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성령이 불꽃 모양으로 갈라지면서 각 사람들 위에 내린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는다. 성령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통교하며 일치를 이룬다(제1독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께서 주신 은총 덕분이다. 자신이 어떤 신분이든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게 된다(제2독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신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의 ‘사랑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의 상처를 보여 주시며, 사랑이 어떤 고통이나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곧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 곁에 다가온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의 먼지’로 빚으셔서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창세 2,7 참조).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창조의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의 숨결’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의 먼지가 숨 쉬는 인간이 되었듯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으로 흙의 먼지와 같은 존재가 주님 사랑을 새롭게 숨 쉬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비록 잘난 척하며 살고 있어도 그야말로 흩날리는 ‘흙의 먼지’입니다. 그저 주님의 사랑으로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이지요. 주님께서 숨 한 번 거두어 가시면 먼지로 흩어지는 존재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을 호흡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살아 있어도 생명이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리스 존델은 성령께서는 ‘성삼위의 경배하올 신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히 만나는 사랑의 불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불꽃은 우리가 숨 쉬는 사랑의 호흡으로 불꽃을 일으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주님 사랑의 숨결을 느끼고 더욱 사랑의 불꽃을 일으키는 날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로 부활 시기는 끝납니다. 부활 성야에 ‘빛의 예식’으로 제대 주위를 밝히던 부활초도 이젠 거두어들입니다. 부활초는 세례대 옆에 보관해 두었다가 세례 예식 때 영세자들의 촛불을 거기서 붙여 주게 됩니다. 세례성사는 다시 태어남이고 또 다른 부활이기에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듯이,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시어 그들의 새 출발을 도와줍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소명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렇듯 변화의 방향은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는 성령’이나 ‘예수님을 제외시킨 성령의 활동’은 성경의 내용이 아닙니다. 어느 날 제자들은 돌변합니다. 내적 힘을 지닌 사람으로 바뀝니다. 죽음도 겁내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그렇게 바꾸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도 삶의 변화를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험난한 현실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기도를 바치는 날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가장 좋은 위로자
-박용식 신부-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을 얻으려고, 더 큰 행복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물질에서 행복을 얻으려던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나 힘, 명예나 쾌락 등에서 행복을 찾던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했고 건강에서 행복을 얻으려던 사람들도 건강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더 나아지고 싶고 더 행복해지고 싶은 데 잘 안 됩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나약한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특히 기적 같은 독특한 신앙체험이 있으면 신앙심이 더 깊어질 수 있고 행복도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학교 어린이 한 명이 꿈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답니다. 갓 영세한 신자 한 명은 꿈에 성모님을 보고는 확고한 신앙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딱 한 번만 보았으면,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예수님 목소리를 딱 한마디라도 들어본다면,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져볼 수 있다면, 먼 발치에서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 번 만져보았으면 신앙심이 더 깊어질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손으로 만져보고 예수님 얼굴을 두 눈으로 보고 예수님 목소리를 귀로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더 잘 믿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자그마치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수없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무수히 만져보고, 수 천 번도 넘게 예수님 말씀을 똑똑히 들었지만 신앙심이 깊어졌던 것도 아니고 삶이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지식이 풍부하고 신앙체험이 많으면 더 깊은 신앙심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제자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자들만큼 많이 알고 많은 체험을 한 사람들도 없지만 그들처럼 형편없던 신앙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놀랍게 변했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을 예수님한테 직접 듣고도, 그 놀라운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고도,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변치 않던 완고한 마음이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의심 없는 믿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이 알고, 많이 체험한다고 해서 신앙심이 깊어지고 행복이 커지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신앙심을 깊게 하거나 행복을 더 크게 만들어 가는데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지식과 체험, 노력이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데는 별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태산같이 믿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자 제자들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서 다락방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불혀 모양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뜨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180도 변했습니다. 겁쟁이에서 용감한 자로, 불안에 떨던 마음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지근한 믿음에서 확실한 믿음으로, 고통에 짓눌린 찌든 삶에서 기쁨에 넘치는 은총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더 나아지려하고 더 행복해지려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잘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 옷자락을 만진다고 해도 그 자체로 신앙심이 더 깊어지거나 행복이 더 커지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지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0년 전 사도들에게 내리셨던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틀림없이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성령송가 중에서)
“성령을 받으십시오”
-최인각신부-
주님이 주신 선물 “성령”
