
있느라 , 배가 산위로 올라가 버리는
형국이 되어 버리는.것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 남의
말을 들을 줄 알때 ,서로간에 바른
의견 조율이 될 수 있을 것이니
먼저 , 내 마음을 비우고 열므로서
만이 상대의 마음을 받아 들일 수
있을 내마음의 빈 공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 마음의
문을 열고 좋은 것을 많이 받아들여
마음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
할 수 있기를 기도 드려야 겠습니다.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소통에 가장중요한것은 시느드정신에서의 경청이라 했습니다.
어릴때 할머니는 참 인자하고 우리말을 잘들어 주셨습니다.
막 흥분하여 빠르게 말하던 뭐라하던 끝까지 다 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매번 오이야 그랬구나.만 하셨지 논평은 한줄도 안한것 같습니다.
씩씩거리며 다 내뱉은 나에게 이제 좀 낫나?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았고 화가 풀렸고 내가 과했다는 생각도 가졌는데 그것은 나를 온전히 들어줌의 기적같은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일이든 할머니께 다 말하고 속 시원해 한것 같습니다.
주님께 저희는 원망도하고 피하고 숨기도 하며 투정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주님께서 다 받아 주시고 힘들제 하시며 자비로운 미소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끈임없이 사랑주심을 굳게 믿나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저희는 오직 감사하며 찬미 찬송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 저희도 닮아 사랑으로 소통하고 잘 경청하고 이해하고 일치 이루어 더불어 행복하게 하느님나라를 확장시키어 살게 하소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 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