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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선로추락사건 항소장 제출 기자회견이 22일 늦은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희망을 만드는 법 주최로 열렸다.
이 사건은 지난해 9월 14일 경기도 양주시 덕정역 승강장에서 김정민 씨(시각장애 1급)가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에 따라 반대편 선로의 열차를 자신이 탈 열차로 오인해 발을 헛디뎌 선로로 추락한 사건이다. 당시 양주역에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돼 있지 않았으며 안전요원도 없었다.
이에 김 씨는 지난해 12월 26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는 15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으나 김 씨는 이를 거부했고, 지난 3일 재판부는 한국철도공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나병택 소장(시각장애 1급)은 “나도 지하철 승강장에서 두 번이나 추락해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더 처참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라면서 “시각장애인에게 있어 스크린도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차단선인데, 이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법원은 150만 원에 그저 합의하라고만 했다. 이는 시각장애인을 무시한 행위”라고 규탄했다.
사건 피해자 김정민 씨는 “선로로 추락한 뒤에 사람들이 ‘저 사람 죽는다!’라고 소리를 치는 것을 듣고 승강장 아래 공간으로 간신히 몸을 굴려 피했고 열차도 바로 앞에서 멈췄다고 한다”라면서 “사고 직후 덕정역이나 한국철도공사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열차가 그냥 지나가도 무방했는데 우리가 멈추게 했다. 당신은 우리 때문에 산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만 들었다. 너무 화가 났다”라고 전했다.
김 씨는 “당시 입었던 부상으로 학교에 출석하지 못해 다니던 대학교에서 재적 처리가 되었으며, 그 사건 이후로는 스크린도어도 믿지 못해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하고 “2심 재판에서는 한국철도공사의 책임을 엄중히 묻는 재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이승철 연구원은 “시각장애인 선로추락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스크린도어 설치, 편의시설 설치, 안전요원 배치 등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계속 요구해왔다”라면서 “그러나 한국철도공사는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사고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돌리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또한 정의를 지켜주어야 할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마저도 사회적 약자를 외면했다”라면서 “앞으로 이 사건이 이렇게 판례로 남게 되면 시각장애인은 사고를 당해도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다. 사법부는 각성하라”라고 규탄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에서 “모든 것이 김 씨의 탓이고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철도공사의 항변에 재판부는 고작 150만 원에 합의하라는 화해권고결정을 내렸고, 액수를 떠나 장애인의 생명의 가치와 극심한 정신적 피해의 대가를 고작 150만 원으로 산정한 법원의 권고에 김 씨는 승복하지 않았다”라면서 “그러자 재판부는 ‘그것도 많이 챙겨주려고 한 것이었다’라며 다시 열린 재판에서 철도공사의 아무런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간단히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하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법원의 장애인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헤아릴 줄 모르는 미약한 인권의식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라면서 “담당 재판부는 단 한 번도 시각장애인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헤아리고자 하는 시도도 기울이지 않은 채 간단히 일반적인 사고의 과실비율을 산정하는 방식대로 판결을 선고하였고, 죽음의 목전까지 갔던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도 아무런 위자료도 인정하지 않았다. 과연 상식과 전문성이 있는 재판부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규탄했다.
이번 항소심은 시각장애인당사자인 공익변호사 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재왕 변호사가 변론을 맡기로 했다.
한편 2003년 5월 송정역, 2004년 11월 이수역, 2008년 7월 제물포역, 2010년 8월 주안역, 2012년 12월 부전역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선로로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덕정역의 경우에는 김 씨의 사고가 발생하기 3개월 전에 시각장애인 2명이 동시에 추락해 그 중 한 명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