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62
7월25일[성 야고보 사도 축일/연중 제1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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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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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2_V-8fx2k0
(한곤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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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광의 길은 수치와 모멸의 어두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했던 사도 공동체 역시 구성원 상호간에 분열과 다툼,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는 것, 공동체 생활과 인간 관계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 인사청탁 사건은 사도 공동체의 미성숙과 불협화음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예라고 볼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한 어머니는 대뜸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한 가지 청을 드립니다. 그 어머니는 요즘으로 치면 자식에게 목숨을 거는 극성 엄마, 자식 주변만 맴도는 헬리곱터형 엄마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노골적인 인사 청탁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의 모습에 다른 열제자들은 엄청 불쾌해했고, 벼락같이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러울수가 있지?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이로군!”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시나?”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모임인 사도단이었기에 그저 거룩하고, 화기애애하며, 완전에 가까운 조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티격태격, 아웅다웅,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사도단의 미성숙으로 인해 벌어진 부끄러운 일들, 감추고 싶었던 흑역사들을 아무런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사도단 안에서도 핵심 인사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부족함을 조금도 감싸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사도들, 겉으로 보기에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그들도 한 부족하고 미성숙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에 대해 크게 오해했었고, 그분의 가장 주된 사명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모욕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조만간 다가올 현세 왕국에서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골고타 언덕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왕국에서 그분께서 나누어주실 물좋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한창 낮은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 벌써 저 위쪽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아랫쪽만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길은 수치와 모멸의 어두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참된 영광의 옥좌에 앉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의 쓴 잔을 비워야만 합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 전체가 요약된 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건네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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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eL6evYI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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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 열정에 기름 부으시는 방법 >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마지막 날에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하시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실 잔은 십자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목사님들에게 어느 교회에서 사목하시느냐고 물으면 그분들은 항상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조원동 주임 신부입니다”, 혹은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런 면에서 그분들 앞에서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저희도 섬긴다는 말을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야고보 사도의 열정을 나무라지 않으신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처럼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며칠 전에 직장에서 회장님에게 선교해서 세례를 주고 사장님에게 선교해서 오랜 냉담을 풀고
견진성사를 받게 한 신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아랫사람을 선교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윗분들을 이렇게 선교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을 만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열심히 하지만, 또 어느 정도가 되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의 딜레마는 저를 포함해서 어떻게 열심한 사람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들지였습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하기에 상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꾸르실료를 할 때도 울뜨레야를 잘한 본당은 일 년에 한 번씩 상을 주었는데 받지 못한 본당들이 움츠러들까 봐 오히려 마음으로는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또한 그러지 않고는 열심한 분들을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열정을 꺾지 않으십니다. 요한은 자신을 나타낼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 옆자리에서 첫째였습니다.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정도였습니다. 상을 주어서 열정을 더 끌어올리는 것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시험에 떨어진 것은 운전면허시험이었습니다. 대학생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 시간 공부하고 붙었다고 하기에 저도 그 정도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사흘은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받으니 너무 쉬웠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점수를 확인하는데, 제가 97번이었는데 76점으로 나온 것입니다. 1종 보통이었기 때문에 80점이어야 합격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의에 빠져서 그날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에는 잘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시험장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올 정도로 끝까지 풀었습니다.
