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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복음서 안에 등장하시는 성모님은 참으로 말을 아끼십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아들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그저 성모님은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침묵과 기도가 일상이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는 억울한 일들을 꽤 많이 당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수태고지 사건 때,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는 요셉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을 물건너 갔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딱 한 사람, 연세가 들고 지혜로운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분의 영적 동반을 받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2-45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항상 부드러움과 신중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곁을 지키셨으니, 시련을 당할 때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믿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순간에 저희 손을 잡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39-56
‘사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사는 법
메릴린 먼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마지막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처럼 외롭습니다.”
사실 축하를 가장 많이 받는 생일파티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까지 들어온 친구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해수욕장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까지 누군가 들어와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까요?
내가 먼저 방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고 더는 살 의미가 없어 자살하려다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결국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영화 ‘오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살이었는데 이웃이 귀찮게 해서 도와주면서 자살을 미룹니다.
특히 새로운 이웃인 파르바네와 그녀의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오베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베가 여자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하는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늦은 나이에 나에게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가 몰고 있는 차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그 아이는 이웃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렇다고 무작정 방문하면 될까요?
성모님은 그렇게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땅을 점령하고 유배지에서 외롭게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나날이 번져 가지 않는가?
그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영웅들과도 다르며 성자들과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점령하는 게 아니고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참다운 방문은 나의 이익이 아닌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보험 판매원으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클레멘트 스톤이 자기 위주의 마인드에서 고객 위주의 마인드로 변화하게 된 구체적인 사건과 과정은 그의 자서전과 그가 남긴 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보험을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에게 보험 상품의 장점만을 강조하고, 때로는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객이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고, 판매 실적이 저조했습니다.
어느 날, 스톤은 한 고객에게 보험을 판매하려다 거절당했습니다.
고객은 “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팔고 있지 않아. 너는 단지 너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팔려고 할 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스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스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먼저 고객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진정한 성공의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 고객은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톤은 이 고객에게 고액의 보험 상품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상황에 맞는 소액 보험 상품을 추천했습니다.
농부는 스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했고, 결국 장기 고객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가장 비천한 이들과 사귀기 이전에 이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엘리사벳도 오늘 성모님께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방문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방문하지 않으면 방문 받지 못하고, 무조건 방문하면 그건 침범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행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방문하십시오.
그러면 사는 맛이 무엇인지 느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39-56: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신다. 마리아의 이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고,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에서도 제일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역이 좋았습니다. 구연동화 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한 번은 선생님께서 책의 어느 부분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제일 자신 있었던 책 읽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간신히 읽었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두려움이 제게서 언어를 빼앗았습니다.
제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믿지 못합니다. 지금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다시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사람들로 인해 치유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면서 사람들 곁을 떠나는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늘 놓여있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얻는 두려움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나 혼자 극복하기란 너무 힘듭니다. 의지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을 통해서이고, 지금과 다른 변화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성모님께서는 큰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부담이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편하고 쉬운 삶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 또한 뱃속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았고 이 아기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는 만나십니다. 분명히 배 속의 아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배 속의 아기가 서로 만나면서 그들은 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큰 어려움이 함께하면서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인 '꽃' 중에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이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차올라
늘
행복하다네.
불신과 교만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불행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세세대대로
영원히 이어진다네.
복음말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