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193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전통적, 불교적(禪的), 고전적, 주정적
◆ 표현 : 수미쌍관적 구성
순 우리말을 잘 다듬어 사용('하이얀', '나빌레라', '파르라니', '감추오고',
'모도우고', '감기우고', '귀또리', '외씨 보선', '살포시', '이밤사' )
대립적 구도 : 천상 < ================================ > 지상
(해탈과 염원의 세계) <--------------- (고뇌와 번민의 속세) 춤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사(紗) → 비단. 나빌레라 → 나비같구나. 박사(薄紗) → 얇은 비단
* 고와서 서러워라 → 역설적인 표현
현란한 아름다움보다, 내면에 깊은 시름과 서러움을 머금은 것이 오히려 곱게 느껴짐을
표현한 것임.
*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오동잎이 떨어질 때마다 달을 가리는 모습을,
달이 진다고 표현함.
* 5연 → 비교적 빠른 박자에 맞춘 날렵하고도 경쾌한 춤 동작. 역동적 심상
* 6연 → 움직이는 듯 정지하는 찰나의 명상의 정서를 그린 것
* 별빛 → 종교적인 소망(염원)의 대상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 별빛을 바라보며 흘리는 이 눈물은, 속세의 번민으로부터 해탈을 염원하는 참회의
눈물이라 할 수 있음.
*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세속의 정한에 시달리면서 얻게 된 온갖 번뇌(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망념들)를
이겨내기 위해 별빛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모습
* 거룩한 합장(기도) → 세속의 번뇌를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의지
* 8연 → 유장한(느린) 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대목
* 9연 → 깊은 밤 춤을 종료
◆ 주제 ⇒ 인간 번뇌의 종교적 승화 삶의 번뇌와 해탈의 염원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3연 :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고깔, 머리, 볼)
◆ 4연 : 춤추는 무대(배경) 제시(가을 밤과 넓은 무대)
◆ 5연 ∼ 8연 : 춤의 동작 (7연 - 주제연)
◆ 9연 : 춤의 종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승무"란 흰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추는 독무(獨舞)를 가리키는 말이다. 승무가 독무, 즉 혼자서 춤을 추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이 작품은 춤추는 사람의 내적 고뇌를 드러내려는 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춤추는 사람은 젊은 여인이다.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밤에 혼자서 춤을 추는 여인은 아마도 남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무슨 사연이 있어 여승이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도 한다.
시인은 '승무'를 단순한 무용의 의미보다는 세속의 번뇌를 극복하려는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에서 지상적 번뇌를 벗어나 천상적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서정적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즉, 승무를 통해 속세의 번뇌와 집착을 뛰어넘는 종교적 해탈의 경지를 갈망하는 것, 이것이 이 시의 주제의식이다. 시인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고전적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한 고전적 소재는 섬세한 언어를 통해 진가가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오동잎이 달빛을 받으며 떨어져 내리는 밤. 아무도 없는 빈 무대에 황촉 불을 켜 놓고 춤을 춘다. 그러므로 이 춤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니라, 자신의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몸짓이며, 가없는 영혼의 세계를 향한 간절한 발돋움일 터이다.
'복사꽃 고운 뺨', '까만 눈동자' 같은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나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는 표현을 보면,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하여 세속적인 영화(榮華)를 멀리하고 승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연유를 밝히지는 않는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 세속은 어차피 번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춤 동작은 그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몸짓에 걸맞게 완급을 드러내 준다. 멎는 듯 움직이고 움직이는 듯 멎는 그 동작을 통해 우리는 고뇌를 이겨내려는 한 여승의 자기 정화의 몸부림을 보는 듯하다.
발은 이 번뇌의 땅을 디디고 있지만, 눈은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향해 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표현이 드러내 주고 있는 바, 지상적·세속적인 번뇌를 통해 여승은 종교적·초월적으로 승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무의 창작 과정] : 조지훈 <나의 시 나의 시론>에서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 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 그 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翹翹)한 달빛과 동 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 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 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작가소개]
조지훈 : 조동탁 시인, 수필가
출생 : 1920. 12. 3. 경상북도 영양
사망 : 1968. 5. 17.
가족 : 아들 조태열
데뷔 : 1939년 문장 '고풍의상' 등단
작품 : 오디오북, 도서, 기타
본명 동탁(東卓)이며, 경상북도 영양(英陽)에서 출생하였다.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쳤으며,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이 《문장(文章)》에 추천되면서 등단하였다. 같은 해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후,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경기여고 교사를 지내다가 고려대학교 문리과(文理科)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여 교수에 이르렀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지훈의 시풍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그 이전의 시가 자연과 무속 등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동양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이후에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였다.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로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19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