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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황 순 원
태섭은 어떤 전문학교 강사로 있는 친구 부인의 소개로 소녀의 가정교사 일을 맡게 되었다. 친구 부인이 돌아가자 소녀의 어머니는 태섭더러 어떻게 그 부인을 잘 알며 언제부터 아느냐는 말을 꺼내었다. 태섭이 친구의 부인이라고 하였더니 소녀의 어머니는 애 셋이나 둔 여자가 머리를 잘라 지지고 옥색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늘 느껴오는 대로 태섭은 부인의 머리를 자른 것은 얼굴에 어울리지만 옥색 저고리는 검푸른 얼굴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아까부터 소녀의 어머니의 흐린 시선을 느끼면서 새로이 마주 쳐다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곧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움직임 없는 표정을 한 얼굴은 약간 부은 듯도 하였다. 그리고 심장이라도 약한 것이 분명하여 숨차하였다.
소녀의 어머니는 숨찬 음성으로, 부인과는 한고향이어서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안다는 말로 부인의 집에서는 지금 남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오랫동안 말썽이 많다가 종내 부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붙고 말았다는 말을 하였다. 붙었다는 자기 말에 소녀의 어머니는 스스로 귀밑을 붉히고 이어서, 부인은 여태까지 본가에는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후모 밑에서 자라난 탓이라고 하였다.
태섭은 소녀의 어머니의 숨차하는 말을 듣기가 거북스러워 소녀를 가르치는 것은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하코 일어서려는데 소녀의 어머니는 하루가 새롭다고 하면서 오늘부터 시작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소녀가 이렇게 학교에서 늦어지기는 처음이라고 혼자 웅얼거리고 나서, 초조하게 손을 치마 속에 넣어 궐련 한 개를 꺼내어 붙여 물고 두어 모금 빨았는가 하면 이번에는 놀란 듯이 담뱃불을 죽이고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미닫이 밖을 지나 건넌방으로 가려 할 즈음 소녀의 어머니는 별안간 크게, 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엄숙하게 이리 들어오라고 말하며 태섭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던 자리를 더 먼 거리로 움직여 앉았다. 소녀가 들어왔다. 한 손에 스파이크를 들고 있었다. 좀 전까지 운동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하여 얼굴이 불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둥근 얼굴에 검고 긴 눈썹 속의 눈이 좀 작은 편이나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태섭은 교과서를 뒤적이며 소녀에게 학교서 배운 데까지 알아나갔다. 그러면서 태섭은 소녀가 손가락으로 짚어 가리키느라고 어깨를 내밀 적마다 강한 자극을 가지고 엄습하는 향기름지 못한 땀내를 막아내기 위하여 담배를 피워 물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흘깃흘깃 태섭과 소녀를 번갈아 보면서, 정신 차려 잘 배우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다.
소녀의 어머니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받아가며 다음날부터 소녀의 예습과 복습이 시작되었다. 소녀는 어학에 관한 암송은 상당히 속했다. 그런 한편 수학에 있어서는 애당초 풀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마는 듯한 폐단이 있었다. 태섭이가 소녀에게 수학은 처음부터 싫어했느냐고 물으니까, 소녀는 그렇다고 머리를 크게 끄덕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풀어놓은 예제 같은 것은 혼자 이해하고 설명도 해나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섭이가 풀어주는 문제 같은 것도 마음만 내키면 모조리 이해하기도 하였다. 태섭은 소녀에게 수학을 푸는 데 있어 착안점을 바로 가지도록 가르치기에 노력해야 할 것을 느二끼면서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붉은 혀끝에 연필 끝을 묻혀내고 있었다.
