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 영화 속을 걷다(63)
기억과 공감의 소리를 찾아 떠나는 오딧세이
아피찻풍 위타세라쿤의 <메모리아>
트라우마로서의 집단 무의식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비중을 '0.918' 이라는 수치로 나타낸다. 전체를 1로 봤을 때 무의식의 이 정도니 그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현화의 희곡에 <0,918>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는데 이는 곧 무의식, 즉 리비도를 의미한다. 평소 의식 활동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에는 무의식은 잠재되어 있다가, 의식이 휴면에 들어가는 수면의 시간에 그것은 꿈으로 나타나 잠재의식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그만큼 무의식은 우리 정신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평소 억눌려 있던 잠재된 욕구가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은 수면 위의 유빙보다는 수면 아래의 덩이가 더 크다. 수면 위의 유빙이 우리 정신세계의 의식이라면,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유빙은 무의식을 나타내며 그 비중이 0.918 이다. 그래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는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태고부터 반복적으로 경험된 인류 조상의 체험의 침전이며, 유전된 여러 행동 유형으로 이루어진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서의 정신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도 일종의 집단 무의식이다. 우리의 경우 제주 4.3 사건, 광주 민주화 운동, 세월호 사건, 최근의 경우로는 이태원 참사 같은 비극적 사건도 일종의 집단 무의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한 역사적 비극은 정신적 외상이라는 트라우마로 우리 속에 집단 무의식의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다.
태국 감독 아피찻풍 위타세라쿤의 신작 <메모리아>(2021, 135분) 역시 기억과 공감에 관한 영화이다. 여기에서의 '기억'은 개인적 기억이라기보다는,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신화적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피찻풍 위타세라쿤은 2002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수상을 출발로 하여 심사위원상 2회(열대병, 메모리아), 그리고 2012년 마침내 <엉클 분미>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여 세계 영화계의 기린아가 되었다. 이번 <메모리아>는 그가 태국을 떠나 남미의 문턱인 콜롬비아에서 다국적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감독이 '폭발성머리증후군'을 앓았는데, 그것을 모티브로 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전작들 역시 태국의 역사적 상흔이라는 집단 무의식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집단 무의식의 기억
여동생의 병문안을 위해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를 방문한 제시카 (틸다 스윈턴 분)는 어느 미명의 아침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그 소리는 흡사 커다란 쇠로 만든 공이 수면에 부딪치는 소리처럼 그녀에게 들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롱 테이크로 보여준다. 그녀는 미명의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한동안 주시한다. 관객들 역시 그녀와 정서적 일체감을 가진 채 소리의 진원지를 찾게 마련이다. 그 소리는 의식 활동 중에 들린 현실의 소리일까, 아니면 그녀가 꿈속에서 들은 소리일까 구분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 소리는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기억으로 수면 아래에 있는 그녀의 무의식을 깨우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음향 기사 아르난을 찾아가 소리의 정체를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그를 찾아갔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몽환적인 판타지로 바뀐다. 여기서부터 제시카의 소리의 근원과 정체를 찾아가는 일종의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일종의 ‘사운드 오딧세이’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유물 발굴팀의 관계자를 찾아가 몇천 년 전의 유골과 뼈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유물발굴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여동생 가족과 식사 자리를 갖게 되면서, 그녀는 동생이 최근에 앓고 있는 원인 불명의 병적 징후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여동생의 남편은 아내의 병이 밀림의 주술에 관련되었다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손을 떼라고 주의를 주고, 여동생은 꿈속에서 개의 참혹한 죽음을 외면하고 지나쳐버린 기억을 얘기한다. 제시카는 거기서 다시 문제의 그 '쿵'하는 소리를 연이어 세 번이나 듣는다.
문제는 그 소리를 제시카 혼자서만 감지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녀 혼자서만 듣는다는 개인적 기억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녀는 보고타 외곽까지 갔다가 계곡 물가에서 웬 사내를 만난다. 그 사내의 이름 역시 음향기사와 같이 에르난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 이 사내가 음향 기사로 변신하는 판타지를 펼쳤다는 말이 된다. 에르난이라는 사내는 제시카의 유년의 기억을 듣자마자 자기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기억 저장 장치'라고 말한다. 이는 일종의 기억의 공유인 셈인데, 사내는 왜 제시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두 남녀는 타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소리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문제의 소리는 제시카에게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각성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소리 의 정체는 마약과 내전으로 얼룩진 콜롬비아의 역사적 상흔으로서의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비단 콜롬비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트라우마로 확장될 개연성이 충분하다.
