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성당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리아 신앙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됨으로
여기 참고 자료를 올립니다.
성모 마리아 신앙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금단의 과일을 따 먹자 여호와는 이런 처벌은 내린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할 것이니, 너를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니,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이브와 아담이 지은 죄는 ‘성행위’이다. 유대인은 남신 여호와를 믿으면서, 여신을 신앙하는 토속민과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토착민에게 성행위는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축복이다.(신성한 결혼 의례-춘제) 유대인은 토착민의 종교에 대립각을 세워야 했으므로, 성행위는 축복이 아니고 단순히 쾌락 추구에 불구하다고 깎아내렸다. 그렇더라도 마리아는 성행위-임신-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그들을 구원하러 올 구세주인 예수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농업 정착민의 가슴에 깔려있는 민간신앙은 모신을 신을 잉태하여 출산한 ‘신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민간에서는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알았고, 신과 동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신격으로서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마리아에게 아주 적은 분량만 할애하였다. 마리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으며, 장례는 어떻게 치루었고, 어디에 묻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인류 최초의 미술작품이랄 수 있는 구석기 미술작품(주로 조각품)에는 거의가 여인상이다. 이 사실은 인류 최초의 신은 여신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고대문명 발생시기(약 5000년 전)는 여신 신앙 시대임을 강하게 말해준다. 여신은 생명의 탄생을 관장하고, 농작물 수확도 관리한다.(식물의 탄생(씨뿌리기)과 죽음(수확)을 관장한다.
후대로 오면서 여신은 남신으로 교체한다. 구약이 시작하는 시기로, 기원전 2000년 경이다. 한 순간에 교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을 두고 서서히 일어난다. 여신 신앙이 점점 힘을 잃고, 남신 신앙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양식으로 일어난다. 그 과정이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관계로 나타난다. 예수의 권위가 높아지고, 이교도 여신은 푸대접을 받는다. 로마 시대의 민간신앙에서 여신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였다. 기독교에서 마리아를 신으로 대접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양 회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가 ‘수태고지’이다. 누가 복음 1장에 이렇게 썼다.
“천사가 말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마리아여.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지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유대의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구약의 이시야 서에 이렇게 나온다.
“주님께서는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경을 신화적 사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이미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한다.) 유대의 선지자는 구세주가 다윗의 가문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이 말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맞추어서 쓸 필요가 있다. 다윗이라는 인간 가문의 후손이어야 하고, 사람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야 한다. 마리아가 사람으로, 여자임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임신하였다면 처녀생식, 단성생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장소가 어딘지를 성경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수태고지의 배경을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다. 화가가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기독교 사제는 마리아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었지만 민중들은 달랐다. 민중들은 여신 신앙에 익숙했다. 민중들은 마리아를 성처녀로 인식하기보다는 여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익숙했다. 동방에서 건너온 여러 신들, 그리고 이집트에서 건너온 이시스(여신) 신앙이 마리아도 그들과 같은 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마리아가 기독교 안에서 신의 지위를 굳혀가는 데는 기독교 사제들의 힘보다는 이교 신앙의 역할이 더 크다. 기독교가 배척한 이교 신의 덕을 더 많이 입었다. 기독교 사제들은 성서에서는 전혀 고증할 수 없는 마리아를 몰아내려 하였지만, 민중의 신앙 앞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5세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의 황녀 유도키아가(408-450) 마리아가 입었던 수의를 구하였다는 했고, 마리아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최초의 마리아 초상화이고, 최초의 상징물이다.) 상류층 내재 지식인 층도 마리아를 수용하였다. 민간에서는 마리아는 여전히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면서 원시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서방 교회는 마리아가 성처녀(무원죄)임으로 이브가 지은 원죄에서 자유롭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는 성행위 없이(죄를 짓지 않고) 임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성서가 아니고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이다.(2세기 경에 쓰여짐) 이때는 마리아가 민중에게서 신의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마리아를 무원죄 잉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무척 고심했다. 다윗의 혈통이 마리아로 이어지는 이새의 가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논리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비적인 종교 체험을 더 환영했다. 카톨릭에서도 무원죄 잉태를 교리로 받아들인 것은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 때이다.(성모자 상의 그림에 마리아, 애기 예수 중 누구에게 더 무게를 두느냐의 문제도 화가의 고심거리였다.)
성모의 죽음은 더욱 더 안개 속이다. 4-5세기 경이 되면 죽음을 다룬 외경이 나온다. 그 중의 하나가 마리아는 ‘육신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다. 성화에서 보는 ‘성모승천’이다. 성모승천을 말하는 또 하나의 외경은, 예수의 열 두 제자. 모세, 에녹, 엘리아 등의 예언자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로 교회를 장식하는 벽화에 ‘성모승천’은 인기있는 주제가 되었다. 민중에게 마리아는 확실하게 신으로 승격하였다. 민중의 인기있는 여신 이시스와 이슈타르의 권위도 물러받았다.
이후, 눈물을 흘리는 성모상 이야기가 자주 들리고, 카톨릭 교회에서는 인정도 부인하지 않는다.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으라는 의미가 강하다.
눈물만이 아니고, 검은 마리아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성모상은 멕시코 과달루페 성당에 있는 갈색 성모상이다.(카톨릭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백인들만의 종교가 아닌 세계 종교가 된 오늘에 온갖 피부의 마리아가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