태섭은 곧 숙제 중에서 제일 쉬운 문제를 골라서 소녀에게 풀라고 내놓았다. 소녀는 문제에 눈을 멈추고 그냥 연필을 혀끝에 묻혀내고 있었다. 태섭이가 착안점을 암시해주었다. 소녀는 그냥 연필을 혀로 가져가기만 하였다. 태섭은 문득 수학 문제보다도 앞에 앉은 건강한 소녀의 혀와 입술에 더 정신이 가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달으면서 저도 모르게 소녀에게서 연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태섭도 무엇을 쓰기 전에 연필을 혀끝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태섭은 이러한 자기 동작에 놀랐다. 문제를 잘못 풀었다. 아랫목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에게 공부하면서 실없이 웃어서는 못쓴다고 꾸짖었다. 소녀의 장난에 찬 웃음을 이마에 느낄수록 태섭은 다시 헛풀었다. 또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에게 웃지 말라고 꾸짖었다. 소녀는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열심히 이쪽을 살피고 듣고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우스워 그런다고 하며, 한층 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다음날도 휘파람을 불며 돌아온 소녀를 소녀의 어머니가 들어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또 되도록 태섭에게서 먼 거리를 잡느라고 움직 거렸으나 소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소녀의 어머니가 나갔다. 좀 만에 돌아온 소녀의 어머니는 고만한 몸 움직임에도 숨차하며 태섭에게 건넌방으로 가 가르치도록 말하였다.
건넌방에 소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꽤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소녀가 등진 벽에는 이제 바로 스타트하려는 단거리 선수의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앞으로 쏠리는 몸과 땅을 차려는 발끝의 아슬아슬한 균형, 그리고 한 초점을 강렬히 노리고 있는 눈, 이러한 런닝선수의 폼을 바라보면서 태섭은 소녀의 두꺼운 가슴이 테이프를 걸치고 골인하며 테이프 끝을 푸르르 날리는 장면을 머리에 그리고 저도 모르게 여윈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태섭은 이번에는 다리를 한옆으로 모아 눕히고 앉아 있는 소녀의 풍만한 무릎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급히 거두면서 가까이 있는 교과서 하나를 막 집어들고 뒤적이기 시작하였다.
소녀가 다리를 반대쪽으로 옮겨 눕히는 듯하더니 문득,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딘가 자기 집에 빈 구석이 느껴지는 게 있으리라는 말을 하였다. 태섭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교과서에서 고개를 드는데 소녀가 다시, 아버지가 없는 것을 이상히 생각지 않누냐고 하였다. .태섭이 이 집에 아버지 없는 것만은 소개한 친구의 부인한테 들어서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소녀는 곧,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소녀는 자기가 철들어서 아버지가 첩을 얻고 딴살림을 하게 된 뒤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산을 절반씩 똑같이 나누어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는 이야기로, 지금 얼마 멀지 않은 동네에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새 아버지는 재산도 다 없애고 얼마 전부터 류머티즘으로 자리에 누워 있다는 것과, 또 어머니도 그동안 울화병으로 심장병까지 생겼다는 말까지 하였다. 태섭은 위로의 말 대신에 대수책을 소녀 앞에 펴놓으며, 얼마나 어머니가 지금 소녀 공부 잘하는 것 한 가지만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니 어서 열심히 공부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별안간 소녀는 비웃는 듯한 이상한 웃음을 띠며, 그런 말은 어머니한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생각난 듯이, 그리고 누가 밖에서 엿듣기나 하는 것처럼 갑자기 앞 미닫이를 열었다. 뜰에서 소녀의 어머니가 김칫거리를 다듬다가 놀란 듯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태섭이 소녀의 집에 가닿게 되는 날이면 소녀의 어머니는 조심스레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 앉서는 소녀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좀 알기는 하더냐고 묻는 것이었다. 태섭은 그저 기억력은 썩 좋다고 대답할밖에 없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잠잠히 한참이나 앉았다가 이번에는 나직이, 공부도 공부지만 먼저 남자를 멀리하도록 잘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사실 요새 여자 안 속이는 남자 어디 있더냐고 하며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소녀의 어머니의 흐린 시선을 피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갑자기 소녀가 올 시간을 생각한 듯이 숨차하며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집에 돌아오자 태섭에게 내일은 일요일이니 교외로 피크닉 가자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태섭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혼자 결정을 하고는 앞 미닫이를 열고 부엌 쪽을 향해 내일은 선생님과 함께 소풍 가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느냐고 태섭을 돌아다보았다. 태섭은 교외에서 스파이크를 신고 달리는 소녀를 눈앞에 그리고 있다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음날은 흐렸다. 그리고 바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태섭은 교외로 갈라져 나가는 길 옆에서 소녀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소녀가 왔다. 태섭은 소녀를 보고 우선 놀랐다. 소녀는 제복이 아닌 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 저고리에, 푸른 바탕에 원앙새 무늬가 있는 긴 치마가 바람에 물결지으며 펄럭였다. 소녀는 치맛자락을 익숙하게 감싸쥐며 미소와 함께 옷맵시가 어떠냐고 묻고 태섭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태섭은 교외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혼잣말처럼, 제복을 안 입고 외출하면 안 되는 규칙이 아니냐고 하였다. 그리고 옆으로 와 나란히 서는 소녀에게서 제복을 입고 륙색을 메고 스파이크를 들고 한, 소녀와는 다른 완전한 한 여인을 발견하고 당황스레 흐린 하늘로 눈을 돌릴밖에 없었다.
