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정 무산 위기… 기업 발빼고 정부는 뒷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11년 눈물
1774명 숨진 ‘사회적 참사’
최대 9240억 조정안 나왔지만
정부도 사태해결 수수방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 단체 회원 등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피해 구제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참사 해결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 설치와 치유기금 조성 등을 요구했다. 뉴시스
《2011년 산모 4명 사망을 기점으로 공론화된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국내에서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다. 지난달 말까지 환경부에 접수된 피해구제 신청자는 7712명, 그중 사망자가 1774명이다. 현재까지 4318명이 피해자로 인정됐고 나머지는 피해 여부와 등급을 심사 중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2020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95만 명, 사망자를 2만 명으로 추산했다. 원인 모를 질환으로 이미 숨졌거나, 제품을 사용한 지 오래돼 발병의 인과관계 규명이 어려운 피해자가 더 많다. 1994년 유공(현 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 물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뒤 2011년 판매를 중단할 때까지 18년 동안 해당 성분이 들어간 43개 제품을 사용한 사람만 894만 명에 이른다.》
○ 무산 위기 처한 11년 만의 조정안
“정부는 잘못이 없다고 하고, 기업은 적당한 선에서 빨리 끝내자고 합니다. 우린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요.”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 ‘빅팀스’의 투쟁본부장을 맡고 있는 조순미 씨(53·여)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 씨와 아들(21), 조 씨의 어머니와 시어머니 등 가족 4명은 2007년부터 3년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폐 기능이 30%대로 떨어진 조 씨는 피해 인정을 받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시어머니는 폐와 심장 질환을 앓다가 6년 전 숨졌다. 조 씨는 “폐 기능이 떨어져 평생 고생할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뒤 올해로 11년이 지났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투쟁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조정위원회’가 마련한 조정안은 무산 위기에 처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생산 판매한 9개 기업 가운데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애경산업 등 두 곳이 반대하고 나섰다.
조정안은 조정 금액을 최대 9240억 원으로 책정했다. 이 중 옥시가 약 54%(5013억 원), 애경산업이 7.4%(690억 원)를 분담하도록 했다. 이는 2017년 제정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의 분담 비율을 따른 것이다.
피해자들도 조정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사망자에겐 연령에 따라 2억∼4억 원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이미 지급된 특별유족조위금 등을 공제하면 실제 받는 금액은 1억∼3억 원 수준이라는 게 유족 측 설명이다. 초고도 등급 피해자에게는 최대 5억3520만 원을 지급한다. 하지만 현재 피해등급을 받은 922명 중 초고도 판정자는 15명에 불과하다. 평생 부담해야 할 치료비와 노동력 상실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피해자들은 앞으로 질환이 더 악화되거나 새로운 질환이 발병할 때 추가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점에도 반발하고 있다. 이요한 씨(46)의 자녀(15)는 두 돌부터 천식과 폐렴을 앓았다. 이 씨는 “앞으로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고, 폐 이식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태”라며 “추가 피해에도 정부와 기업의 보상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분담 비율 과도’ 발 빼는 옥시, 애경산업
옥시와 애경산업이 조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박동석 옥시 한국 대표와 채동석 애경산업 대표는 2일 국회에서 열린 한화진 환경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의 발언을 직접 살펴보자.
“‘종국성(終局性)’을 담보하는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서가 필요하다.”(박 대표)
“조정안의 기업 간 분담 비율 기준이 합리적이지 않다.”(채 대표)
기업이 말하는 종국성은 이번에 조정이 끝나면 만약 추가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게 담보돼야 조정에 응하겠다는 게 두 기업의 주장이다.
조정위와 피해자 측은 이번 조정안에 해당 내용이 포함됐다는 입장이다. 반면 옥시와 애경산업은 협약 체결이나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개정 등을 통해 이를 문서화하자고 주장한다.
분담 비율 조정은 각 기업 간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더 풀기 어렵다. 옥시는 이미 피해자 400여 명에게 3000억 원가량을 지급한 만큼 5000억 원 이상을 추가 지급하는 것이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애경산업도 분담 비율에 불만이 크다. 특히 애경산업 제품에 포함된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 등은 다른 살균제 성분과 달리 아직 폐질환 발생 인과관계를 놓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두 기업의 ‘타깃’은 SK그룹이다. 원료 물질을 만든 SK케미칼과 SK이노베이션의 총 분담 비율은 약 27%로 옥시의 절반 수준이다. 옥시와 애경은 원료 물질을 개발한 SK케미칼의 분담 비율이 제품을 판매한 자신들보다 지나치게 낮게 책정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책임 인정 않는 정부가 나설 때
어렵게 도출한 조정안을 이대로 폐기할 수는 없다. 피해자들과 옥시, 애경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7개 기업은 지난달 말 활동 기한이 끝난 조정위의 활동 연장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옥시와 애경산업을 설득 중이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모두를 100% 만족시키는 조정안은 없다”며 “현재 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두 기업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 구제를 민간 조정에만 맡길 게 아니라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있다. 피해자와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책임의 ‘절반’이 사실상 정부에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1994년 가습기 살균제 제품 출시를 허가했다. 환경부는 1997년과 2003년 원료 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PGH)’이 유독물질이 아니라는 판단도 내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드러난 이후 대처도 미흡했다. 2014년 3월 정부의 공식 피해 판정이 나왔지만 추후에도 정확한 실태 파악 노력은 지지부진했다. 피해 범위를 ‘폐 손상’에만 한정해 다른 질환 피해자들을 구제할 ‘골든타임’도 놓쳤다. 2017년에야 태아 피해와 천식이 피해 질환으로 인정됐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해결은 새 정부의 과제로 넘어왔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얼마나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조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이제라도 참사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는 지금까지 중재자나 심판인 것처럼 뒷짐만 지고 있었다”며 “추가 피해 보상과 정신적 트라우마 치유 등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피해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