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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37회 윤 영연 동문이 최근 서울 로타리 클럽 회원들에게 약 40분에 걸쳐 강연한 내용입니다. 강연 내용이 다른 동문들에게 소개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아 소개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선택된 축복된 삶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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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제가 이자리에 선 것은 네번째인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1994년에 제가 로타리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제 소개겸 인사였고, 두번은 제가 현직에 있을 때므로 제가 전공한 회계학과 관련한 말씀을 드린 적이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은 얼마전 회장님으로부터 말씀 부탁을 받고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수락은 했으나 무엇을 말씀드릴까걱정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정년퇴임했으니 학문과 관련된 말씀을 드려야 진부할 것 같았기에 차라리 인생의 황혼기에 선 제가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역정을 고명하신 여러회원님들앞에서 증언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앞날은 한치앞도 바라볼 수 없지만 지나온 과거를 뒤돌아보면 참으로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그 때마다 위험할 때는 방패로, 망설일 때는 좋은 길로 인도하신 이가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저 자신도 시골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 평생을 보냈을 수 도 있었는데, 오늘에 이르렀음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사람들은 운명이라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제 고향은 충남 청양군 칠갑산 기슭의 두메산골이고 그 지방은 대대로 유교사상이 깊이 뿌리 박힌 곳입니다.면암 최익현선생이태어난 곳이기에그분의 제자들이 많이 있어 유학자로 활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그분의 제자로서 한학자이셨는데, 제가 두살 때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의 제자인 글방선생님에게““우리 손자를 훌륭한 한학자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유언에 따라 저는 5세부터 10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5년간 5권의 한문책을 배웠는데 이는 읽고 쓰고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당시는 어린 나이임에도 배운 한문 문장을 많이 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오늘날 영어공부도 그런 방식으로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영어를 문법적으로 배우기에 대학을 졸업해도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느날 갑자기 저는 ““이러다가는 한 생전 시골에서 썩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나도 남들과 같이 학교를 가야지””하는 생각에서 집에서 약 5km쯤 떨어진 국민학교를 맨발로 달려갔습니다(당시는 다 맨발이었음). 선생님을 붙들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왔다고 했습니다. ““몇살이냐”” 하기에 열살이라 했더니 ““너는 나이도 많고 지금 입학기도 아니니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 말씀에 저는 ““한글도 알고 구구단도 외운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신기하셨던지 책을 읽어보라해서읽었고 구구단도 외웠더니 저를 교장실로 데려가 자초지종을 말하니 교장선생님도 신기했던지 저에게 책을 읽어보라고도 하고 구구단도 외어보라 해서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이는 제가 한문을 공부하면서도 언제인가는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에서 틈틈이 한글과 구구단을 외웠기 때문이였습니다. 이에 교장선생님이 ““이 아이를2학년으로 입학시켜보라””해서 저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학하여 약 2개월 후 여름방학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너는 나이도 많고 공부도 잘 하니 2학기부터는 3학년으로 다니라””해서 저는 실제로 3학년부터 국민학교를 다닌셈입니다.
제가 5학년때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1년후에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저는 6학년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근동의 부여중학교는 가기가 싫었고 꼭 대전중학교에 가고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전시일뿐 아니라(휴전 전이므로) 대전에는 아는 사람도, 친척도없었습니다.
고향에서의 거리는 불과 50여키로미터 떨어졌지만 전시인 당시는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지금 미국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기에 부모님들은 14세인 저를 대전에 가는 것을 극구 말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6학년 2학기 때인데 도청에서 산림과의 공무원 두분이 출장 중 저의 집에서 약 5일간 유숙했는데(당시는 인근에 여관이 없었으므로) 저는 이분들에게 잘 보이면 대전중학교에 갈수 있는 길이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 분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아침에는 세수물을 떠드렸고 저녁에는 방에 군불을 때드렸으며 이부자리도 펴드리고 담배심부름도하고…………,급기야는 그분들에게 제가 대전중학교를 가고싶다는 말과 만일 가게 되면 선생님 집에서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 분이 쾌히 승낙하시면서 명함을 주어서 저는 그 분을 도청으로 찾아가 제가 원했던 대전중학교에 입학했고 그 분 집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대전고등학교를 진학했고 3학년 때까지도 저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가려고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가난했던 시절이였기에 약대를 가면 경제적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3학년2학기 때에 우연히 신문에서 고려대학교에 경영학과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겼다는 기사와 함께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이 학과가 각광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약대는 돈은 벌지는 모르지만 하루종일 약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경영학과를 나오면 외부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진로를 경영학과로 바꾸었습니다(당시는 문과 이과의 구분 없이 공부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음). 그런데 막상 이 학과에 지원을 하니 저와 같은 생각을 한 학생들이 많았던지 당시로서는 각 신문에 날 정도로 지원자가 많아 경쟁률이 24:1이나 되었습니다(60명모집). 제가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더니 지도교수님이 저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여 1964년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때마침 고려대학에서 처음 설립한 기업경영연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대학(고려대 이화여대 한양대 중앙대)에 출강했습니다. 그후 저는고려대학에 연구교수제가 생기면서 연구전임강사의 발령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하반기부터 5-6년간은 제가 공인회계사로서 정부기관의 일을 많이 한 기간이었습니다. 이는 제가 1967년도에 대통령 특명감사단원으로 임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면서 국영기업체의 비리를 척결하겠다는 의지에서 만든 것이 국영기업체 특명감사단이였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청와대가 경제기획원에 명하여 소위 ““때묻지 않은 사람””으로서 회계학전공의 학계 인사 10여명의 추천을 의뢰하였는데, 그 중 6명이 공인회계사였습니다. 저는 공인회계사 본시험 제7회에 합격하였는데, 한 회에 25명 정도가 합격하였으므로 당시 공인회계사 숫자는 많아야 2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현재는 공인회계사 등록회원만도 16,000여명이라함).