녹음이 짙어가는 예수성심성월의 한복판, 자연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시기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며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는 장면’을 묵상하며,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성령 강림을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과 ‘성령 강림’은 서로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찾아가신 바로 그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더 나아가 새롭게 형성된 믿음의 공동체에서 계속될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장차 전개될 삶의 현장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그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던 방식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함께하는 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 제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는 영,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에 용기를 주는 영, 두려움을 없애주고 희망을 더해주는 영,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영, 평화를 전해주는 영으로서,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불의와 부정, 밑도 끝도 없는 폭력과 전쟁, 이를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조정하는 집단들에 의해 두려워 떨고 있는 약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친히 친구가 되어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불신앙으로 인해 저질러진 상처와 아픔, 파괴와 죄들로 말미암아 굳게 얼어버린 영혼들을 녹이기 위해 불과 같은 성령을 내리십니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불의와 부정, 폭력과 전쟁, 가난과 기근, 파괴와 죽음, 집단적 이기주의와 불신앙을 조장하는 이들의 회개를 위해,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탄식하시며 간구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서로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세상,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생명 경시 풍조,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진 자유 민주주의, 가장 가까운 이들 안에서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신이 가득한 곳에 신뢰를 심어주시고, 서로의 사랑을 키워주시며, 행복이 깃든 삶의 터전이 되도록 행복과 기쁨의 영을 내려 주십니다. 그리하여 서로 믿어주며 행복이 싹트는 가정, 서로 신뢰가 바탕이 된 사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으며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숨결로’ ‘바람으로’ ‘비둘기 모양으로’ ‘얼로’ ‘불의 모양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성령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의 용서와 상처의 치유를 위해 그 어디든 찾아 나서십니다. 특별히 이웃과의 용서와 화해는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 공동체성은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이고, 또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로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죄를 없애고 용서를 이끄시는 영,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고 화해하도록 하는 영,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와 성장을 원하시는 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룩되도록 끊임없이 활동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부(新婦)로 삼으신 교회가 갈등과 반목으로 갈라진 것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서로를 갈라놓는 악마와 싸워 이기도록 당신 영의 갑옷을 입히고, 성령의 투구를 씌우고 성령의 칼로 중무장시켜주기 위해 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러운 영에 의해 휘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어, 두려움 없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졸지도, 잠들지도 않고 지켜주시는 영이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예수님처럼 전적으로 우리를 향해 계신 분이며, 한없이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탄식하시며,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르기를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받아들인다면, 그 영혼은 행복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평화는 용서의 무대 위에 올려지는 연주곡”
-권철호신부-
노란 프리지아가 아름다운 것은 하얀 안개꽃과 함께하기 때문이고 제주 유채꽃이 선명한 빛깔로 다가오는 이유는 검붉은 현무암 돌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듯, 삶이 아름다운 것은 상처가 미움의 덫에 갇히지 않고 용서의 커튼을 드리우기 때문이고 높고 견고해지는 폭력의 장벽에 평화의 햇살을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에도 길이 있듯이 종잡을 수 없는 마음에 성령은 용서와 평화의 햇살로 특별한 은총을 친근한 일상이 되게 합니다. 미움과 폭력이 삶의 잔혹한 변주곡이라면 평화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무대 위에서만 올려지는 연주곡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맨 처음 말씀하신 것이 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평화와 용서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평화와 용서는 성령의 이끌림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왜 평화와 용서를 연결시켜 놓으셨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평화는 행복의 마당이고 용서는 그 마당에 들어서는 대문이지만 성령의 인도 하심 없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정의라는 이름 아래 보복을 꿈꾸고 사랑과 자비의 환상만 심어준 채 창살 없는 감옥에 우리를 가두려 합니다. 용서라는 열쇠는 사용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늘을 향해 평화만 달라고 기도합니다. 평화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선물이지만 과거에 묶여져 있는 마음이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주어지는 현재의 축복이고 나만이 사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시는 분”(마태 18, 20)이시기에 평화와 용서, 사랑과 자비라는 나라는 늘 ‘함께’라는 말을 떠나서 생각되어질 수 없습니다. 삶이 평화롭지 못하고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늘 ‘함께’가 아니라 ‘나만’이라는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은 자신만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만의 두려움에 함께하기를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오늘도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혼자는 할 수 없지만 성령과 함께하면 쉬워지는 것이 용서이고 혼자는 누릴 수 없지만 성령과 더불어 함께하면 누릴 수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 삶이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며, 질시 끝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임을 안다면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성령을 맞이하는 것이 그리 버겁지만은 않을 겁니다.__
저 어렸을 때에는 머리 이발을 하기 위해서는 꼭 이발소에 갔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미장원이 훨씬 예쁘게 자른다고 데리고 가려고 하면 도망 다닐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장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이발소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색합니다. 남자들도 대부분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며, 또 워낙 이상한 영업을 하는 이발소가 많다보니 이발소에 들어가는 저를 수상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쇼핑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대부분 자매님들로 가득한 슈퍼마켓에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남자 체면을 깎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 말고도 다른 형제님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시식 코너도 꼭 들려서 맛을 보는 등 오히려 쇼핑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예전에는 어색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혼자 극장가서 영화 보는 일,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기, 자매님들로만 가득한 곳에서 강의하기, 몸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옷을 입고 자전거 타기 등등……. 처음에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어색한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겪는 부끄러움과 어색함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별 것 아닌 것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열등감, 자신 없는 모습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열등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앞으로 헤치고 나아가는 자신감 넘치고 포기하지 않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요.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모든 자신감을 잃어서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전해주셨고, 그 결과 그들은 서로 통교를 하며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감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우리들은 더 큰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의 등불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다.(탈무드)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와 소통
