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절기 ‘추분’이다. 밤보다 낮이 더 길었던 여름이 가고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가을이 왔음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고 한다. 가을 날씨를 느끼며 꿈나무 취재를 위해 수안역에 위치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 가게 되었다. 뜻 깊은 곳을 취재하러 가는 길인만큼 가는 길도 무척 어려웠다. 2호선에서 1호선으로 1호선에서 4호선으로 총 2번을 갈아타야 되었다. 수안역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올라오니 바로 역사관이 한 눈에 보였다. 우리기자단의 취재를 도와주실 김진숙 해설사분을 만났다. 인사를 하고 우리는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설명을 듣고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우선 이곳이 지금의 역사관으로 지어지게 된 계기는 2005년 부산교통공사의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해자가 발견되자 이에 따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수많은 인골과 다양한 무기류와 중요한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임진왜란의 참혹함과 선조들의 희생을 불사한 항쟁을 기리는 의미에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 지어지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동래읍성 모형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이 모형은 성벽 및 해자 발굴조사 성과와 ‘동래부순절도’ 내용을 토대로 임진왜란 당시인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성곽과 주요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동래읍성의 모형과 그 옆에는 한자로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전쟁을 하던 당시 동래읍성에서 일본이 한 말과 우리나라가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왼쪽에는 일본이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라고 적혀 있었고 오른쪽에는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이 말을 딱 들으니 우리 조상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느껴졌다.
동래읍성 전투의 진실은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고니시 휘하 군사들이 부산 앞바다로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날 왜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해오자 첨사 정발은 성을 순시하면서 군사와 백성들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반격하였으나 정오 무렵 총에 맞아 전사하셨으며, 수적 열세로 인해 결국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4월 14일 오후 선발대를 모내 동래읍성 남문 앞에 푯말을 세워 항복을 촉구하였으나, 송상현이 쓴 목패를 던져 단호한 항전의지를 보이자 3면에서 성을 포위하며 압박하였다. 이튿날 아침 왜군이 조총을 쏘며 전면 공격해오자 선내 군사는 물론 백성들도 맨손, 낫, 기와 등으로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력 부족으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왜군이 동북쪽 산의 성벽을 허물고 들어와 성이 함락되자 동래부사 송상현과 휘하 군관, 성안 사람들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마지막까지 송상현을 모시던 소길 금섬도 동헌 담장을 넘어 그에게 가다가 잡히자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셨다. 역사관에는 해골과 뼈들을 전시해 놓고 그때 당시 장수들이 입었던 옷까지 전시해 놓았다. 나는 이 역사관에서 가장 신기하였던 것은 동래읍성의 전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동래부순절도였다. 물론 진품은 아니지만 조상들의 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역사관을 벗어나 첫 번째로 간 곳은 두 번째로 간 곳은 장관청이라는 곳이다. 장관청이란 군관들의 집무소이다. 이곳이 원래는 없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이곳에 집무소를 만든 다음 군사통수권을 주었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오래되어 해체한 다음 다시 복원 중이라고 했다. 이 건물의 또 다른 중요함은 건축양식이다. 내가 건축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이 건물은 팔작 지붕에 ‘ㄱ’자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동헌으로 갔다. 동헌은 조선시대 때 부산시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또가 이곳을 다스리는데 여러 구역을 나눠져 있었다. 충신당 , 찬주헌 , 독경당 , 망미루 등이 있는데 충신당은 사또가 업무를 보는 곳이고 찬주헌은 부사의 경호실이고 독경당은 부사의 휴식공간이다. 망미루는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래에서도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는데 그때 망미루에서 모였다고 한다.
마지막인 네 번째로 간 곳은 박차정 의사의 생가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 투쟁을 하시다가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광복되기 1년전인 34세 때 돌아가셨다. 나는 독립을 1년을 남기시고 갔다는 말을 들으니 그렇게 독립 운동을 열심히 하셨는데 돌아가시니 너무 안타까웠다. 박차정 의사는 아버지, 큰오빠, 작은오빠 모두 항일운동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운동을 하다가 근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자 둘째 오빠의 말을 듣고 임철애라는 가명을 쓰고 중국 남경에 가서 활동 한다. 그렇게 하다가 결혼도 하시는데 그 분이 바로 조선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다. 당시 김원봉이 항일 투쟁을 하기 위해 세웠던 의열단은 다른 단체보다 더욱 치열김원봉은 항일 투쟁을 했지만 김구와 다르게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해방 이후에 월북을 하지만 북한사상의 잘못을 알고 비판하다가 숙청을 당한다. 나는 오늘 논술에서도 이분을 배웠는데 이분은 다른 여성 독립가이신 남자현이라는 분보다 더욱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셨고 더욱 치열하게 하셨다고 한다. 나는 앞으로도 우리들이 역사와 이런 여성 독립가들도 꼭 기억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