저는 만점 받았는지 알았습니다. 82점인가 84점으로 간신히 통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00점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80점 통과를 목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80점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100점을 목표로 삼고 공부하였습니다. 누가 붙을 가능성이 크겠습니까? 목표를 100점에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저도 목표를 크게 잡습니다. 우리 목표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첫째가 되려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더 겸손한 사람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더 높게 가집시다. 성인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성모님 옆자리를 노립시다. 목표가 생기면 삶이 바뀝니다. 어떤 분들은 하늘에도 높고 낮음,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처음 듣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간다고 해서 내가 성모님과 동급의 취급을 받지 않습니다. 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 사실이 잊힐 때는 대부분 신앙인이 자신이 느끼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면 거기서 노력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도 첫째가 있고 그 방법은 가장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말고 위대한 성인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 합시다. 그러면 적어도 천국엔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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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20-28: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서 특별한 지위를 청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다. 자랑거리를 쫓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가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처음에는 주님께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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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서랍장의 손잡이가 떨어져서 ‘순간접착제’로 붙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하다보니 접착제가 손가락에 묻었습니다. 떨어진 손잡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저 같은 분들이 많았는지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식용유, 소금, 마가린, 세제, 비누, 아세톤’을 이용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하려면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하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에 묻은 순간접착제는 불편하기 때문에 빨리 떼어내야 하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는 순간접착제로 붙이듯이 계속 끈끈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관계’에 금이 가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 중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소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감사와 찬미를 드렸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비난이 함께했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지만 불평과 비난의 마음이 있었던 분들 중에는 제가 그분들을 향해서 글을 썼다고 오해 하였습니다. 오해가 풀려서 웃음으로 만났지만 처음에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재물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의 길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강하게 묶어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모두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였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던 베드로도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작은 불빛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빛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이제 용기를 내서 다시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니 두려움은 ‘담대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죽음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함’으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왼손에는 겸손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대함을 들고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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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4-28)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께 청했습니다.(마르 10,35) 두 사도가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은, 앞의 19장에 있는 예수님 말씀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예수님께서 먼저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이 열두 옥좌에 앉는 것 자체는 의심하지 않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가 어떤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 즉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누가 앉게 될 것인지, 또 사도들 사이의 서열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정해 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옥좌와 두 번째로 높은 옥좌입니다. 두 사도가 그것을 청한 것은, 다른 열 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마태 16,18-19), 사도들은 그 말씀이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말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라는 말에서 ‘가까이 불러’라는 말은, 이제부터 하시는 말씀은 ‘특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라는 말씀은, “세속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다들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권력욕과 명예욕이 특별히 더 강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라는 말은, “너희도 알고 있듯이 그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은,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요한 15,19)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라는 말씀과 “첫째가 되려는 이”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로 해석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남들보다 더’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거나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였을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지금 이곳에서부터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만 ‘섬김’을 실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도 실행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12,37)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에 응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인데,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섬김’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냥 희생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희생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십자가는 무의미한 고통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이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많은 이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구원을 주셔도,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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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많은 경우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구약 성경의 예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속’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나타내려고 복음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느님 종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며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올곧게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이런 의인들을 시기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의인을 박해하고 죽입니다.
대속과 비슷한 의미의 ‘속량’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냅니다. 속량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려고 ‘몸값’을 지불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당신 자신을 몸값으로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하여 달라는 청은 예수님을 세상의 권력자와 같은 메시아로 이해하는 시각입니다. 같은 메시아이지만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것과 예수님의 업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임금의 표상을 사용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탄생 때부터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는 임금의 모습이시지만, 그 임금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기에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에 앞서 예수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그리스도이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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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채홍락 시몬 신부님]
<하느님께 개방을>
오늘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서에 언급된 야고보 사도의 모습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항상 앞부분에 제시 되어 있습니다.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치유 현장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성전이 무너지는 종말이 언제 올는지에 대해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묻기도 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는 기적을 지켜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순간을 목격했으며, 게쎄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기도할 때에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 있는 등 예수님의 활동에서 중요한 순간을 늘 함께 지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제베대오는 삯꾼들을 부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소까지 따라다닌 행적으로 보아, 예수님 일행이 복음을 전하며 팔레스티나 일대를 다니실 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까닭에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보아네르게스 곧 천둥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이는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의 기질이 ‘다혈질’이라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건의할 만큼 과격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반면 이런 다혈질은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러겠노라고 답변합니다.
이때 장담한 대로, 야고보는 신약성서가 12사도 중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그 순교 사실을 기록한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인인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신비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논리로 신앙을 바라봅니다. 신앙은 십자가의 논리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의 논리로 하느님의 논리를 꿰맞출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것은 마치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더러 우리를 섬겨달라고 때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든 못하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방법으로 경직됨 없이 부드럽게 나를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신앙을 이룰 수 있는 모습이지요.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개방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단점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라십니다. 마치 야고보 사도의 다혈질을 받아들여 주님처럼 죽을 수 있는 열망으로 승화시켜 주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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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성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의 형이다. 이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로서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르시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마태 4,21-22).
