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을 기억하시는가? 바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암살·폭파전문 비밀결사”였다는 의열단이 창립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벌써부터 김원봉을 띄우는 각종 이벤트와 퍼포먼스,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고, 김원봉과 의열단을 칭송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항일, 무장투쟁이 시대의 대세가 되다 보니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김성수 등의 준비론 같은 이슈는 함부로 입밖에 내지도 못할 험악한 분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선명한 무장투쟁의 주인공 김원봉, 신채호가 역사의 아이콘으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데 감히 싸가지 없게 외교독립이라니!
조만간 좌파 세력들은 '역사부정죄(crime of historical denialism)에 대한 처벌법', 혹은 '일제 식민통치 옹호행위 및 일제의 역사부정에 대한 내응 행위 처벌법'이란 특별법을 제정하여 자신들의 항일 무장투쟁 사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단다. 학문에 재갈을 물리고, 족쇄를 채우겠다고 황태연 교수가 중심이 되어 쓴 『일제종족주의』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황태연 외 지음, 『일제종족주의』, NEXEN 미디어, 2019, 94~95쪽).
하지만 김원봉을 띄우는 좌파 전체주의 신봉세력들은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 코민테른 자금을 받아 테러 활동을 수행했던 사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원이 몇 명 정도였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 김원봉이 조직했다는 조선의용대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월급과 활동비를 받고 중국군 산하에서 일본어 통역, 선전활동을 주로 진행했던 비전투적 조직이었다는 사실도 얼버무린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라고 주장한 신채호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 공작에 넘어가 자신들의 월급과 활동비를 대주던 장제스 정부를 배신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산하로 탈출 도주하여 이름을 조선의용군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이동했다. 만주에서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조선족을 징집하여 중공 인민해방군 164사단·166사단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중국 국공내전에 모택동 휘하의 공산군으로 참여하여 중국을 공산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문제의 164·166사단은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1949년 기차 타고 북한으로 넘어와 북한 군복으로 갈아입고 인민군 4·6사단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 인민군 4·6사단이 6·25 남침의 선봉부대 역할을 했다.
이런 명백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에 대해 좌파 전체주의 신봉세력들은 일제히 침묵 외면한다. 이런 내용을 대한민국 국민이 알면 안 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항일 무장투쟁론에 순응하지 않고, 저들과 입장이 다른 학설이나 역사적 사실을 표했다간 학자들 간에 논쟁 대상이 아니라, 현행범으로 체포 기소되어 감옥에 들어가 살든가 벌금을 물어야 할 지도 모르는 세상이 조만간 도래하게 생겼다. 히틀러나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파쇼 전체주의 독재국가에서나 상상 가능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 찜쪄먹을 완벽한 사상·학문·철학·문화·언론 통제국가의 원형이 대한민국에서 실행되는 셈이다.
신채호는 김원봉의 청탁을 받아 ‘의열단 선언’을 쓴 사람이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과 손을 잡고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반면에 이승만은 "그런 무장 유혈투쟁으로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국제법 공부를 하라"고 외쳤다. 이승만이 중뿔나서 그런 게 아니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의 근저에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내용 중 여섯 번째 항목이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제6조에 의거하여 이승만은 암살이나 테러, 파괴공작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해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김원봉이나 신채호가 구상했듯이 아무리 폭력 투쟁정신이 고귀하고 훌륭하다 해도,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다. 현실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면 몽상과 망상, 판타지의 세계를 헤매다 일장춘몽이 되고 만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 국가,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해야겠으니 닥치는대로 암살·파괴·폭력을 하더라도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우길 수도 없다. 이상이 고귀하고 드높다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강도 일본’을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나?
의열단이 조직되어 김원봉과 신채호가 폭력투쟁을 선언할 무렵,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일본은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되는 등 세계 5대 열강국 반열에 올랐다. 영국의 동맹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산둥반도 일대를 공격·점령했고, 적도 북쪽의 태평양에 흩어져 있던 독일령 섬들을 점령한 다음 ‘남양군도’라고 이름을 바꾸고 영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었을 때 일본의 판도는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북만주 일대, 중국에서는 산둥과 양쯔강 일대,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는 강국으로 부상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총 병력 720만 대군을 동원했고, 항공모함·전함·전투기·폭격기·전차·잠수함 등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의열단의 독립을 이루려는 드높은 결기와 정신은 기자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런 정신이 살아 있었기에 우리는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기에도 나라를 되찾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강국을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불과 몇십 명의 의열단이 나 항일 무장투쟁가들이 무력으로 타도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당시 시대상황이나 세계정세로 볼 때 그런 주장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자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들 덕분에 항일 무장투쟁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신채호가 주장한 그 유명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사관, ‘한놈 정신’이 모든 철학과 가치관, 역사관, 지성계와 지식계, 문화계를 압도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지성은 붕괴해버렸다.
좌익 전체주의 세력들이 그토록 흠모하는 조선의용대는 숫자가 300여 명, 임시정부가 조직한 광복군은 그 숫자가 가장 많았을 때가 68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이 정도 병력으로 수백만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한다? 그렇다면 무장투쟁론자들은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낙엽으로 전투함을 만들며, 모래알로 밥을 지어 대원들을 배불리 먹이는 무슨 신통방통한 재주라도 가지고 태어난 영험한 인물들인가?