소녀는 태섭처럼 하늘을 쳐다보는 법도 없이 무슨 날씨가 밤새 그렇게 나빠졌는지 모르겠다고 하고는, 잘못하다가는 비 맞기 쉬우니 교외로 나가는 것은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태섭이 아무렇게 하여도 좋다고 하니까, 소녀는 누가 뒤를 밟아 따르기나 하는 듯이 날렵하게 뒤를 돌아보고 나서 영화 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이번에도 소녀는 자기 혼자서 벌써 그렇게 결정을 짓고는 앞서 걸으며 태섭에게, 뒤 왼쪽 과일가게 옆 골목에 어머니가 따라와 서 있다는 것을 알리고 얼마큼은 교외로 가는 길을 가다가 보자고 하였다.
태섭은 담배를 꺼내어 물고 바람을 피하여 불을 붙이려는 몸짓을 하며 돌아섰다. 사실 소녀의 어머니가 과일가게 옆에 서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아서면서 좀 전에 소녀가 누가 뒤를 밟기나 하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던 일과 집에서 공부하다가도 누가 밖에서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앞 미닫이를 열곤 하던 일이 머리에 떠오르자 절로 등골에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태섭은 빠른 걸음으로 앞선 소녀를 따르고 나서 자기는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곧 소녀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어머니는 혹 딴 남자와 같이 가지나 않나 하여 따라나온 것이니 태섭과 만나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뒤를 다시 한번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소녀는 왼쪽 길로 꺾이어 지금까지 온 길과 평행된 좁은 골목을 접어들었다. 태섭도 그냥 소녀를 따랐다.
둘이 나란히 서서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을 소녀는 앞서 걸으면서, 어머니가 어디까지든지 남자를 경계시킨다는 이야기로, 사실 그러는 것도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받은 타격으로 보면 마땅한 일일 것이라는 말과, 전에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딴 여자들과 만낙다 못해 나중에는 그런 여자들을 집 안에 끌어들이기까지 하던 일을 어려서 보아 잘 안다는 말이며, 그럴 적마다 어머니는 이를 갈며 밤잠을 못 자고 울곤 하여 자기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죽어 있어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교외로 나가는 길과 평행된 골목을 다 지나 거리로 나섰다. 바람이 소녀의 원앙새 무늬가 있는 치마를 휘날렸다.
소녀는 이번에는 치마를 감싸쥐는 법 없이 새로 골목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소녀는 걸음을 멈춰 뒤에 따르는 태섭과 나란히 되며, 요즈음도 어머니는 그때에 받은 원통함을 도리어 그때 이상으로 살려가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여인들을 욕질하면서 으레 자기더러 납자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는 자기 하나만 의지하고 여태까지 살아오느라고 별의별 고생을 다 참아왔다는 이야기와, 어머니 없이 자라난, 태섭을 소개한 친구의 부인이 지금 남편과 제멋대로 결혼했기 때문에 본가에도 못 다니게 된 사실을 늘 되풀이하며 가엾이 여긴다는 이야기와 나중에는 반드시 죽기까지 모녀 단둘이 살다가 죽자고 다짐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어머니와 한 심정이 되어 아버지를 원망하고 여인들을 미워하면서 진정으로 일생을 불쌍한 어머니와 같이 지내리라는 결심을 해왔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에게 반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과, 요새는 지난날의 가슴 아픈 사실을 되풀이하며 자식에게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만 애쓰는 어머니가 가엾게는 생각되지만 그대로 좇아갈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태섭은 다 탄 담뱃불에 새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생각난 듯이 말을 이어, 어며니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 그것을 자기는 어머니가 마음 상할 때 피우곤 한 것이 인이 박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어머니는 오늘까지도 자기의 눈을 속여오고 있는 게 자식으로서 불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있은 일이라고 하면서, 첩이 찾아와 아버지의 류머티즘이 대단하다고 하며 어머니에게 약값을 좀 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자 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로, 네년이 그만큼 돈을 빨아먹었으면 됐지 나중에는 우리 것마저 빼앗아 먹으려 