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전 오늘 (11월 21일)은 한국인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날입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은 조선이 일제에 식민지가 된 날 즉 나라를 빼앗긴 날이라면 1997년 11월 21일은 경제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날입니다. 27년전 한국은 김영삼 대통령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 불과 한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여당에는 이회창후보가 대선후보로 나섰고 야당에서는 김대중후보가 등판했습니다. 당시 의식있는 언론과 경제 전문가들은 곧 한국에 엄청난 경제적 난리가 일어난다고 경고했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근거없는 낙관론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다음 대선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여당후보에게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린 모습이었습니다. 나라의 운명보다 차기 대선후보를 자기 당에서 배출하고 싶고 기득권을 이어가고 싶다는 정치인들의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행태였습니다. 정부에 눈치보기 급급한 공영방송들은 절체절명의 난국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몇몇 신문만 경제적 태풍의 심각성을 보도했지만 거의 대부분 신문들은 애써 눈을 감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바로 27년전 오늘 정부는 국가부도 즉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 나라로서 제구실을 못하게 되어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기구에게 거액을 꾸어와 나라를 겨우 겨우 운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과 경제기획원 장관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두려움과 공포속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별일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정부 관계자들의 말들은 그러면 무엇이었는가 분노와 격앙의 목소리가 전국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나라의 곳간 즉 외환이 고갈될 때까지 과연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언론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IMF 경제 위기속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졸지에 일터를 잃었습니다.자영업자들의 힘듬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 났습니다. 실직한 가장들의 한숨소리와 자식들을 키우며 먹여야 하는 주부들의 심정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수많은 가정에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한국전쟁이후 가장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한달 뒤 있은 대선에서 당연히 야당의 김대중후보가 당선됐습니다. 분노한 민심이 만든 결과입니다. 김대중 당선인은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이 국가적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을 만들겠다고 천명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슬픈 결의가 담겨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해서 피눈물나는 구조조정을 실시했습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썪은 기업과 금융기관을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실시된 금모으기 운동은 전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IMF 전에 그렇게 현실을 전하지 않고 정부의 말만 옮기기에 급급했던 공영방송들이 새정권하에 금모으기운동에는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달라지는 모습 그리고 정권에 눈치보는 그런 태도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런 각고의 노력으로 한국은 서서히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때 지독한 경험을 한 국민들 상당수는 아직도 그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요. 한국은 지금 그때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가계부채는 이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냥 돈 빌려 아파트에 투기해서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투기꾼들과 정부의 요상한 정책이 혼합되어 가계부채를 더욱 치솟게 하고 있습니다. 기업부채와 나라재정은 어떤가요. 마찬가지입니다. 수출도 지금 하향일로입니다. 중국발 수출도 줄고 미국발 수출도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면서 격한 폭풍우가 예상됩니다. 국내외적으로 경고음도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IMF는 여러차례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한 경고를 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 경제의 대외 불확실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IMF 미션단은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낮춘데 이어 하방 리스크가 더 높은 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러우전쟁의 장기화 우려,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 등 대외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고도 경고지만 지금 한국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정서가 한국 경제의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갈등이 가장 심화된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이래 가장 험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혁갈등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이고 남녀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갈등, 남북 갈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 등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갈라진 의견과 사고방식의 충돌로 이제 한국에서 대단한 위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국민적인 합의가 이뤄질 수 있을 런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예전 IMF 시절에 금모으기 같은 이벤트에 과연 국민들이 어느정도 호응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깊게 드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정부의 대책에 나름 호응하겠지만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그만큼 지금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힘들고 헤쳐나가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IMF 국가부도사태 27년을 맞아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제발 제 2의 IMF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원할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우리의 바람과는 대체로 다른 방향을 잡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2024년 11월 2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