이처럼 비현실적 주장을 밥먹듯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전형적인 성리학 원리주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항일 무장투쟁 만능론의 실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했던 세력들은 하나같이 중국에 의지했고, 현실 여건 상 중국에 의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해외로 망명한 성리학자는 대부분 중화사관의 충실한 계승자들이었다(이영훈, 「한국민족주의의 전개」, 이승만학당 강의록, 2019.6.1).
조선성리학의 정통을 잇는 유인석은 1910년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지에서 1911년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한족이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의 적통을 회복하면 소중화인 조선의 독립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쑨원(孫文)이 공화정을 실시하고 공자 학교를 폐쇄하자 절망 낙담한 유인석은 비탄에 빠져 사망했다.
국채보상운동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 이승희는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도 신해혁명 소식을 접하고 조선 독립이 가까워졌다면서 크게 기뻐했다. 그런 모습을 본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관리 리웬지(李文治)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성인의 도를 구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한국인은 민족의식부터 일깨워 국가를 되찾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승희는 “성인의 도(道)는 국가를 초월한다”고 반박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더없이 순진하거나 몽상적인 동양 평화주의자였다.
1921년 3·1운동으로 발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이 광둥(廣東)정부의 승인을 구하기 위해 쑨원 주석을 예방했다. 광둥 정부 요인들이 좌우로 도열한 공식 접견 자리에서 신규식은 쑨원에게 조공-책봉국 사신이 중국 황제에게나 올리는 6차례의 최고 예우 경례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시정부 내에서 큰 분란이 발생했다. 신규식은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절식하여 굶어죽었다. 그렇다고 이후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세력의 역사의식에서 소중화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중국 혁명을 조선 독립의 길로 간주하여 중국 혁명에 참가했다(이영훈, 「민족이 국가를 집어삼켰다」).
중국에서 활동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그들이 주도하는 중국혁명과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독립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코민테른 자금으로 움직였다. 김원봉이 조직했다는 조선의용대도 장제스 국부군 산하에서 조직되어 그들 자금으로 활동했고,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사정은 동일했다.
광복군 지휘권 중국에 넘긴 임시정부
중국의 정치가들은 장차 독립할 한국인의 나라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할 목적에서 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4년의 어느 강연에서 쑨원은 “중국이 만약 다시 강성해진다면 조선이 중국에 복속시켜달라고 요구해 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 장제스는 국민당 임시비의 대부분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에 지출했다(이영훈, 「한국민족주의의 전개」, 이승만학당 강의록, 2019.6.1.).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누구나 말은 번드르르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겨 10만 명 장정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킬 재원이 없는 데 무슨 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며 고단하게 연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10만 양병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 "당신 친일파지?" 하고 험악하게 눈을 부라린다.
광복군은 출범 당시 창립 1년 후 최소 3개 사단 편성을 목표로 삼았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임시정부는 이 정도 병력에 불과한 광복군조차 제대로 유지 운영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에 넘겼다. 그리고 광복군의 거의 대부분의 요직을 중국군에게 넘겼다. 덕분에 말이 광복군이었을 뿐 임시정부는 광복군 운영이나 작전에 대해 뭐라고 의견을 낼 입장도 못 되었다.
김삼웅은 광복군의 통수권과 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긴 것에 대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비록 중국군의 명령과 지휘감독을 받을지언정 일본군을 격멸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항일전에 나서는 것만이 민족적 대의(大義)였다는 것이다.
좌익세력이나 전체주의 추총자들은 지금도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긴 것을 “자주권의 포기”니 "이게 무슨 자주독립국이냐" 등등 온갖 추잡한 용어를 동원하여 비판한다. 그렇다면 광복군 작전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긴 것은 ‘민족적 대의’라고 미화찬양하면서, 6·25 남침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싸우도록 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위임한 이승만의 행위가 그토록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Q의 ‘정신승리법’과 뭐가 다른가?
이쯤 되면 중국 작가 루신(魯迅)의 『아Q정전(正傳)』이 생각난다. 소설 주인공 아Q처럼 어느 날 조선은 일본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아Q는 복수를 할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Q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킨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는 정반대로, 머릿속에서 지어낸 자신의 존재를 현실이라고 믿는 방식을 고안해 낸다. 도저히 ‘강도 일본’을 이길 재간이 없으니 “우리에게 폭행을 가한 쪽발이 일본 놈들을 ‘아들놈’이라 생각하고, 아들놈에게 한 대 얻어맞은 셈 치자” 그렇게 마음먹는다.
그 순간, 아Q는 얻어맞은 자기보다, 때린 아들놈을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이 형식에선 졌지만 내용에선 승리했다고 확신한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승리했다는 착각과 자위는 1637년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청나라에게 삼전도에서 비참하게 항복한 후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희대의 주자학 근본주의자 송시열 일당이 지어낸 황당무계한 ‘북벌론’이 그 증거다.
일부 세력들이 주장하는 항일 무장투쟁 만능론은 다름 아닌 송시열 류의 시대착오전인 북벌론, 루신의 소설 주인공 아Q와 동일한 ‘정신 승리법(spiritual victory)’을 창작해낸 레토릭과 거의 유사 동일 패턴이다.
그러한 ‘정신승리법’은 지금 이 순간, 핵무기와 미사일 쏴대는 북한을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민병 결사대가 을지문덕·이순신·김원봉·신채호 등 조상들이 물려주신 정신세계의 염력(念力)으로 깨부술 수 있다고 우기는 것과 뭐가 다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