당시 저는 적지않은 하사금도 받았고 피검사기관에서는 커피도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맡은 감사대상은 한국전력으로 약 3개월간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생각하기를 내가 여기서 잘못하면 나의 생명은 끝난다는 소명의식에서 어떤 압력이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고 감사에 임하였습니다. 감사보고서는 청와대로 직접 보고되었고 이 감사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문책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그 중 한분의 이사는 박대통령군인 시절의 운전기사로서 이 분이 한전의 실권자라고 들었고 실제 그 이사분 산하에 인사처와 구매처가있어 인적 물적 자원 모두 그 분이 관장하고 있었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건설부로부터는 건설업면허 심사위원이 되었고(당시 국토건설청이 건설부로 되면서 새로운 건설업법이 제정되어 기존 건설업 면허를 취소하고 새 건설업법에 의하여 합격하는 업체만 새 면허를 발급해주는 일의 심사위원이 된 것임) 상공부로부터는 주요공산품 가격 결정 심사위원이 되어 자동차 냉장고 TV 등 각종 주요 공산품의 가격 결정에 참여했습니다(당시는 경쟁가격이 아닌 독과점 가격이므로 원가계산에 기초한 가격을 관에서 정했음). 동시에 국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수출업체에 대한 수출보조금을 결정하는 보조금 심사위원도 했습니다. 그 후 보사부로부터는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의료수가 심사위원도 했고,서울시에로부터는 수도국을 수도사업소로 독립시키면서 수도사업특별회계 연구위원으로도 일한 바 있습니다.
저는 1975년 분주했던공인회계사 일을 접고 대학에 복귀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공인회계사로서 활동하는 동안 어느 정도 경제적 유익은 있었지만 당초 저의 목표였던 학계로의 진출은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한편 그 때는 이미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웬만한 대학에는 경영학과가 다 있어 공인회계사도 많이 배출되어 공인회계사의 희소가치도 그만큼 저감될 때였습니다.
저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고 인근의 동덕여자대학교에 조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동덕여대에서는 2005년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사무처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부총장의 보직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교수 재직 중저는 아무리 보직으로 바쁘더라도 교수의 본분인 강의와 연구에는충실해야겠다는 생각에서 1년에 1편 정도의논문은꼭 발표를 하였고(28편), 미국에 교환교수로도 다녀왔습니다.
이렇듯 저의 생의 길은 결코 순탄하였다기 보다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그 때마다 피할 길을 주셨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생의 굽이굽이마다 조그마한 열매도맺게 해 주셨습니다. 유교의 고장에서 14세의 어린 나이인 저를 전시중임에도 멀리 대전으로 불러내시어고향생각 부모님 생각에 가눌 수 없었던 저의 공허함을 믿음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대학진학 때는 전공의 진로를 약학과에서 경영학과로 바꾸어 공인회계사로 일할 기회를 주셨고, 그 결과물로 생긴 조그마한 경제적 유익이 씨앗이 되고 아내의 경제적 노력과 협력으로조그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쓸모 없었던 압구정동의 야산 일부를 구입한 것이 훗날 빌딩을 지을 수 있는 터로놓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땅을 구입할 당시는 그 땅에 묘소가 3기나 있을 정도의 허허 벌판 중의 값싼 야산이였습니다. 다만 그 위치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이었기에 나중에 채소밭과 넓은 정원을 갖춘 집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의 구입에도, 훗날 이 땅에 건물을 올린 것도 저의 처의 역할이 컸음을말씀 드립니다. 1968년도에 결혼한 아내는 남편인 제가 대학교수를 경제적 안정 위에서할 수 있도록 히기위하여결혼한지 1년후부터 벽시계공장을 시작했습니다. 공장은 인천시 십정동 소재 나환자의 재활촌이였는데 공장위치를 이 곳으로 택한 것은 자금이 적으니 저렴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였고,아무도 고용해주지않는 그들의 자녀를 채용해주니 공임도 저렴할 뿐 아니라 주민들의 협조가 컸기때문이였습니다.