-안승태 신부-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자 사도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지만 세상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듣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교만으로 인해 서로 분열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게 하여 하나로 모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회복된 평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 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성령은 온유하신 당신의 영, 마음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살로 된 마음, 새 영’인 것입니다. 주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평화를 누립니다. 주님의 마음과 맞닿아 있기에 온유하고 관대하며 다른 이들의 죄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두려움의 상황이 우리를 힘겹게 하더라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이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 주님의 영에 힘입어 우리도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평화와 용서의 선물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깊은 숨을 불어넣으시어 낡고 지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의 모든 발현사화와 마찬가지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도권을 취하시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 !”) , 이어서 제자들이 부활신앙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줌) , 사명이 주어집니다 (성령강림과 죄의 용서를 위한 성령).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장소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이어지는 구절로 봐서 아마도 토마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가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다.’ 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잠겨 있는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유다인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보다는 예수님이 이렇게 기적적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데에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분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시는 분” 입니다. (마태 18, 20)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힌 발이 아니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군사들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요한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요한 19, 31 – 37)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손이 못 박히고, 군인들의 창에 옆구리가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신 바로 그분입니다. 이 지상에서 살고 사랑하고 고통당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나자렛 예수와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는 같은 분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것을 깨닫고 기쁨에 찹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넘치는 기쁨을 자아냅니다. 예수님이 기쁨에 넘치는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라는 말은 앞으로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 성령의 선물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의 위임을 생각할 때 제자들에게 적절한 인사말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선물 (갈라 5, 22) 이자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귀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 21)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부활사건은 제자 파견과 연결되지만 (마태 28, 16 – 20; 마르 16, 15 – 20; 루카 24, 44 – 49; 사도 1, 7 – 8 참조)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20, 22) 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제자 파견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4, 35 – 38; 13, 19 – 20 참조)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창세기에 표현된 하느님의 창조행위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은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이 넘치는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제자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태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며 죄의 용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죄의 용서 안에는 성령이 현존한다는 신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간이 하느님의 숨결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받아라.’ 는 말은 사도 2, 1 – 4에 언급된 성령의 선물이나 성령강림과 같은 의미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시제로 묘사된 그 사건은 요한복음서의 다른 구절들을 살펴볼 때,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카의 성령강림과 동등한 요한의 성령강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성령강림과 부활은 서로 일치합니다. 보호자인 성령과 부활한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 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다섯 가지 약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 14, 16 – 17. 25 – 26; 15, 26 – 27; 16, 7 – 11. 12 – 15) 오늘 말씀에서 성령과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이 같이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된 죄의 용서에 대한 선포 그 이상의 의미를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죄의 용서가 행해지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죄의 용서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오는지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강림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교회의 성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날입니다.
묵상 (Meditatio) 주님, 저의 메마른 마음 안에 온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살처럼 부드럽고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의 대지처럼 만드소서. 식별의 선물이라는 비에 흠뻑 젖게 하시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인내와 성실의 영을 주시어 제가 하는 일이 당신의 구속 사업의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믿게 하소서.
