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왕위 계승자로 결정된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이 서무를 결재하며 정무를 담당하던 대리 정치.
대리청정을 시행하는 이유는
다음 왕위 계승자에게 경륜을 쌓게 하려는 교육의 의미를 지녔으나, 때로는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하다 즉위한 왕은 태종·문종·예종·경종이 있으며,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 승하하였다.
세제(世弟)로는 영조, 세손(世孫)으로는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내용및 변천>
① 조선전기 세자의 서무 참결
국본(國本)인 세자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정종대 이래 있어 왔다.
1400년(정종 2)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한 후 세자부(世子府)로 인수부(仁壽府)를 설치하고 군국 중대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정종실록』 2년 2월 4일) 정종은 이방원이 국초에 공이 많고, 이는 태상왕 태조가 장래를 위해 결정한 것이라 하였다.
이때의 세자, 곧 태종의 정치 참여는 정종의 양위(讓位)를 위한 절차의 의미를 지녔다.
세종은 스스로 세자로서 수업을 받지 못하고 즉위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세자 대리청정을 계획하였다.
1437년(세종 19)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442년(세종 24)에는 세자의 서무 처결 기관으로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여 대리청정을 확정하고 1445년(세종 27)에는 세종이 병으로 정무 처리가 불가능하다며 세자의 서무 결재를 명하였다.
이때 인사·형정·군사처럼 중요한 사안은 왕이 담당하고, 그 외의 정무는 세자가 결재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왕과 세자의 업무 분담은 이후 대리청정의 선례가 되었다.
② 조선후기 세자의 대리청정
숙종에서 영조대까지는 대리청정이 연이어 시행되었다.
1717년(숙종 43) 숙종은 자신의 눈병을 명분으로 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숙종이 노론과 소론의 대립 속에 노론의 의리를 인정하였고, 노론 대신과 독대 직후 대리청정을 발표하였기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문제가 소론 측에 의해 제기되었다.
1721년(경종 1)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한 후 경종의 질병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가 실패하면서 신축환국이 발생하였다.
1749년(영조 25)에는 15세의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세자는 1762년(영조 38) 대리청정 중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사망하였다.
1775년(영조 51)에는 고령으로 인한 영조의 건강 문제로 세손의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다.
대리청정의 명칭은 숙종대 처음 사용하였으며, 이때 ‘청정절목’을 만들어서 왕과 세자의 권한을 명문화하였다.
그 내용은 세종대에 중요한 사안은 왕이 담당하고, 그 외의 정무를 세자가 담당했던 것을 따랐다.
또한 이 시기의 대리청정은 붕당 간의 대립이 치열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가운데 시행되었던 만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시행된 바가 크다.
1827년(순조 27) 순조는 자신의 건강 약화와 세자에게 경륜을 쌓게 한다는 명분으로 19세였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결정하였다.(『순조실록』 27년 2월 9일)
그러나 실제는 안동김씨 외척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순조의 정국 운영이 여의치 않자 세자에게 기대를 갖고 추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세자가 승하하면서 대리청정을 통한 순조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