덤비느냐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 그리고 첩 되는 여인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재산을 나누고 갈라설 때 아버지와 만난 여자로 그때 벌써 두 애의 어머니인 과부였다는 말과, 그 뒤에도 아버지는 여자 관계를 끊지 않아 여러 가지로 고생을 하면서도 이 여인은 참고 끝내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며, 그날도 어머니는 그 여인에게 애 둘씩이나 있는 것이 남의 첩 노릇하는 개만도 못한 년이라고 욕을 몇 번이고 하였으나 소녀 자기는 전처럼 그 여인이 밉게 보이지는 않더라는 말과, 마침내 그 여인이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이리 와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자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고 이를 갈면서, 저 좋아 잡년하고 붙어살다가 이제 돈 다 없어지니까 쫓겨나는 사람을 자기는 맡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르고는 그만 졸도해 넘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이야기 도중에 잡년하고 붙었다는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졸도해 넘어졌다는 말을 하면서도 소녀는 대수 문제를 풀 때보다도 긴장된 빛을 띠지 않았다. 끝으로 소녀는 어머니가 졸도해 넘어진 것을 보고 의사를 부르러 달려가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어머니보다도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그 여인에게 더 동정과 호의가 감을 어쩌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태섭은 할 말을 몰라 그저, 어머니의 심장병도 대단한 것 같더라고 한마디 하였다. 그리고 태섭은 여기서 문득 소녀의 어머니는 친구의 부인과 자기 사이에 무슨 추잡한 관계나 있는 것으로 억측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처음부터 소녀와 자기 사이까지 감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온몸을 한 번 떨었다.
소녀는 태섭을 쳐다보며, 바람은 좀 있으나 그렇게 떨릴 정도로 추우냐고 하고는, 어느새 티 없는 미소를 얼굴 전체에 퍼뜨리면서 저쪽 영화관이 있는 골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소녀의 미소는 골목 옆 다방 앞에 서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자 더 똑똑히 새겨졌다. 그리고 소녀는 태섭과 함께인 것도 잊은 듯이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태섭은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눈썹이 검은 소년. 소녀와 무슨 말을 하는 동안 소년의 검은 눈썹 때문에 더 흰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듯하다가 소녀가 다시 태섭에게로 걸어올 ˙때는 또 창백해지는 듯하였다. 태섭에게로 오더니 소녀는 먼저, 소년은 동무의 오빠라는 말을 하고 그 동무가 지금 앓아누워서 자기를 만나자고 한다는 말을 하였다. 태섭은 속으로 거짓말 말라고 하면서도 그럼 가보라고 하였다. 소녀가, 온 김에 영화 구경이나 하라는 것을 태섭은 일부러 온몸을 떨어 보이며 갑자기 따끈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고 하면서 피하듯이 다방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하루는 소녀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소녀의 어머니가 조심히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 잠잠히 앉았다가, 요즘 소녀가 어떤 남자와 만나는 눈친데 그런 것 같지 않더냐고 하며 얼굴을 붉혔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곧 머리를 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해버렸다. 소녀의 어머니는 또 잠잠하다가 이번에는 혼잣말처럼,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자기는 그 애를 놓아주지 못한다고 하고는, 소녀가 올 시간이 생각난 듯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소녀가 돌아왔다. 그리고 소녀는 대수책을 펴놓자 소년에 대한 말을 꺼내며 소년이 서울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집에 와 있다는 말까지 하고는 어딘가 모르게 태섭과 같은 데가 있다고 하였다. 태섭은 공연히 귀밑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결국 소녀가 요새 어머니에게 반항심이 생긴 것은 소년을 안 뒤부터 이리라는 것을 깨닫고, 소년의 신경질스러운 얼굴이 남을 속일 것 같지는 않지만 요즘 남자들의 속을 누가 알 수 있느냐는 말에 이어 사실은 지금 자기는 자기 자신의 속도 종잡을 수 없어서 애쓴다는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소녀는 눈을 빛내며, 신통히도 어머니의 말을 옮긴다고 하였다.
