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만력 17년, 선조 22년(1589년)
성절사(聖節使) 윤근수(尹根壽)가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다. 명 나라 황제가 칙서와 《대명회전(大明會典)》
전부를 내려 주다. 칙서에 이르기를, “짐(朕)이 생각건대, 《대명회전》이라는 책은 우리 조종(祖宗)의 옛 법전이
고 국가의 확립된 헌장으로 원본은 내부(內府)에 수장하고, 그 부본(副本)은 유사(有司)한테 둔다. 외번(外藩)에
대해서도 경시(輕視)하지 않았으니, 그대는 대대로 직공(職貢)을 닦아왔고 일찍부터 충성을 지켜왔으며,
동한(東韓)에서 울타리 노릇을 하고 중국의 문물(文物)을 모방하였다. 여러 대를 두고 밝혀내지 못한
세계(世系)를 바로잡아 이미 간절한 기원도 달성하였으니, 밝은 시대의 영원 불변하는 책《대명회전》을
사모하여 잘 볼 줄로 여기노라. 짐은 그대 나라를 내지(內地)같이 보고 같은 문자(文字) 쓰는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대명회전》 전질을 내려 영구히 전하도록 한다.
이에 사신에게 주어 그것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그대가 애써 진정(陳情)한 지극한 뜻을 위로하게 하노라.
그대는 이 책을 받아가지고 이 장정(章程)을 법으로 삼으라. 이미 뚜렷한 영광을 받았으니, 은밀한 데에
소중히 간직하여야 한다. 그리고 어루만져 주는 은총을 생각하여 받드는 정성을 더욱 굳게 하라 운운.” 하다.
칙서가 도착하자 신민들은 기뻐 날뛰며 임금에게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弘烈)’이라는 존호(尊號)를
바쳤고, 이어 전국에 교서를 반포하고 증광과(增廣科)를 보이다. 이듬해 8월에는 광국공신(光國功臣) 해평부원
군(海平府院君) 윤근수 등 전후로 종계 변무(宗系辨誣)를 주청했던 19명에게 녹훈(錄勳)하다.
종계가 잘못 적힌 지 이때까지 2백 년이 되었는데 이를 군신(君臣)과 사민(士民)들이 다 함께 비통해 하고
답답하게 여겨 여러 대의 조정 신하들이 중국의 조정에서 늙어 온 터이니, 임금의 거룩한 덕과 정성 어린
효성에 감격하여 여덟 글자의 존호를 바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 왜인의 두목 평수길(平秀吉)이 중 현소(玄蘇)와 대마도(對馬島)의 □□□□□□ 등을 보내어 공물과 포로를
바치면서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간청해 왔는데, 그 사자를 동평관(東平館)에 머물게 하다. 동평관은 서울 남산
밑에 있었으므로, 그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불렀다. 신하들을 시켜서 이 일을 상의케 하고 이어 명 나라
조정에 자세히 상주하다. 이에 앞서 전라도 해변에 살던 백성 사화동(沙火同)이 표류하여 일본 오도(五島)에
닿았는데, 그가 그 섬의 왜인을 유인하여 해마다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었다.
수길이 국서를 보내어 통신해 오자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침범한다 하여 그를 책하니, 수길이 곧 오도에
명령을 내려, 사화동과 공모하여 침범한 왜적 신삼보라(信三甫羅)ㆍ긴시라(緊時羅)ㆍ망고시라(望古時羅) 등을
잡아 가지고 현소 등으로 하여금 압송해 와서 포로로 바치게 하였고, 또 전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 공태원
(孔太元) 등 80여 명도 데려왔으며, 동시에 토산물 준마(駿馬)와 공작(孔雀) 한 쌍을 바치고서 통신사 보내기를
청해온 것이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여 그 득실(得失)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즈음,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이 또 곧은
말을 하였다 해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가면서 상소하기를, “이적(夷狄)의 신의 없음이 개 돼지와 같으니,
지금 화친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만약 이번에 온 왜인을 목 베고 명 나라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면, 황제가 깊이 살펴서 끝내 우리에게 문책(問責)해 올 근심이 없을 것이고 왜적들이 위엄에
겁내서 침략할 뜻을 마구 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더욱 미친 소리라고 물리치다.
