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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산 북악산(백악산.342.5m)청운대(293m) 2016년 4월 12일. 부부산행, 2,213회 산행,
코스 : 홍제역 2번출구(3호선)-인왕산 기차바위-자하문(창의문)-북악산(서울성곽)-숙정문-말바위 안내소-청와대길-경복궁역(3호선) (5시간 10분)
*서울 성곽*
서울 성곽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가 되었다.
내사산이란 북쪽으로 이 곳 북악산과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 동쪽으로 낙산을 말한다.
성곽은 이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가 되었다고 하지만 적을 방어하는데 편히 하도록 바깥쪽 경사면 조금 아래쪽으로 축조하였으며 돌로 만들어진 석성이다.
"성은 나라의 울타리요, 강폭 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다." 라고 한 조선 초대왕의 유언처럼 중요한 국가시설로 관리되었다.
600년 동안 이어 온 서울성곽은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상당부분이 파괴 되어 현재는 총 성곽의 둘레 18.2Km중에 10.8Km가 복원된 상태이다.
*서울의 4대문*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그리고 각 대문들의 사이에,편의를 위해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동소문인 혜화문을,
동문과 남문 사이에 남소문인 광희문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서소문인 소의문을,
서문과 북문 사이에 북소문인 창의문을 두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동대문이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참고 사항 :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동 : 타락산, 서 : 인왕산, 남 : 목멱산, 북 : 북악산이다.)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헐리기 전 돈의문의 모습, 책자에서 스캔한 사진이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숭례문은 옛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며 정문이기도 했다. 국보 제1호>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얼마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했던 일이 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 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숙정문(肅靖門)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혜화문(惠化門)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도성의 동소문이었던 혜화문, 1970년대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광희문은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었던 광희문, 사방으로 길이 뻗친 가운데에 서 있어 애처롭다.>
1915년에 자연 붕괴도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1970년대 후반 현재와 같이 복원 되었다.
소의문(昭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었던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옮겨온 글)
5시 32분차로 홍제역에 내려 양평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지난번 하산했던 환희사입구를 거쳐 다시 인왕산을 거쳐 창의문으로 갔다.
환희사 앞 인왕산 들머리.
들머리 이런 바위도 만나고......
앞전 다녀왔던 안산.
기차바위.
기차바위.
가게될 북악산.
북한산도 건너다 보고...
인왕산 정상,
아슬아슬해 보이는 바위.
기차바의봉.
인왕산,
건너다 보이는 남산.
성곽.
기차바위와 진달래.
북악산을 향하여.....
성곽.
성의 높이가 대단하다.
산벗이 한창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정,
시비.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성벽에 서있는 노송.
창의문(자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정종수경사 순직비.
청계천 발원지.
창의문 (자하문)
9시 입장,(신분증 대조후 출입증받음)
자북정도?
성곽길.
돌고래 쉼터.
북한산,
계단길(성곽)
백악산(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산.
근무자에게 부탁.
백악산 최정상.
북한산,
청운대.
성벽의 높이.
백악산 모습.
바위를 움켜진 소나무.
숙정문.
숙정문,
북악 팔각정
말바위 안내소,(출입증 반납)
탐방 안내.
진달래는 지고 산벚이 절정이다.
말바위.
산벚,
청와대 앞,
경복궁으로 통하는 신무문,
우리부부도 셀카로.....
(서울 성곽 둘러보기)
“서울성곽”은 4대문인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과 4소문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포함,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에워싸고 있는 도성으로 국보 8개를 포함하여 총 169개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이 곳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의 성곽 길은 개별 코스로 트래킹 가능하지만 네 곳이 18.7㎞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서울 성곽 둘레 길은 그 안에 깃든 역사와 문화 생태를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트래킹 코스이다.
오늘 산행할 북악산 성곽코스는 1960년대 북한과의 냉전 상황에서 전면적으로 통제되었다가 2006년에 개방되었지만 청와대와 인접한 관계로 여전히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수도방위사령부 등이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산행 때 다 돌아보지 못한 구간을 오늘에서야 오게 되었지만 역시 창의문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가관(加冠)임에 틀림없었다,
북악산은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 기반암은 화강암으로 인왕산(仁王山)·낙산(駱山)·남산(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이들 산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일명 紫霞門)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노송(老松)이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고 그 남쪽 기슭에 청와대가 있다.
창의문에서부터 정릉(貞陵)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三淸)공원이 있다.
참고로 서울 북악산 일원은 우리나라 명승 제 67호이다.
13차 백두대간도 마쳤고 14차도 여러 산악회와 시간 되는대로 했더니 이미 절반 이상을 한 상태라 금년 일찍 마칠 수 있을 같다.
오늘은 지난번 내려왔던 곳으로 다시 올라 창의문으로 내려가서 출입증을 받고 성곽 길을 돌아 본 것이다.
산길과는 엄연히 다른 길이지만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성곽 길도 걸어보면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고향생각에서부터 친구들 생각을 하니 먼저 간 친구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늘 내 자식들 생각이었는데 요즘엔 아무런 생각 없이 내 산행계획만이 집중되어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 길이 바로 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식들 보기가 괜히 미안할 때도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걷다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 하는데도 뭐가 그렇게도 바빠 이렇게 안달을 하는지 나도 나를 잘 모를 때도 있다.
이제는 불평불만도 공염불이다.
내일이면 국회의원도 결정 될 것이지만 가만 보면 웃기는 사람이 진짜 많은걸 보면 국회의원의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좀 그렇고 그런 마음이다.
우린 어디 할 일이 없어 산으로 피신온건 절대 아니다.
산에서의 생활도 엄연한 현실이라 도리 킬 수 없는 현실을 그냥 손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가는 것으로 봐 주길 바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던 모든 것을 나 스스로 결정하고 나 스스로 밀고 나가는 것이며 내가 이세상의 중심이 되고 어려움을 견디며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도 기루게 되는 것이다.
바위벼랑에 몸을 비틀어가며 매달려있는 우리 소나무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저렇게 강한 생명력이 어쩜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전수해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해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거센 벼랑에 매달려있는 것 같은 노송(老松)의 살아온 내력(來歷)을 어찌 우리가 다 알겠는가 만은 멀리서 볼 때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건 사실이나 만고풍상(萬古風霜)에 온 갗 고초 다 겪으며 살아온 모진 생명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저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나도 산행을 하다 보니 72세라는 삶의 무게가 온 몸에 느껴지는 것 같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변한다는 사실 하나라고 한다.
무심코 산길을 걷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바닥이 날 때가 있다.
별안간 허기에 몰릴 때는 인내심(忍耐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야말로 통제 불능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할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고 한다.
당장은 힘이 들고 어려워도 지나고 보면 그때가 오히려 행복했고 즐거워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무조건 길을 걸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과 내 가슴으로 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마 나의 DNA 아닌가 싶은 마음이다.
고통(苦痛)을 이기는 방법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고 서로를 느낄 수 는 있어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수십 년을 같이해온 집사람 속마음도 잘 모르는 주제에 뭐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남에게 해(害) 되지 않게만 산다면 그 길이 바른길이고 정직한 삶이라고 힘주어 말 하는 것이다.
오늘은 가벼운 산길이지만 같이한 집사람에게 감사하며 행복한 꿈을 꾸고 싶은 마음이다.
아름다운강산 정병훈 하문자.
첫댓글 설명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