제시카와 에르난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숲속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외계인의 우주선이 떠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대목에서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하게 되는데, 그 우주선 안에는 몇천 년 전의 그 사람들이 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까마득한 역사의 트라우마를 그들하게 환기시키기 위해 우주선이 당도하여 '쿵'하는 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본다면 제시카가 소리를 들은 것은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그녀에게 환기시켜,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라는 계시일지도 모른다. 즉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앞장서라는 묵시적 암시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소리의 근원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 지식인의 의식의 흐름
이처럼 <메모리아>는 그런 사유의 영화인 만큼 감독은 롱 테이크 촬영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한 테이크의 길이가 보통 2, 3분을 넘고 있다. 한 테이크가 10초를 넘지 않는 헐리웃 상업영화에 길들어져 있는 성미 급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지리한 영화적 리듬과 템포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테이크의 분절보다는 한 화면을 오랜 시간 보여줌으로써, 화면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서브 텍스틀 이해하고, 여백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망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
테이크의 분절로 보여지는 화면은 부분적인 것만 공감될 뿐이지 전체의 상황이 주는 서브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신사실주의) 영화 역시 테이크의 분절을 지양하고 전체 상황을 한 화면 속에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맥락을 이해하게 한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경우를 예로 들면,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쓰레기통을 뒤지는 헐벗은 아이들, 누더기를 걸친 채 쓰러져 있는 아이들을 단편적으로 분절해서 보여주기보다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한 화면 속에 담아 보여주어 전쟁의 참상과 후유증을 깨우쳐 준다.
또한 이 영화에는 여러 가지 은유와 상징이 매설되어 있다. 제시카가 소리를 듣고 난 뒤 미명의 어둠 속에 주차된 차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한동안 클랙션을 울리는 장면, 인물들의 과거의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의 단초를 암시하는 은유적 상징, 장면 상황에 따라 들리는 소리를 통한 기억에의 공감각적 상징 등의 요소들이 곳곳에 매설되어 관객의 상상력을 촉진시키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펼친다. 주차된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리는 것은 지식인의 잠든 역사적 기억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심리적 음향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상황은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으로서의 공감각적 기억일 수도 있다.
<메모리아>는 역사적 상흔으로서의 트라우마를 은유하는 소리를 찾아 떠나는 한 지식인의 의식의 흐름에 관한 지적인 시네포엠에 가까운 영화이다.
최근에 우리에게 일어난 이태원 참사 역시 일종의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정신적 외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비극적 트라우마의 기억을 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 비극은 국가 시스템의 무기력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안전사고이다. 우리는 늘 이러한 비극적 트라우마를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 비극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역시 국가 시스템의 무기력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300여 명이 배 안에 갇혀 있는 데에도 국가의 안전 시스템은 무기력하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한 사건을 트라우마로 겪으면서 국민은 국가를 불신하게 되고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적 생존의 방식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개혁의 현장에 참여하지는 못할망정,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깨어있는 시민 정신을 가져야 한다.
아피찻풍 위타세라쿤의 <메모리아>는 지식인의 깨어있음과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을 묵시적으로 강조하는 지식인의 의식의 흐름에 관한 영화이다. 제시카의 소리를 찾아 떠나는 오딧세이는 곧 지식인의 소명의식을 강조하는 은유적 상징이다. 직접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역사적 상흔으로서의 트라우마를 항상 인식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왜 이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시네포엠은 없는 것일까 자문해 본다. 그것은 곧 이런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부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흥행만 의식하고 쾌락적 기능으로서의 서사적 재미에만 편중되어있는 한국 영화의 지형도가 참으로 안타깝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계간 <문장> 2023년 봄호)
첫댓글 수준 높은 영화네요. 일반인들은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무의식 세계가 얼마나 깊고 무궁무진한지 생각해보는 시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