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단체, 스웨덴 대사관 앞 한림원 규탄시위
윤석열 정부, 블랙리스트 가담자를 영화계에 배치
“약 한 달 뒤에 저는 만 54세가 됩니다. 통설에 따라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입니다. 물론 70세, 8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모로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니,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쓰다 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6년 동안 다른 쓰고 싶은 책들이 생각나, 어쩌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세 권씩 앞에 밀려 있는 상상 속 책들을 생각하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담담한 수상소감이 아닐는지. 지난 17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최초로 공식 석상에 섰다. 이날 한강 작가는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타워 포니정홀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올해 수상자로 무대에 선 뒤 위와 같은 소감을 전했다. 이어 한강 작가는 “다만 그 과정에서 참을성과 끈기를 잃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며 “동시에 일상의 삶을 침착하게 보살피는 균형을 잡아보고 싶습니다”라는 바람을 표현했다.
아주 담담한 소감을 전한 한강 작가 본인과 달리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전 국민적 환호와 응원이 이어지는 중이다. 특히 서점가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 작가 소설이 100만부 이상 팔리며 들썩이고 있고, 5.18과 4.3 등 작가의 역작들이 품어낸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도 재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이중 <순이삼촌>, <제주도우다>의 소설로 먼저 제주4.3을 알린 현기영 소설가는 같은 날 서울 삼청동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린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다’展 개막식에 참석,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과 이를 통해 제주4.3의 비극과 진상이 전 세계로 타전된 것을 상찬하고 나섰다.
현 작가는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쟁취해냈다. ‘작별하지 않는다’로 제주 4.3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단하다”며 “제주 4.3은 국제문제이다. 따라서 반드시 세계화가 필요하며, 미국의 범죄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4.3과 작별하지 않을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우리는 4.3과 작별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태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은 지난 14일 서울 중구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반대했다. 자신들을 대한민국애국단체협의회와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등 보수단체라 밝힌 회원 10여 명은 이날 ‘대한민국 역사 왜곡 작가 노벨상, 대한민국 적화 부역 스웨덴 한림원 규탄한다’는 현수막을 펼친 뒤 유튜브 생중계 등을 통해 “편파 편향된 역사 왜곡에 손을 들어주는 노벨상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스웨덴 한림원을 규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제주 4.3 폭동 미화와 광주사태 미화 작가에게 상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을 이어갔다.
서울 중구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극우단체들의 한림원 규탄 시위 장면. 이들은 모여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다.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극우 행태와 블랙리스트 재조명
이처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의와 가치를 폄훼하는 이들이 속속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영화평론가 출신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래와 같은 일침을 전했다. 18일 오전 한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 출연해서다.
“그러니까 그 프레임, 그 틀에다가 진짜 현실을 넣다 보니까 당연히 삐져나오는데 저분들의 문제는 뭐냐면 현실을 다 닫히고 이 프레임을 유지만 할 수 있다면 다 떼어버리고 다 고장 내고 거기다가 우겨넣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옆에 가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두드려서든 부수든 어떤 틀에 넣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경우고.
저는 좀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 레거시 언론과 정치인들의 말도 너무 웃긴데, 자꾸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을 정치화하지 말래요. 그게 뭐냐면 블랙리스트였던 사실을 자꾸 이야기하지 말라는 얘기랑 같은 얘기예요. 박근혜 정권이 주범 정권이다 보니까 그 부분에 대한 이제 범죄이력에 대해서 자꾸 드러나는 게 불편해서겠죠. 이거 너무나 1차원적인데요.
이걸 그냥 보편어인 정치화하지 말아라, 라고 얘기하는 거 자체도 또 하나의 프레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프레임으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다치는 건 한강 작가나 소위 말하는 진보가 아니라 그 반대에 있는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이 문제는 정말 과실은 따먹고 싶은데 노력은 또 안 하기도 하고 이 역발상 자체로 행위하고 있지만, 결국은 무임승차는 불가하다.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반성이라는 차비라도 내라, 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50대에도 계속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매진할 뜻을 비친 한강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재조명됐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국정감사장에서 불거진 여러 논란들이 이를 증명한다. 영화계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나선 양문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난 3월 27일자 ‘2024년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 사업 운영 용역사업 요청서’를 도마에 올렸다. 해당 요청서에 ‘정치적 중립소재와 특정 이념·사상을 배제한 영화 및 교육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진행’, ‘신규 특강진행시 사업담당부서와 특강 프로그램 협의후 진행’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영진위는 과거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시에 의해 블랙리스트를 이행해 비판을 받아왔던 기관이다. 양 의원에 따르면, 해당 요청서가 ‘정치·사상적 이유’로 창작자를 배제하는 한강 작가가 당했던 블랙리스트와 같은 양상이라는 것이다. 또 지난 7월 영진위 사무국장에 임명된 박덕호 전 영진우 경영본부장이 과거 블랙리스트에 가담해 징계를 받았던 이력의 소유자인 것도 문제시 되고 있다.
앞서 영화인들은 지난 16일 국회에서 ‘영화 지원 예산 및 정책 정상화를 촉구하는 영화인 기자회견’을 열고 문체부와 영진위 주도의 비정상적인 영화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영화계와 협력하여 가장 필요한 곳과 소외된 곳을 살피던 영화정책의 정상화와 한국 영화계의 근간인 기초 영화문화 지원 예산의 복원을 요구하며 국내 개최 영화제 지원 예산 복원, 서울독립영화제 지원 중단 즉각 철회, 지역 영화지원 사업 복원, 영화발전기금의 정상 운용을 위한 입장권 부과금 폐지 백지화 등을 요구했다.
한편 18대 대한체육회 노동조합도 3선 도전이 유력한 이기흥 회장의 불출마를 촉구하며 ‘대한민국 체육의 봄은 올 것인가?’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내고 문화체육관광부를 향해서도 과도한 체육단체 개입 대신 진정성 있는 체육 개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현 (대한체육회) 회장을 견제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어떠한가. 과거 문화계에서는 블랙리스트의 작성을, 체육계에서는 K스포츠재단을 비롯한 국정농단을 집행한 최전선에 있었던 부처가 문체부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6년에는 체육단체 선진화를 명목으로 대한체육회-국민생활체육회 간 통합을 단기간에 무리하게 추진하고, 대한체육회장 선거제도 역시 문체부 주도로 바꾸었다.
문체부가 만든 선거제도로 선출된 사람이 결국 현 이기흥 회장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문체부 차원의 반성이 있었던가? 그들은 오히려 여전히 이러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체육 개혁의 주체로만 포장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처럼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전 국민적 축하와 일부 극우 보수들의 폄훼· 왜곡이라는 정반대 행태들이 한국 사회의 단면으로 드러나는 중이다. 무엇보다 한강 작가가 과거 당한 블랙리스트의 주체였던 문체부와 같은 정부 기관이 여전한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는 것 역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달 말까지 예정된 국정감사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한강 작가의 수상 여파로 인한 블랙리스트 사건에 재조명은 쉬이 잦아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첫댓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꼭 실현되기를 정말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