기도 (Oratio)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오소서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오소서 은총의 선물을 주시는 분, 오소서 마음의 빛이시여. (성령 송가)
내쉼과 들이쉼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아담이 숨을 쉬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숨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이 우리의 목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숨이 성령이고,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숨인 성령이 끊어지면 우리의 목숨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늘 하느님과 숨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어지면 죽습니다.
“사람들은 숨 쉬는 것에 대해 아예 생각조차 안하죠. 그러나 산소가 희박해지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면 산소와 호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겁니다. 하긴 저도 이렇게 되기 전까지 호흡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깊은 호흡으로 폐활량을 늘리고 꼭 금연하세요.”
제가 아는 한 형제님이 한 잡지와 인터뷰를 하며 한 말입니다. 폐가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늘 산소 호흡기를 끼고 살아야 하는데, 산소가 떨어지거나 산소통과 연결된 줄이 끊어지면 죽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 형제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깊은 호흡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한숨만 폭폭 내쉬지 깊은 호흡 또는 심호흡을 하지 않습니다.
왜 심호흡을 하지 않고 한숨만 폭폭 내쉬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심호흡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거지요. 안에 안 좋은 숨, 그래서 오히려 내보내야 할 독가스가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할 때,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할 때, 그래서 마음이 불안할 때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조차 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졸이다가 한숨을 몰아서 내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호흡을 하기 위해 이렇게 크게 내쉬셔야 합니다. 안에 있는 안 좋은 숨인 독가스들을 다 내보내고 하느님의 숨을 크게 들이켜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내보내고 하느님의 숨을 들이키면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쉼과 들이쉼을 의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의식하지 않고도 크게 내쉬고 크게 들이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위 눌리듯 세상 것들에 눌려 숨 한 번 제대로 못 쉬니 마음먹고 속의 것을 비어내고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숨을 크게 들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보하여 마음먹지 않고도 이런 깊은 호흡을 늘 그리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호흡, 그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깊은 호흡, 그것의 우리의 성령맞이이니까요!
하느님의 숨인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코앞에 내려와 계십니다. 들이켜 맞이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우리 한 번 깊은 호흡 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이 물건 정말로 끝내주는데.”라면서 물건을 먼저 산다면, 너도 나도 덩달아서 물건을 사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는 용기가 없어서 먼저 사기보다는 따라 사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소위 ‘바람잡이’가 동원되곤 하지요. 이렇게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바람잡이’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잡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난 달 성지순례를 다녀온 뒤에 체중이 3Kg이 증가했습니다. 하도 먹어서 그렇겠지요. 그런데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저와 동행했던 ㅈ신부는 자그마치 5Kg이 증가했거든요. ㅈ신부는 여행을 다녀온 뒤, 체중계 올라간 뒤에 눈물이 나오더랍니다. 자기 평생에 있어서 최고의 몸무게, 즉 ‘89'라는 숫자에 바늘이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ㅈ신부는 그날부터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저께 아침, 드디어 일주일 만에 5Kg 감량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와의 간격이 거의 나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제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ㅈ신부보다는 몸무게가 조금 나갈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이대로라면 역전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역시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커피는 크림과 설탕 넣지 않고 무조건 블랙으로, 밥은 최대한 천천히 식사하기, 술은 최대한 자제하고 마시더라도 안주는 절대로 먹지 않았지요. 물론 입에서는 ‘뭐 좀 넣어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ㅈ신부에게 추월될 것이 두려워서 꾹 참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체중 조절하는데 있어서 ㅈ신부는 저에게 있어서 바람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잡이의 모습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주님의 바람잡이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주님의 바람잡이는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바람잡이 말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바람잡이보다는 세상의 바람잡이에 더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장삿속이 보이는 바람잡이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주님의 바람잡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부활하신 뒤 오십일 만에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내렸지요. 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변합니까? 두려움이 가득하는 등 제자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습들이 성령을 받은 뒤, 자신감이 넘치고 예수님께 충실한 참 제자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세상의 바람잡이가 아닌, 주님의 바람잡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성령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받았습니다. 세례 때에 그리고 견진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주님의 바람잡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유의지를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스스로 하려는 노력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 자신을 개방하여 이웃을 위하여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성령의 놀라운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성령께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가요?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그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도 들어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충실한 주님의 바람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바람잡이가 됩시다.
“성령을 받아라.”
