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해류는 부근 해류와 전혀 달라
한국수로국에서 낸 완도항 일대의 조류도는 부근 해역과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있다(수로국 서지 제1421호 참조). 완도항은 옛이름 가리포(加里浦)처럼 외양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양항으로 이 항구로부터 13km 지점에 있는 장도는 북쪽 강진만으로 통하는 마로해(馬路海)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신지도(薪智島) 북쪽으로는 조약도(助藥島)로 통하는 장직수로가 있다. 장도에서 완도항에 이르는 유향(流向)은 언제나 일반 유향과 반대 현상을 보여 주위를 요하는 곳이기도 하다. 완도항은 근래에 국제 무역항으로 승격해 읍부두 항구로는 드문 중요성을 인정받은 터이지만 장도를 중심으로 인근해역 50여km 안팎에 역사적인 수군방어시설이 집중해 있던 점은 독특한 점이다.
완도(장도)에 청해진이 설치된 이래, 그 후에도 그 자리에 해상기지가 들어서
장도 남쪽 13km 지점인 지금의 완도항에는 1521년(중종 16) 수국만호를 배치, 영암(지금의 해남) 달량진 수군을 아울러 관장케했다. 또한 1856년에는 진도의 금갑진(金甲鎭), 해남의 어란진(於蘭鎭)과 달량진(達梁鎭), 강진의 마도진(馬島鎭), 완도군 신지도의 신지진(薪智鎭) 등 5개 만호진을 관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1421년(세종 3) 이곳 해역에는 마도진과 달량진에 수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달량진은 오늘날 해남의 남창(南倉)에 있던 수군진이었고, 마도진은 오늘날 고마도(古馬島)라 부르는 장도와 달량 사이에 있는 섬에 있었다. 이 마도진이 강진의 남원포(南垣浦)로 옮겨가고 가리포에 수군이 배치된 것이 그 뒤의 일이다. 결국 강진만을 지키기 위한 수구(水口) 방어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뒤에는 곧바로 신지도와 조약도 사이 물목을 지키는 신지만호진이 생겼으며, 조약도와 고금도 사이의 덕동에는 고금진이 설치되어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군사들이 주둔하기도 했다. 이처럼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마도해(馬島海)를 중심으로 계속 수군진이 개설된 것은 전략적으로 군대를 배치하기 알맞는 지리였을 뿐 아니라 이 물목을 거쳐가는 강진만은 내륙으로 통하는 주요 물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몰목 포구에 내려 산을 넘는 곳에 전라도 병영(兵營)을 두었다. 이 물목고을 이름이 탐진(耽津)이었던 것도 제주(濟州)로 통하는 주요 나루터였던 역사지리적인 환경 탓이다.
구한말·일제시대 때에도 완도는 군사적 요충지로
1870년대 이후 열강들이 한반도를 손안에 넣기 위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시절 일본은 청나라 및 러시아와 한판 벌이기 위해 경남의 거제도(巨濟島)와 전남의 완도군 신지도 및 신안군 하의면(荷衣面) 옥도(玉島)에 군대와 함대를 숨겨두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이동(伊東)에 출동명령이 내려지고 이틀 뒤인 23일 충남 아산만의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에 일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본군이 불법으로 한반도 남해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도 정동쪽 신지도 만호진터 갯가에는 일본수군들이 진을 쳤던 '원정근거지(遠征根據地)'라는 유적비가 남아있다. 일본 수군들은 이미 이해 5월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다가 옥도(玉島), 자은(慈恩), 거문도(巨文島) 등지에 숨겨두었던 함대와 더불어 청나라 함대를 향해 출동했다. 만일 장보고대사를 당나라 사람으로 본다면 장도해역은 우리나라 뿐아니라 일본, 중국 등 삼국의 기지로 쓰인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청해진과 그 주변간의 관계
오늘날 군청소재지이고 읍의 중심이며 국제항이 되어있는 가리포(加里浦)는 본래 청해진 시절에는 강진땅이었으며, '가래골' 또는 '가리개'라 하여 한자로는 추도(湫島)라 했다. 1521년 이곳에 수군을 배치하고, 1896년 수군진 관아에 군청이 들어서면서 완도의 중심이 된 곳이다. 지금 집이 들어선 곳들은 대부분 1925년 이후 바다를 매립해 얻은 땅들이어서 이 때문에 식수가 귀했다. 이에 견주면 장도를 중심으로 죽청리나 대야리 일대는 들도 넓은 셈이고 물도 괜찮은 편이다. 이런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예부터 사람이 살았던지 죽청리에는 고인돌이 10기나 남아 있다. 오늘날 완도읍 사람들은 이곳 대야리에 둑을 막아 식수를 끌어다 먹는다. 장좌리에는 청해내면 면사무소가 1856년에 생겨 60년 만인 1916년에야 완도읍내 군내리로 옮겼다.
