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31> 1534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왜 로마교황청과 결별했을까?(上)
‘사랑’과 ‘아들’ 둘 다 얻고 싶었던 헨리 8세
영국의 군주제를 확립한 국왕, 그 과정에서 많은 신하를 무참히 죽인 냉혈한,
무엇보다도 총 6명의 왕비를 거느린 호색한으로 더 유명한 인물.
바로 영국 튜더 왕조의 2대 국왕 헨리 8세(Henry Ⅷ·1491~1547) 이야기다.
그가 이토록 여러 명의 왕비를 두게 된 직접적 계기는 바로 후계를 이어갈 왕자를 얻기 위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헨리 8세의 6명의 왕비들 |
왕세자 형 아서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 오르게 된 헨리 8세
형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결혼, 왕비에게서 딸만 얻게 되자
후계자 문제로 조바심, 마침 나타난 앤 불린 매력에 푹 빠져
이혼 원해…로마교황 허락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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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헨리 8세는 1517년 대륙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루터의 행동을 거세게 비난함으로써 로마 교황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까지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종교로 나아가려고 했을까? 이에 대한 잉글랜드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로마교회와 결별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이후 영국사 및 유럽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
헨리 8세를 알려면 먼저 선왕 헨리 7세의 업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헨리 7세는 영국의 긴 내전인 이른바 장미전쟁을 끝내고 튜더 왕조를 개창, 영국 근대역사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백년전쟁(1337~1453)을 치른 후 곧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거의 30년 동안 서로 죽이고 죽는 혼란기를 겪었다. 왕권을 둘러싸고 힘센 귀족 가문들끼리 격돌한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붉은 장미 문장의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 문장의 요크 가문이 맞붙었다. 아무리 해도 승부가 나지 않자 랭커스터 가문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와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결혼하는 것으로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치열한 내전의 혼란 상황에서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7세는 1485년 웨일스를 통해 귀국했다. 이어 벌어진 보즈워스 전투에서 왕위찬탈자였던 리처드 3세 군대를 물리치면서 오랜 무정부 상태를 마감할 인물로 급부상했다. 백성의 기대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권좌에 오른 후 그는 귀족 세력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다. 이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튜더 왕조의 토대를 굳게 다졌다. 특히 그는 관용과 통합의 정치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귀족들의 군사적 도전을 원천 봉쇄하는 사병 보유 금지 법령을 반포했다. 죽기 전까지 헨리 7세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진력했다.
원래 헨리 8세는 왕위를 물려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위로 아서라는 형이 있어서 그가 잉글랜드의 차기 왕이 될 참이었다. 헨리 7세는 유럽 열강의 주도권 다툼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재임 중 특히 대유럽 외교에 매진했다. 그래서 강대국 스페인 왕실과의 결속을 확고히 하려는 계산 아래 장남 아서와 스페인 공주 캐서린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캐서린은 통일 스페인 왕국의 공동 왕이던 아라곤 국왕 페르디난트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1501년 겨울에 잉글랜드 왕세자 아서는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결혼했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 후 겨우 5개월이 지난 1502년 봄 아서가 당시 유행하던 열병으로 불과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겨우 10대 중반이던 캐서린 공주가 청상과부로 남게 됐다. 그런데 큰일이 난 것은 캐서린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애써 구축해 놓은 스페인과의 친선관계가 위태롭게 됐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책이 동생인 헨리를 캐서린과 결혼시킨다는 것이었다. 개인들의 의사보다는 결혼을 통한 양국 간 동맹 형성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형수와 결혼할 운명에 처한 헨리는 당시 겨우 10살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일단 약혼식만 하고 결혼식은 헨리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 거행하기로 약속했다.
1509년 헨리 7세가 서거했다. 18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은 헨리는 부왕의 유언에 따라 여섯 살 연상의 캐서린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어서 즉위식을 끝내기가 무섭게 왕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놀새’ 기질로 악명이 높지만, 사실상 헨리 8세는 다방면에 걸쳐 재능이 많은 인물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고품격 교육을 받은 덕분에 그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했고, 르네상스기에 유행한 라틴어 고전도 두루 섭렵한 바 있었다. 당대 영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신학은 물론 천문학에 관해서도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였다. 더구나 승마와 사냥, 활쏘기, 마상 창 시합과 같은 각종 스포츠에서도 수준급의 실력을 발휘했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헨리 8세가 크게 신경을 쓴 문제는 하루속히 후계자를 얻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대륙의 정세 변화와 맞물릴 경우, 외세와 결탁한 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받을 수 있는 소지가 상존했다. 그런데 문제는 왕비 캐서린이 좀처럼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차례 사산을 거듭하다가 가까스로 1516년에 낳은 자식이 나중에 ‘블러디 메리’로 불리는 딸 메리였다. 그토록 고대한 아들은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아들에 목을 맨 이유는 충분했다. 만일 딸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할 경우, 애써서 개창한 튜더 왕조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물론 치열한 왕권쟁탈전으로 잉글랜드가 재차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예를 장려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자신이 맘먹은 일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루고야 마는 냉혹한 성품의 헨리 8세였으나 자식 문제만큼은 뜻대로 이룰 수 없었다. 더구나 헨리 8세는 천성적으로 호방한 성격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속칭 밤 문화를 즐기는 방탕한 끼마저 있는 인물이었으니 오죽했으랴. 뭇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할 뿐 초조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헨리 8세 앞에 매력 만점의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났으니 바로 앤 불린(Anne Boleyn)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에게 시집을 간 헨리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궁정 시녀였다. 부친이 외교관이었기에 앤 불린은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앞선 궁정 예법에 익숙해 있었다. 이러한 그녀가 귀국해 런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련된 궁정 매너와 우아한 자태로 인해 곧 헨리 8세의 눈에 들었다.
앤 불린의 매력에 쏙 빠진 헨리 8세는 그녀로부터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 싶었다. 그녀에 대한 열정은 왕위후계자 문제에 대한 헨리의 조바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런데 앤 불린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만만치 않았다. 일단 당사자인 캐서린이 응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당시 왕실의 이혼문제는 로마 교황의 허락이 필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형수와의 결혼을 승인한 교황의 조처는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결혼 결정은 근본적으로 무효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문제는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때마침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손아귀에 있었기에 헨리의 요청을 들어주기가 곤란했다는 점이다. 카를 5세가 자신의 숙모인 캐서린의 이혼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헨리 8세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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