-양승국신부-
<기도와 비례하는 성령의 활동>
돈보스코 성인이 창안한 ‘예방교육’의 핵심은 교사가 청소년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소년 사이에 교육자의 능동적 현존’입니다. 이태리어로 'Assistenza'라고 합니다.
돈보스코께서는 틈날 때 마다 살레시안들과 교사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청소년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절대로 청소년들끼리만 두지 마십시오. 교육자가 잠시라도 자리를 떠날 때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놓고 가십시오.”
돈보스코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청소년 교육 사업이 확장일로의 길에 접어들면서 자주 토리노의 ‘오라토리오’를 떠나 먼 여행길을 떠나곤 하셨는데, 그때 마다 그렇게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신을 대신할 다른 누군가를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래도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 양육 때문에 고생이 많으실 젊은 부모님들도 많이 느끼실 텐데, 사실 아이들만 있게 될 때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극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던 돈보스코,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에 목숨을 걸었던 돈보스코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때면 다른 보호자, 협조자를 파견해놓고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떠나가지 않으셨습니다. 노심초사하시면서, 근심걱정하시면서, 그렇게 떠나가셨겠지요.
그리고 돈보스코처럼 당신 대신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해줄 존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예수님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우리 각자에게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로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협조해주시고, 결국 최종적으로 구원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후, 그분 대신에 우리에게 오신 성령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말씀 안에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경의 깊은 뜻을 깨닫게 도와주시며, 복음을 생활화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혼 안에 충만히 현존해계십니다. 특별히 삶의 중요한 여러 단계 안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세례성사 때,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나 신품성사 때...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보통 우리는 평소보다 더 순수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비웁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기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영혼 안에 성령께서는 더욱 왕성히 활동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은 겸손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자신을 비우는 영혼 안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반대로 자만심, 우월감, 자기중심주의로 가득 찬 영혼 안에 성령의 활동은 미미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비참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 혼신을 다해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는데, 그 응답이 바로 성령 강림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도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그들이었는데, 그토록 나약하고 게으르고, 사심 많고, 타성에 젖은 그들이었는데, 사람들이 확 바뀌었습니다.
용광로처럼 활활 불타오르는 열렬한 신앙인,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순영이처럼...
-오상선신부-
언젠가 굿뉴스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올라왔다.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너절한 행색에 냄새마저 나는 부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주인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은 그때서야 그들이 구걸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어, 아저씨! 순대국 두 그릇 주세요."
주인은 다른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돈을 못 받을지도 모른는 그들에게 음식을 내준다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은 손짓을 하며 아이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거든요."
주눅 든 아이는 잔뜩 움츠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다 말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다.
"알았다. 그럼 저쪽 끝으로 가서 앉아.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화장실이 바로 보이는 맨 끝자리로 옮긴 부녀에게 순대국 두 그릇이 나왔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순대국이야.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께. 잠깐만 기다려."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통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떠서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순영이 너도 어서 먹어라. 어제 저녁도 못 먹었잖아."
"나만 못 먹었나뭐,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어. 어서 밥떠, 아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아빠는 조금씩 손을 떨면서 국밥 한 수저를 떴다.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밥을 다 먹은 아이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넉 장과 동전 한 움큼을 내놓았다. 주인은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정성을 봐서 재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핑게를 대며 이천 원만 받았다. 그리고 사탕 한 움큼을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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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창립일이자 생일날이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생일을 맞이한 순영이 아빠의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외형적으로 우리 교회는 순영이 아빠와는 달리 아주 화려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장님과 다름없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순영이 같은 마음을 지닌 착한 영혼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들이 오늘 아빠인 교회를 위해 생일상을 준비하고 온 맘으로 축하를 드리려 한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비록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비틀거린다 하더라도 순영이 같은 영혼들이 이 교회의 삶을 아름답게 비추어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내리소서. 무엇보다도 순영이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게 따뜻한 마음을 주소서.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보다는 따뜻한 말을 전할 줄 아는 능력을, 치유의 능력보다는 영육으로 병든 영혼을 감싸 안을 줄 아는 능력을, 화려한 열광으로 기도하기보다는 조용히 당신 말씀을 음미하며 기도할 줄 아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 교회를 순영이처럼 우리 신자들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교회가 그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참된 회개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소서. 무엇보다 일치와 친교의 영을 내리소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형제자매로서의 정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소서.