태섭은 펴놓은 대수책에서 인수분해 문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소녀는 노트를 끌어다가 무딘 연필을 혀끝에 찍더니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노트가 태섭의 앞에 와 놓였다. 노트에는 답 대신에 ‘겁쟁이 선생’이라는 말이 씌어져 있었다. 태섭은 소녀에게서 얼핏 '연필을 빼앗아가지고 낙서한 곳을 두 줄 길게 그어버리고는 이렇게 쉬운 문제를 못 풀면 어떡하느냐고 하면서 고개를 들다가 윗구석에 세워둔 창이 눈에 들어오자 운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타일렀다.
소녀가 일어나더니 창을 잡고, 요즘 창던지기를 시작하였는데 자세가 바로잡히지 않는다고 하면서 왼팔을 앞으로 뻗치었다. 태섭은 또 여기서 소녀가 창을 어깨에 메듯 하고 달릴 때 날릴 머리카락과 던진 창이 그리는 선명한 호선을 눈앞에 떠올리고 있는데, 소녀가 창을 내려놓고 역시 방구석에 놓여 있는 원반을 들었다. 소녀는 원반 든 팔을 던질 듯이 저으며, 원반이나 창을 경계선 바로 전에서 던지고 나서 앞으로 쏠리는 몸을 경계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멈추는 데 여간 쾌미가 있지 않다고 하면서, 사실 그때만은 집안일이나 수학 숙제 같은 것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계속 원반 든 팔을 저으며 빙그르르 돌았다. 태섭은 소녀의 오른 손목에 감긴 붕대를 지켜보다가 다시 빙그르르 돌려고 하는 소녀의 팽팽한 가슴에서 호크가 벗겨지면 어쩌나 하고, 원반을 피하듯이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물러나 앉는 태섭의 무릎에 소녀의 몸뚱이가 와락 와 쓰러졌다. 태섭이 미처 팔로 소녀의 몸뚱이를 받을 새도 없이 태섭의 약한 몸은 소녀의 풍만한 육체를 감당치 못하고 뒹굴고 말았다.
태섭이 몸을 일으키면서 앞 미닫이부터 열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수돗가에서 나물을 씻고 있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문을 열어놓으면 정신이 산만해져 공부가 안 된다고 하면서 미닫이를 닫았다. 태섭이 소녀의 서툴게 그린 원과 꽤 곧게 그은 직선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는 기하 노트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기하책은 펼 생각도 않고, 지금 자기가 쓰러진 것은 요즘 몸이 약해진 탓이라고 하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번에는 제 손으로 앞 미닫이를 열었다. 그리고 수돗가에서 아직 나물을 씻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어머니에게, 오늘밤은 학교에서 수양 강연회가 있어 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어머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미닫이를 닫고는 태섭에게 나직이, 오늘밤에 꼭 할 말이 있으니 아홉시에 교외로 나가는 길 오른편 늪으로 와달라고 하였다.
태섭은 이날 밤 소녀를 기다리며 타원형으로 된 늪 둘레를 돌있다. 먼 시계탑은 소녀가 만나자던 아홉시가 지나 있었다. 태섭은 저만큼에서 끊어진 가로수 쪽을 지켜보며 소녀가 나타나면 나무와 소녀 어느 쪽이 더 달그림자가 짙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문득 자기의 그림자를 찾았으나 자신의 그림자는 검은 늪에 떨어져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태섭은 다시 늪가를 돌기 시작하였다. 검은 늪을 내려다보면서 태섭의 공상은 자기가 이번에 늪을 한 바퀴 다 돌기 전에 소녀가 몰래 숨어와서 자기의 눈을 가리는 장난을 하고, 그러면 자기는 처음으로 소녀의 손을 잡고, 그러면 소녀는 할 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원반이나 창을 던지고 난 순간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같이 늪으로 뛰어들어보자고 할 것이고, 자기는 또 그러기를 허
락하여 둘은 그 원앙새가 쌍쌍이 뜬 무늬가 있는 치마로 허리를 묶고 늪에 뛰어들 것이고, 그렇게 하여 둘은 늪 밑으로 가라앉노라면 늪 밑 어느 한구석에서 솟아나오는 차가운 샘물이 둘의 등을 스치고 지나갈 것이고, 그러면 둘은 퍼뜩 정신이 들어 늪 속을 헤어나오려고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고, 그때 갑자기 소녀는 짐 되는 자기를 허리에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자기는 또 떨어지지 않으려고 소녀의 머리칼을 꽉 감아쥘 것이고, 그러면 나중에 소녀는 자기를 허리에 단 채 헤엄쳐 늪 밖으로 나올 것이고, 거기서 자기는 소녀가 허리를 풀어놓는 대로 추워서 덜덜 떨밖에 없고―사실 태섭은 떨고 있었다.