가을 9월. 홍문관 수찬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주살(誅殺)되다. 정 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덮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고매(高邁)하고 자중(自重)하는 체하
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士林)에서는 달려가서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는 황해도 안악(安岳)ㆍ재령(載寧) 사람들과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요사스러운 중 법연(法涓)을 시켜 왕래하면서 연락하게 했다.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이 고변(告變)하는 글을 올리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전주에서 정여립을 잡았다.
그때 정여립은 금구(金溝) 별장에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자기 아들 정옥남(鄭玉男)
과 함께 그의 도당 변숭복(邊崇福)ㆍ지경함(池景涵) 등을 거느리고 진안(鎭安)으로 도피하였다가 본현(本縣)의
원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히는 바 되다. 정여립과 변숭복은 곧 목을 찔러 자살하다. 민인백은 정옥남과 지경함
을 생포하고 역적의 시체들을 운반하여 모두 서울로 보내다. 변숭복은 일명 사(涘)라 했고, 지경함은 일명
함도(涵道)라 했는데, 나들이하고 길을 다닐 때면 두 가지 이름을 썼다.
○ 정옥남과 지함도가 서울에 잡혀오다. 지함도가 공술(供述)하기를, “저는 주먹으로 반석을 치면 돌이 부서져
서 번갯불같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도당 중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운운.” 하다. 즉일로 그들을 다
능지 처참(陵遲處斬)하게 하고, 민인백에게는 통정대부를 가자(加資)하고 예조 참의를 제수(除授)하다.
이듬해에는 녹훈(錄勳)하고 여양군(驪陽君)을 봉하다.
○ 서울과 지방의 사림(士林)들 중에는 역적 정여립에 관련되어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조정 안에서도 말에 연루되어 형을 받은 사람이 많다. 좌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강계(江界)로 귀양가서 돌아오지 못했고, 이조 참의 백유양(白惟讓)은 불복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신문을 받고 공술하기를, “아비가 모르는 것을 아들이 어떻게 알겠소. 죄가 있고
없음은 증거가 푸른 하늘에 있소. 둥우리가 뒤엎어졌는데 알[卵]이 어찌 홀로 온전하리오. 더 심문할 것도
없고 속히 죽여 주기 바라오.” 당시에 공술한 말들이 한정 없이 많았지만 이 말이 간략하고 분명하며 가장
슬프고 가련하다. 하고, 뒤이어 곤장을 맞다가 목숨을 잃다.
○ 근년 이래 한강 물이 계속 붉고, 요망한 여우가 어탑(御榻)에 올라간 일이라든가, 별들이 자주 떨어지고
암석이 자리를 옮긴 따위의 천변(天變)과 지괴(地怪)가 역사 기록에 잇달아 씌어지다.
○ 이듬해 8월에 평난공신(平難功臣)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 등 22명을 녹훈하다.
겨울 12월. 전라도 생원 정암수(丁嵒壽)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정 여립이 반역한 정상을 상세히
진술하고, 또 전에 정여립이 지리산에 들어가 열병(閱兵)할 때, 옥과(玉果)의 선비 양형(梁泂)이 문서를 맡아
보았다는 내용이다. 양형은 벌써 잡혀서 죽었다. 그런데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역적 모의의 전말을 너희들이
이토록 자세히 알았다면 왜 일찍 와서 고변하지 않았느냐.” 하고, 금부에 명해 체포하여 심문하게 하였으나,
도사가 정암수 등을 잡아서 천안(天安)까지 오자 석방하라는 특명이 내리다. 남원 사람으로 역적 사건에 연좌
되어 잡혀 심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정자(正字) 조유직(趙惟直)과 선비 신여성(申汝成) 두 사람뿐이었으
며, 역적 명부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잡지 못했고, 진주 사람 최영경(崔永慶)의 호가
삼봉(三峯)이라 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주-D001] 증광과(增廣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보여서 정원(定員) 외에 더 뽑는 과거를 말한다.
[주-D002] 동우리가 뒤엎어졌는데 …… 홀로 온전하리오 :
후한(後漢) 때에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잡혀 죽을 때에 그의 두 아들이 한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