오늘 로마에서 우리 프란치스칸 가족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낸다. 성령을 우리 수도가족의 실질적인 총장으로 모시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바로 순영이 같은 맘으로 교회의 탄일을 경축한다.
-작은자-
오늘은 부활시기의 마지막 날이자,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50일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몸을 숨기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聖靈)’이라는 말마디를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립니다. ‘성령(聖靈)’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 의 3번째 위격으로서, 모든 기도 때마다 우리가 입으로 소리내어 표현하는 친숙한 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여러 번 말로 표현하고, 또 듣는 ‘성령’에 대하여, 기도를 제외한 시간에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친숙한 분을 현실의 삶 안에서 어떻게 체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이 어떠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부 하느님만을 유일한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유다인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그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 또한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성령’이라는 분을 몸으로 체험하고, 성령 또한 하느님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여러 번 들어 왔고, 또 믿을 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번째 위격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초대 공동체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그 분 또한, 우리의 삶 안에서 만나고 체험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의 본질은 성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리고 성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성자 하느님께서는 죄(罪)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이 세상을 해방시켜 구원 곧 생명을 주시고자 인간으로 오셨고, 그 말씀과 행적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명을 주시려는 성부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 하느님 역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께서 하시는, 생명을 주시며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곧,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령의 여러 활동들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생소하고 신비로운 어떠한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령은, ‘생명(生命)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靈)’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사야서에 언급되어 있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여러 은사들, 그리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 모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활동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되게 하시고,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시도록 겸손되이 청하도록 합시다. 동시에, 우리 자신도, 스스로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또한 공동체 전체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살리는 일’을 하도록 합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배광하 신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아담이 했다고 창세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어찌 따 먹었느냐고 추궁하시자, 아담은 사내답지 못하게 하와를 고자질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둘이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루었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제 탓이오’가 아닌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은 끊임없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극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같은 삶의 끝은 육과 영이 함께 죽는 죽음의 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끊임없는 몸부림 속에 깨닫는 것은, 결국 수렁의 깊고 깊은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가련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은 깊은 수렁 속에서 비로소 한 줄기 빛을 만나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이셨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하느님과 갈라졌던 분열을 다시 이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성령과의 일치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삶이셨습니다.
천사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으신 성모님께서 믿지 못하시자,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 35).
예수님의 탄생, 세례, 광야의 생활, 갈릴래아 전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그분의 전 생애에는 늘 성령께서 함께 하셨던 삶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갈라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예수님 안의 성령께서 하나로 일치시켜 주셨기에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 6)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 13).
모든 사회적 계급과 인종과 사상이 벽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놀라운 힘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분열의 역사에 또다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청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되는 삶이 생명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인간의 허망한 노력으로 하나임을 꿈꾸었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특별히 인류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에서 대제국이 완력으로 일치를 이루고자 했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제국들이 시도했던 언어의 통일도 끝내는 치욕의 역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제자들의 말은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전쟁과 폭력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하느님 위업의 찬양을 자기들의 언어로 듣고 있다고, 통일된 언어로 들었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사도 2, 1~11).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그토록 꿈꾸었던 지상낙원이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 노력으로도 불가능 하였던 일치와 나눔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된 초대교회 신자들은 진정 잃어버린 옛 낙원을 지상에서 되찾았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 44~45)
그렇기 때문에 인간 창조의 첫 순간,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성령)을 불어넣으셨던 것과 같이(창세 2, 7)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시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불과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타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자들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던 죽음의 두려움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거침없는 희망 속에 복음을 살았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오늘의 세상을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진정 생기가 사라지고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는 오늘의 신앙에 뜨거운 불의 성령께서 다시금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기양 신부-
알코올 중독자로 평생을 폐인처럼 산 아버지를 둔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는 아버지의 술 마시는 처절한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지요. 세월이 흘러 첫째 아들은 커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반대로 금주주의자가 되었지요. 상담 심리학자가 두 사람을 상담하면서 따로따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금주주의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형은 환경이 자신을 삼키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동생은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물론 동생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닫아걸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이 달라지지요.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인들 앞에서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모습으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달변에 놀라고 감동되어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가 오늘 제1독서에 나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성령 강림이지요.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은 인간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함께 하셨습니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합니다. 마리아가 깜짝 놀라 묻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천사는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예수님의 탄생 자체, 즉 처녀 잉태라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성령께서 가능하게 해 주셨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 강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과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면서 약속해 주셨지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그 성령이 오늘 제자들에게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사도로 변화되어 복음 선포의 열정에 온 몸을 불사르게 되지요.