늪가를 다 돌고 다시 가로수 쪽을 살폈을 때에는 찬 밤기운에 몇 번이고 온몸을 떨었다. 태섭은 먼 시계탑을 더듬었으나 그새 고장이 났는지 시계탑의 전등이 꺼져 있었다. 태섭이 다시금 가로수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자기의 여윈 달그림자를 발견하고 자기의 것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놀랐다. 그리고 지금 어디쯤에서 소녀의 어머니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환각을 일으키고 나서, 소녀의 어머니는 자기를 소녀 앞에 내놓고 무슨 일이 생기나 실험을 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자 새로 온몸이 떨렸다. 그만 거리로 발길을 돌리면서 태섭은 기울어진 달을 쳐다보며 지금쯤 소녀와 소년이 늪 아닌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 환영을 그리고는 자기의 달그림자를 소녀의 어머니와 소녀와 소년의 것으로 몇 번이고 착각하면서 그때마다 온몸을 떨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태섭은 자리에 누워 며칠 동안 열로 떨면서 앓았다. 열과 오한이 없어진 어느 날 아침 태섭은 머리에 동였던 타월을 풀고 일어나 오래간만에 물뿌리개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섭은 무심코 앞 유리창에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 움직임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자기의 야윈 얼굴이 비친 것으로 알고 무심히 여겼으나 나비의 날개 같은 그림자는 또 움직이는 것이었다. 태섭이 고개를 들고 자세히 보니 원앙새가 있는 무늬였다. 놀라 돌아섰다. 뒤에 어느새 소녀가 들어와 서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치마는 원앙새 무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풍랑이 일어난 바다 무늬가 있는 치마였다. 태섭은 이상한 현기증이 나서 베드에 주저앉았다.
소녀는 베드 옆의 가스스토브를 만지며 늪에 못 간 변명으로, 사실은 그날 밤에 소년과 거리에서 만나 함께 늪으로 가서 태섭에게 자기들의 앞일을 의논하려던 것이 그날따라 집에 혼자 남을 어머니가 불쌍하게 보여 그만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하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는 말을 하였다. 소녀는 이어서 그날 밤 소년은 자기를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소년을 배반한 줄로 알고 머리칼을 잘라 자기에게 보냈더라는 말까지 하였다. 태섭은 또 열이라도 생긴 듯이 한 번 떨고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소녀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태섭이 짐짓 엄한 어조로, 그런 광대놀음을 하는 소년 가운데 더 불량한 애가 많다고 하였다. 소녀는 태섭이 자기의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다고 하며 눈을 빛내었다.
태섭이 이번에는 소녀에게 나타나는 어떤 새 힘을 깨달으면서 불쌍한 어머니를 어떻게 하려느냐는 말과 소녀가 없어지면 어머니는 졸도하여 깨어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였다. 소녀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당돌한 말씨로, 병든 아버지를 집에 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졸도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사실은 지금 소년과 자기는 어디로 떠나는 길이라고 하였다. 태섭이 일부러 냉랭한 어조로, 소년과 함께 떠난대도 멀지 않아 불행해질 것이라고 하니까, 소녀의 손이 날아와 태섭의 뺨을 갈겼다. 그리고 소녀는, 악마, 악마, 하고 두어 번 부르짖고 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네는 행복해 보이겠다고 소리치고는 빛나는 눈에 눈물을 내돋히며 풍랑이 인 바다 무늬가 있는 치마를 물결지으면서 도어를 밀고 나가버렸다. 아파트의 유난히 잔 층계를 소녀가 몇 개씩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태섭은 무언가 안정된 심정으로 다시 물뿌리개를 들어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끝-
2016년 5월 1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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