주님께서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야고보를 특히 사랑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나(마르 5,37), 타볼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마태 17,1-9),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마태 26,36-46) 등 중요한 순간에 이 세 제자와 함께 하셨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컸던 것이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카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고보 형제는 자신들이 주님을 사랑한 그 만큼 주님께 대한 요구도 컸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에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마르 10,35-41)
이처럼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한 야고보 형제에게 주님께서는 천둥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셨다.(마르 3,17)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니아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다고 한다.
후일 이곳에 야고보 사도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에스파니아의 수호성인이다. 우리에게 주님 가까이 인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향한 열정이다. 열정 없이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열정은 우리 안에 있는 사념들을 불태워서 오직 한 가지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 역시 열정이다.
주님을 향한 열정은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이겨낼 힘과 용기를 준다.
사도 야고보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르시자 배와 그물도 버리고, 삯꾼과 아버지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주님을 따랐다.
그가 중요한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나,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한 것 역시 주님께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바로 그러한 열정으로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하였다.
오늘 사도 야고보의 축일을 지내면서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도록 하자.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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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상징했던 분이었고, 평화를 대변했던 분입니다.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던 분이셨습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늘의 우리에게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인이 보여준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을 서약받았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십니다. 방탄차를 타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서로에게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꽃동네에 오셨을 때는 거창하게 준비된 의자를 마다하고 평범한 일반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이 아니라 그야말로 교종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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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혹시 자신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바꾸고 싶은 것이 많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못 바꾼다면 이런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습니까? 차를 바꿀까요? 집을 바꿀까요? 고급스러운 명품 옷과 비싼 보석류? 혹시 자기 외모를 바꾸겠다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부분이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로또 당첨자들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자기 배우자라고 하네요.
로또에 당첨된 후 배우자와 헤어지고, 몇 달 안에 직계 가족과 의절하고, 친구들과도 연을 끊는 것이 순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면 ‘불신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불신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돈의 유혹 속에서 사람에 대한 의심이 더 커져서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는 있을까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보이는 인간을 멀리하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탐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처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동고동락했던 동료인 제자를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섬기는 삶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맘껏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 믿음 안에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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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섬김>
마태오 20,20-28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김>
섬기러 오신 분께서
섬기심으로써
섬김을 받는 이가 아니라
섬기는 이를 만드십니다.
섬기러 오신 분께
섬김을 받으니
섬김을 받는 이가 아니라
섬기는 이가 됩니다
섬기러 오신 분의
바로 곁에는
섬김을 받는 이가 아니라
섬기는 이가 있습니다.
섬기러 오신 분처럼
섬기는 이는
그렇게 섬김으로써
섬기러 오신 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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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섬기러 오신 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는 만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님처럼 행동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섬김을 받으러 오신 이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려면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섬김을 받는 것을 즐기는 이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았고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며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해도 말입니다. 섬김이란 무엇일까요. 섬김은 함께 함입니다.
쓰러져 뒤쳐진 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부족한 이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아픈 이를 온전하게 하려고 가던 길 멈추어 그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치열한 경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돌봄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돌봄에 삶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권력자의 통치와 다릅니다.
섬김은 살림입니다. 섬김을 받는 이가 더욱 그다울 수 있도록 그가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자신의 삶을 위한 다른 이의 피눈물 나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하느님을 닮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섬김의 삶을 통해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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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처음엔 뜻이 엇갈렸을 지라도>
“너희도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야고보 사도 축일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는 엇갈림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신 뜻과 야고보 사도의 따르는 뜻이 엇갈렸다는 뜻입니다.
뜻이 엇갈리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야고보 사도 간에 처음에는 뜻이 엇갈렸습니다.
주님의 뜻은 야고보 사도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당신과 함께 고통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었는데 야고보 사도의 뜻은 꽃길을 가고 축배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배를 마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아예 따르지를 않았을 텐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침내 뜻이 엇갈리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을 때 주님께서는 적지 아니 실망하셨겠지만, 그것을 드러내시지 않고, 당신께서 마실 고배를 너희도 함께 마실 수 있겠냐고만 물으십니다.
이에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마실 수 있다고 호기롭게 대답하는데 주님께서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수난하게 됩니다. 뜻은 엇갈렸지만, 운명은 엇갈리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고보 사도가 자기의 뜻이 좌절되었을 때, 그제서야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고, 그때라도 엇갈렸던 자기 뜻을 주님의 뜻과 일치시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되는 점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갈 때 나의 성공과 성취를 목적으로 갔다가도 그것이 주님 부르심의 참된 길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주님과의 일치로 나의 목표를 바꾸는 겁니다.
