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에 관한 명상
삼 월 중순부터 문화원 미술 강좌에 나갔다. 섬에 내려와 수영과 수채화 기초를 배우기로 생각했는데, 코로나 여파로 화실은 조금 늦게 문을 열었다. 오래전 읍사무소 건물을 문화원으로 쓰는 형편이라 좁은 면적에 다닥다닥 건물을 지어 주차장은 물론이고 마당조차 없다. 입구엔 나이 든 향나무 두 그루가 근육질의 우람한 몸통을 드러낸 채 장승포 항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견디고 섰다. 문화원에서 부랴부랴 수강생들의 주차를 해결하기 위해 근처 모텔 주차장을 임대했다.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대낮에 모텔에 간다.
수영은 핀 수영으로 2km를 주파하게 되었다. 그림은 그릴수록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스킬에 관한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터. 중요한 건 대상에 대한 꾸준한 관찰과 색감을 빚어내는 능력이다. 습속에 젖은 형태의 인식은 상징과 연결되기 때문에 창작을 방해한다. 사물과 풍경을 있는 그대로, 뚫어지게 분석하고 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힘이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재일 작가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므로.
대상을 발견하고 파악하는 과정은 주제를 발굴하는 일이다.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 시인은 독일로 건너가 고대 근동 고고학 박사 학위를 땄다. 중동의 고대 도시에서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을 발굴하던 그녀는 늘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했다. 음악가 윤이상도 거실에 통영항의 사진을 걸어두고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했다. 고향은 두 사람에겐 닿지 않는 꿈의 대상이었다. 시와 음악으로 빚어낸 두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이따금 추억한다.
이층 화실에서 화장실에 내려가거나 옆 건물 옥상에서 바람을 쐬며 서성이면 문화원 뒤란의 풍경이 들어온다. 담쟁이덩굴에 덮인 오래된 폐가 뒤로 고등학교 건물이 올려다보인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음악이 비틀스의 'Hey Jude'인데 플루트로 연주해서 운치 있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땅에서 넘어와 쓰러질 듯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 아래 오종종하게 초록색 열매를 매단 비자나무가 서너 그루 있는데 무성한 이파리가 그늘을 이뤄 마치 밀림을 연상케 한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비릿한 냄새가 청량한 기운을 내게 전염시킨다. 일층으로 내려가 사물놀이 반을 지나 왼쪽 모롱이를 돌면 좁은 공터가 나오는데 거기엔 팔손이나무와 까마득히 키를 세운 삼나무가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취미 삼아 그리던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뒤로 내가 초록 색깔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됐다. 사람의 간섭 없는 수목 일을 이십 년 했으니 자연스레 초록 물이 든 모양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풀에 관한 이야기다. 겨울 지나 봄 오면 산에 들에 도시의 흙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나 초록 싹이 올라온다. 풀들의 잔치다. 지구의 행성에 산소를 품은 대기를 만들고 생명을 살게 한 광합성의 원조 수목의 계절이다. 산책로와 공원에는 정성 들여 가꾼 화단에서 온갖 색깔과 모양의 꽃이 차례차례 피었다 진다. 짭조름한 바람을 마시며 걷는 이에게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부러 꾸민 꽃 외에도 산야에는 들꽃이 얼굴을 내미는데 이름을 몰라도 낮게 핀 그것들을 만나면 무릎을 굽혀 들여다본다. 공원을 관리하는 이에겐 성가셔도 잔디밭을 점령한 토끼풀이나 민들레도 제 몫을 하는 들풀이다.
바람결이 눅어졌을 무렵 문화원 뒤란에서 풀 싹이 올라왔다. 처음엔 작은 들깻잎만 한 이파리가 햇볕이 들락 말락 한 곳에서 키를 세운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날이 갈수록 풀은 키를 높이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듯 다른 가지를 자꾸 밀어냈다. 사진에 담아 검색하니 알 수 없는 이름만 튀어나왔다. 난분분하던 벚꽃이 지고 사월 말께엔 새파란 가지 끝에 꽃망울을 달기도 했다. 풀도 산달이 차면 꽃을 피우겠거니 했다. 가만 보니 건물을 처음 지었을 때 누군가 시멘트로 바닥에 부러 만든 화분이었다. 흙을 담아 뭔가를 심었는데 그것의 정체가 이 녀석인진 몰라도 마치 예전부터 주인인 양 보였다.
화실에 나갈 때마다 이 풀을 보는 즐거움이 생겼다. 만약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면 누군가 무심코 머리채를 잡아 뽑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풀의 생김새는 그저 흔한 잡풀이었다. 봄이 되어 농사를 시작하기 전 농부는 논두렁 밭두렁에 제초제를 친다. 김매기나 예초기는 힘에 부치니 간단히 농약으로 해결하는 거다. 글리포세이트(Glyphosate)계통의 비선택성 제초제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풀을 뿌리째 말려 죽인다. 다음 해에 날아온 풀씨가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들풀은 사라지고 벌겋게 죽은 흙의 피부가 드러난다. 오염과 약탈의 농법이다.
풀은 건강하게 자랐다.
그늘 조명에서도 이파리의 초록빛은 광택을 띠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와의 은밀한 만남이란 짜릿한 흥분을 몰고 왔다. 칠한 지 오래된 페인트 벽과 시멘트 화분에 갇힌 풀은 사방 사십 센티미터의 공간에서 허공을 향해 맘껏 몸을 부풀렸다. 비가 내리는 날엔 잎들이 빗물을 한데 모아 흙을 적셨다. 해가 내리쬐는 날에도 광선이 비켜가는 공간이라 가물을 탈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풀은 궁핍한 생존 조건에서 무탈하게 일상을 꾸려가는 중이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의 존재감으로 살아가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많으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래알 같은 미물의 집합이 서로 등을 기대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순수를 꾸미지 않아도 순수한 것들의 행위는 그대로 하나의 경이다. 권력과 부를 좇는 사람들의 열정은 비슷하거나 소박한 욕망을 가진 자들을 초월한다. 그들은 세상을 쥐락펴락하면서 진실을 조작, 은폐하는 걸 취미로 삼는다.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패러다임을 바꿔야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역사는 혁명가의 희생만큼 바뀌어 왔지만 언제나 규칙적인 건 아니다.
오월로 접어든 어느 날 팔레트와 물통을 듣고 수돗가로 갔다. 붓을 비벼 물감을 닦아내고 새 물을 담아 올라가려다 풀이 있는 뒤란으로 갔다. 저런! 풀은 종처럼 생긴 꽃망울을 여기저기 달아 놓았다. 한눈에도 초롱꽃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주렁 하게 달린 꽃망울은 개화를 앞두고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었다.
앎은 삶이다. 앎으로써 타인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다. 타인에 대해 몰랐고,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타인의 열정에 감염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열정, 즉 냉정의 열정 낮은 온도의 앎이다. 타인이란 역사와 시대의 너이고 나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태를 아우른다.
언젠가 다시 봄이 온다면 섬의 문화원 뒤란 구석진 곳의 풀을 찾아 그간의 안부 서로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