바오로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라고까지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핵심인 칠성사는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될 뿐만 아니라 사제는 봉헌 예물 위에 두 손을 올리며 기도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성령, 교회의 생명이신 그 성령께 내 삶을 이끌어주기를 청하며, 성령 안에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허 성 신부
“오소서 성령님, 저희 안에 머무소서!”
오늘은 다락방에서 성모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던 사도들 위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께서 강한 태풍과도 같은 하느님의 숨결을 동반한 불혀 모양으로 그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충만해진 사도들은 그동안 불안에 떨며 잠갔던 다락방의 빗장문을 열고 용감하게 밖에 모인 군중들 앞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오늘은 그때 그날 30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품으로써 교회를 탄생시켰음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구약의 시대를 성부께서 주로 활동하신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공생활 시대는 성자께서 주로 활동하신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는 성령께서 주로 활동하시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얼, 혼, 기운, 숨결)으로 표현된 성령께서는 태초의 창조사업에도 참여하셨고(창세 1, 2),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일꾼(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여러 예언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일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영이신 성령을 받아 예언자로 활약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앞으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일할 구세주의 출현을 예고하였고(이사야 11장), 요엘 예언자는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 줄 날이 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요엘 3장).
구약에 예언된 구세주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잉태되어 나신 천주 제2위이신 성자 예수께서 공생활 시작전에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 악마의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마태 3~4장). 또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예수님은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태 12, 28).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마르 1, 8)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시어 오순절날 함께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1~2장).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고 힘있게 복음을 전파하며 놀라운 일과 기적들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보편적이었던 성령의 은사는(사도행전, 고린토1서 12장) 그동안 교회안에서 수많은 성인성녀들을 통해 끊임없이 교회안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일반 신자들 사이에는 거의 사라졌던 것이 20세기 들어서 다시 초대 교회처럼 일반 신자들도 성령의 여러 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능력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이 살아 계신 분이며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체험하고 있으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도 더 깊고 친밀한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도움심으로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더욱 깊은 기도생활로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에 맛들이고 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임을 체험하기에 전보다 더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힘쓰며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상한 언어의 은사,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여러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같은 성령의 열매를 전보다 더욱 많이 맺는 생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고 계십니다.
1967년 2월, 미국의 듀 케인 대학에 다니는 가톨릭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성령쇄신은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지금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전파됨으로써 교회 역사상 가장 빨리 세계적으로 전파된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한국에 들어온 성령쇄신운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교황 요한 23세께서 『오소서 성령님, 이 시대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서공석 신부-
성령강림 대축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남은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집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 안에 남겨 놓은 것이 말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역사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당신 안에 일하시던 성령을 사람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복음과 제1독서에서 들은 이야기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과 더불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고한 당신의 삶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마태 1,20)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도 세례를 받고 성령이 당신 위에 내려오시면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같은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성령을 받아 시작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사신 숨결이었습니다. 창세기(2,7)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된 인간 모상에다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용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화법입니다. 성령은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부정적으로 한 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화법입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벌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악한 마음이 상상하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선한 일을 합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가 11,11) 주지는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루가 6,36) 스스로도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살리고 고치며 인간이 당신의 자비를 배워서 자유롭게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셨다.”(사도 10,38)는 기억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것이었다는 믿음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베싸다 못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소개하기 전에 두 폭의 그림을 그 서론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들은 성령강림의 그림입니다. 사도들이 복음 선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떠나가셨고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그림에 성령이 강림하신 장소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입니다. 때는 해방절 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드는 오순절을 택하였습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소중히 기념하는 해방절 다음 50일째의 날입니다. 보리와 밀의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이 날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장면에 나타나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은 구약성서의 탈출기(20,18)가 하느님이 발현하셨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한 표상들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란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기원을 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 같이 전파되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군중은 사도들이 자기네 지방말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을 위해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인류는 언어가 서로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 예수 한 분 안에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민족들의 언어 차이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령은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서로 간에 장벽을 만듭니다. 민족과 문화의 차이가 있고, 출신지역과 직업의 다양함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와 다양함은 인류의 풍요로움을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을 위한 장벽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도 우리는 그것을 상호간의 장벽과 차별의 구실로 삼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봉사가 있어서 풍요로운 것이지만, 우리의 좁은 마음은 그 다양함을 성령과 결부시켜 하느님이 만드신 차별이라 믿어버립니다.