우리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수없이 청하고, 우리도 야고보처럼 수없이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설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말씀처럼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 청원할 때 처음엔 성공과 성취를 주십사 청했다가도,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사랑과 일치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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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번역하면 이 어감을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사랑, 사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은 ‘섬기다’의 섬김, ‘배우다’의 배움입니다. 봉사와 공부보다 정겹고 그윽한 어감의 섬김과 배움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복음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마산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 정문에 붙어있는 명칭이 더 좋습니다. 학원이 아닌 배움터라는 표현이 정답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는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생 섬김의 배움터에서 평생 섬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삶이 섬김으로 요약될 정도로 각자 소임을 통해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섬김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형제들에게 감동하고 배우는 것도 각자 일터에서 섬김의 책무에 지극히 충실한 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기도와 사랑에서처럼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축복,
섬김의 기쁨,
섬김의 찬미,
섬김의 감사,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등 참 기분 좋은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궁극의 섬김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섬김이요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뿐이요 파스카 영성이 그대로 표현되는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제가 수도사제로 강론 하면서 역시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중 하나가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결론처럼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 공동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주님은 그 어머니의 청을 지혜롭게 말끔히 정리해 주신후 공동체 분위기를 일신시킵니다. 결코 세속의 사람들처럼 군림하거나 지배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려서는 안되고 오로지 섬김의 삶에만 전념하라는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온전히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는 늘 섬김의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샘솟는 섬김의 에너지야말로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보물입니다. 누구나 지닌 질그릇 속의 보물인 섬김의 에너지는 그대로 예수님의 생명력이요 백절불굴 삶의 원천이 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되고 용기백배, 신바람나게 하니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바오로 일행의 삶인지요! 섬김의 일꾼으로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지만 언제나 드러나는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거 이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명이란 보물이 우리 삶의 백절불굴의 원천이 되고 섬김의 직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바로 섬김의 종의 모범이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그 명칭도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입니다. 이 말은 590년 교황으로 뽑힌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결같이 미소띤 얼굴로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환대하는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사람 많이 만나는 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인자한 얼굴이니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 생명이란 보물로 가득한 초인적인 교황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베드로는 흡사 예수님의 삼총사같습니다. 사도들중 첫째로 순교한 분이 야고보 사도요 이분하면 2014년 안식년에 가졌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납니다.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가 산티아고입니다. 다음 야고보 사도에 대한 전승이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겼 모셨으나, 711년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반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족의 침략을 받고 나서 그 유해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813년 해당 지방에서 살던 한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콤포스텔라’라불렀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자연스럽게 야고보의 이름을 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되었다.”
이어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곳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3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죽으셨지만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세대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이들의 영적 섬김의 수호성인이 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지금도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수호성인이자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에게 영원한 섬김의 수호성인이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여정중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섬김의 순례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는 섬김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의 순례 여정중 종과 섬김의 영성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요, 섬김의 순례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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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20,23)
<그리스도의 잔!>
오늘 복음(마태20,20-28)은 출세와 섬김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탁'을 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이 마셔야 할 '그리스도의 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마셔야 할 그리스도의 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4,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이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참으로 높은 사람이 되려면, 참으로 첫째가 되려면, 당신께서 마신 그리스도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당신처럼 부활할 수 있고,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잔인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부활의 절대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을 기쁘게 짊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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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sixCnkJs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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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 26)
적어도 우리는
이랬어는
안 됩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섬기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기본을 갖추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섬기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섬겨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며
첫째가 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섬기는 것이
나를 찾는
길입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섬김의
길입니다.
섬기는 것이
사랑의
지혜이며
존중의
열쇠입니다.
존중과 섬김의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섬김의 맛이
복음의
가장 좋은
맛입니다.
주님께서는
소통과 교류의
출발점이
다름아닌
섬기는 사랑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섬기는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섬김이 됩니다.
섬기는 것이
이 자리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는
진정한 행복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은
치열하게
마음밭을 일구는
수행입니다.
마음의 천적은
교만이며
마음의 복음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기는 것이
영글어가고
익어가는
사랑입니다.
섬기지 않고서는
오래갈 수 없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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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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