같은 섬이면서도 이웃 진도군은 이미 백제 때 세 고을이 있었고, 신안군의 장산도(長山島)나 흑산도(黑山島) 등의 섬에도 각각 독립된 고을이 있었으나 오직 완도에만은 옛고을의 흔적이 없다. 오히려 더 적고 외진 청산도(靑山島)에는 읍리(邑里), 읍동(邑洞) 따위 고을 흔적이 있다. 청해진이 혁파된 섬이었던 탓인지 조선시대 철종 때까지도 이 섬은 인근의 해남, 영암, 강진 등에 속해 있었다. 다행이 이도재가 완도로 귀양왔다가 돌아가 전라감사가 되었던 인연으로 48개 섬을 모아 19개 면의 군이 되었다. 물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많은 섬이 가까운 육지군에 되돌려지고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의 모습을 갖췄다.
이곳 상황봉 주변에서는 근래 신라때 중국에 수출했던 황칠(黃漆)나무가 자생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상황봉에서 죽청리와 장좌리 사이에 관음사(觀音寺), 증암사(아랫절), 법화사(法華寺) 절터 외에 두곳이나 절터 흔적이 있고, 장도 안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기록처럼 청해진에 1만 군사가 있었다면 청해진은 샘물도 신통치 않은 장도만을 기지로 쓰지 않았을 터이다. 남쪽으로 군내리에 가까운 가용리(加用里)와 죽청리(대푸리) 사이에 '엄목개', '엄나무골', '염수동' 따위 장보고 암살한 염장을 연상시키는 땅이름이 있고, 장도 장장군(張將軍)과 관련지은 전설도 전해온다. 죽청리에는 '청해정'이 있고 '옥담밭', '쏠보등', '사장목', '마골창', '평난개' 등 지명들이 남아 있다. 특히 장좌리에는 '목없는 무덤', '장가내 무덤' 등으로 불리는 고총이 있기도 하다.
『동사열전(東師列傳)』「정암선사(晶岩禪師)」항목에 '궁복도(弓福島)'가 나오는데 완도를 이르고 있으나 이 기록과는 관련이 없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에 「장보고소섭도민야(張寶高所攝島民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금일읍(金日邑)에 '섭도(攝島)'라는 무인 등대섬이 있어 주목을 끈다. 동경 127도 07분, 북위 34도 10분에 위치한 이 섬은 완도읍에서 25.5km 거리에 있고 면적이 40㏊, 해안선 연장이 3.3km로 70년대에 13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2호가 계절출장거주를 하고 있다. 장보고와 직접 관련은 없겠지만 이 섭도 건너 마을이 궁항리(弓項里)로 토박이 이름으로는 '활목'이라 장보고의 토박이 이름 궁파(弓巴)를 연상시킨다.
청해진은 흑조의 흐름 때문에 위도가 다른 중국 항구와 연결돼
청해진의 위도는 중국의 연운항(連云港)과 거의 같지만 흑조(黑潮)의 흐름 때문에 오히려 위도 30도 주변의 항주만(杭州灣)과 주산군도(舟山群島)에 연결되는 남송무역해로 선상에 있다. 영파시(寧波市)의 시목(市木)과 강진군의 군나무가 우연하게도 장목(樟木)이다. 강진 대구청자의 포구 미산포(眉山浦)에서 바라보면 장도는 정남쪽으로 일본과 중국을 향해 떠나는 길목초소 마냥 자리잡고 있다. 이점과 관련해 주의할 사실은 청해진이 개설됐던 당시 완도는 오늘날의 강진에 해당하는 양무군(陽武郡)에 속한 섬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구면과 완도는 지금보다 훨씬 밀접했던 이웃이었으며 같은 고을땅이었다.
청해진과 청자산업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청해진은 당나라(618∼907)와 관련있는 유적이지만 이 물목안에서 오월(吳越, 908∼978)청자와 비슷한 자기산업이 시작되고 남송대(南宋代, 1127∼1279)에 절정을 이룬 고려청자가 발전했으며 중국 명주(明州)와 양주(揚州), 일본의 구주지방(九州地方)에 그 파편들이 널려있는 것은 이 지역이 갖는 역사지리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물목 안의 강진, 장흥, 화순지역 토호집단인 장흥 임씨, 남평 문씨, 탐진 최씨, 탐진 안씨, 탐진 위씨 등이 청자산업의 전성기에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완도 청해진 인문의 변화를 통해 외방(外防)의 기지가 시대 발전에 따라 점차 광역화하고 외양화(外洋化)하면서도 그 중요성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살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