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성령을 인간 차별의 주범으로 삼는 신심 운동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장벽과 차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숨결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 안에 살아계셨고 또한 예수님을 배우는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녀 됨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보여주신 용서를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이런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발생하는 죄를 하느님의 용서로 극복하면서 하느님 자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삶이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 곳곳에 복음을!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임을 깨닫고는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힘차게 전하여,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1. 인간에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합천 본당에서 첫 사목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교리 반에 잘 나오던 40대 부인이 2주 째 교리 반에 결석을 하였다. 사정을 알아본즉, 죽은 시어머니 귀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 신(神)기운이 돌면 완전히 죽은 시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신기(神氣)가 돌아서인지 목소리도 시어머니 목소리로 변했고, 촌수도 바뀌어서 시아버지를 보고 '여보!'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남편을 보고는 '야, 이놈아'하면서 어머니 행세를 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갑자기 "신(神)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神) 내림 굿'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神)이 내려 무당이 되는 사람을 강신(降神)무당이라고 한다. 어쨌든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잡신(雜神)이 내리면 무당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이 내리면 그리스도의 영(靈)에 사로잡힌 참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 1독서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시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개교(開敎)기념일이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다락방에서 무서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오순절 축일에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을 받아 가르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위에 성령이 쏟아 부어짐으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워진 사도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 이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도 또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를 통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12,3)고 하신다.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백성,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3.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전파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그 기쁨과 평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의 공동체인 것이다. 제 2차 바디칸 공의회도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 고 선언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무덤에 가두어 놓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한 사람도 교회에 인도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새 순(筍)이 돋아나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고 냉담자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 사도들로 하여금 생명을 바쳐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그 성령의 활동이 더욱 아쉬운 때이다.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벌였던 '쉬는 교우 찾기'와 '새 교우 찾기' 실천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시는 주님의 명령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명령을 잊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있는 신자이다. 나는 살아있는 가지인가?.................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예수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습니다. 다음은 분명 자신들 차례라고 여겼습니다.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뵈었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들이닥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엊그제 장사 지낸 분이 막달레나 말대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에 서셨습니다. 돌무덤을 열고 나오셨듯이 닫힌 문을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현존하십니다. 인간의 차원을 극복하고 뛰어넘으셨습니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어디에나 두루 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닫힌 문을 여셨듯이 닫힌 세상을 여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영적인 몸’(1코린 15,44; 필리 3,21)을 지닌 분이십니다. 예수님 몸소 문 밖에서 문을 뚫고, 죽음 저편에서 죽음을 건너 이리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고별 만찬 때도 평화를 이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14,27) 평화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뚫고 성취한, 부활과 승리의 참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모든 갈등을 풀어갈 것입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20절).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몸을 지니셨습니다. 온갖 수모와 고생을 다 겪으신 바로 그 몸, 그분이십니다. 부활은 희뿌연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세상의 갈등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ㄴ절) 그들은 주님을 뵈었습니다. 공포의 분위기가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4,18-19),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ㄹ)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를 그들은 보았습니다. 제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목격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들뜬 분위기에 젖어 있지 않으시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당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요한 신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파견되셨습니다. 당신의 사명을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아버지께 파견되셨듯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무력한 그들이 그냥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지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라.”(22ㄴ절) 이미 최후 만찬 때 하신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15,26) 진리의 영이신 분이 제자들의 보호자로 나서십니다. 성령을 주시기 위해 ‘숨을 불어넣는 것’은(22절) 생명을 주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신 것과 같습니다(창세 2,7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새 생명을 얻어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그분께 직접 파견되었으니 제자들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권한도 제자들에게 함께 주어 보내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요한은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결실은 용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는 일과 연결됩니다.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도 화해와 참회·용서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령을 받아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매고 푸는 엄청난 권한이 교회 공동체에 주어집니다. 선물인 동시에 소명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제자들의 소명이 되었고 예수님의 일이 제자들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성령을 받은 이라면 용서를 실천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공동체라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공동체는 평화를 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령을 이어주는 마지막 소명을 완수하십니다. 전에도 몇 번이고 예고하셨던 성령, 그분을 당신 온몸으로 전해 주셨습니다. 살아 있는 숨으로 오신 성령은 풀 죽은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먼 길 떠나는 제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은 용서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결단이 모두를 위해 공평하게 나눠지는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1코린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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