한번은 공장에서화재가 발생하여 전소할 위기였는데 전 주민들이 단결하여 진화해서 무사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저의 아내는 그분들과 같이 지내면서 벽시계 공장을 했는데(당시 신문에는 육영수 여사가 이곳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악수한 것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음), 이 업종을 택한 것은 당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서민층에서는 벽시계가 새벽잠을 깨워 일터로 나가게 하는 수단이였기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의 어려움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기술적으로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정밀공업인 벽시계는 수많은 부품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돌아가야 시계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러기에 저의 처는 갓난 두남매를 떼어놓고 아예 공장에서 살다시피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한 가내 공업이였기에 필요한 부품을 그때 그때 조달하여 생산에 차질 없이 해야하고 또한 한 부품이라도 결함이 있으면 제품 자체의 생산이 불가능하기에 그러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시계가 양산되면서 중동의 수출 붐을 타고그 곳으로의 수출길이 열렸고 국내에서도 많은 수요가 있었으며 국가에서는 수출진흥정책으로 보조금을 주면서 싼 이자의 수출금융도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호황기에 열심히 노력한 결과 부평에 1,600형 규모의 공장도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업을 오래하지는 않겠다고. 압구정동의 땅에 건물을 올리고 제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공장도 접고 전 가족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때 저를 따라 미국에 간 두 남매가 미국에서 공부하여 장남은 펜실바니아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공부하여 삼성전자에 근무하다 현재는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고, 소아과의사인 며느리와의 사이에 손자 둘을 두고 있습니다. 딸은 버클리대학 학부와 스탠포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현재 저의 모교인 고려대학 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열매라 생각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내는 저와 같이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다가 늦게 신학을 공부하더니 지금은 목사가 되어(학부는 고대) 20년가까이 섬기는 독거노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연륜을 다 하매 교수로서, 공인회계사로서, 장로로서의 모든 현직은 다 내려놓고 비상임으로서 전에 있던 대학(재단이사)과 제가 관련하던 몇 회사의 비상임 감사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은 시간을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와은혜를 주셨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입니다. 노년에 외국어를 공부하면 정신건강에 좋다하여 그렇게 해볼까도 생각하였으나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암송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지하철 이용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전철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기 위하여 암기를 시작하였고(성경을 소지할수 없으므로)이렇게 시작한 암송이 지금은한 시간 이상의 암송분량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취침전 기상후 운동하면서 걸으면서 전철을 타면서도 암송을 하면 시간가는 줄을 몰라 합니다.특히 감사함은 제가 연륜을 더 하면서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었음에도 말씀암송의 기억력은 줄지앟게 해주시고,암송의 속도는 더 하게해 주셨습니다. 더욱 은혜스러운것은 세상의 글은 아무리 명문장이라도 반복하여 읽고 또 읽으면 실증이 나게 마련인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고 또 암송할수록 그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임을 실감 합니다.
주신 시간(40분) 다 되어 말씀을 맺습니다. 두서 없는 말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믿음이 가득한 삶을 훌륭히 살아오며 쌓은 탑에서 나오는 눈부신 빛을 보기라도 할 것만 같은 정제된 살아 있어 숨쉬는 명문 잘 읽어보았습니다. 윤 박사에게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이 늘 함께 하시어 건강과 영광 믿음의 여생이 더욱 빛나길 바라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운 대고 37동창의 자랑이라 여겨집니다.
인생 여정의 파나로마를 보는 듯 글 잘 봤습니다. 참으로 후회 없을 삶을 살아 왔군요. 존경합니다.
박천규 임정빈 동문 글에서는 많이 대했으나 졸업 후 너무 격조햇는 데 변변치 못한 사람 너무 극찬래주시니 몸둘바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 젊은 시절 동창들과 많이 교유하지못한 것을 아쉬워해서 지금은 동창들 모임에 열심히 나가고 있는 데 동창들이 변함헚는 우정으로 저를 대해주어 너무 고맙고 늘 빗진자의 심정이랍니다. 남은 여생 마음으로나마 그때 그 시절 그 온기로써 변함 없는 우정과 사랑 나눕시다.
자서전, 감사합니다. 건강하시니 가끔 백수 등산도 즐기시고 또한 축복이십니다.. 癸巳年에는 종종 見面해야지요!
'나의 삶, 나의 길"...처음 부터 끝 까지 참으로 감명깊게 읽었네. 그 어느 누구의 자서전 보다도 가장 큰 감동을 받았어요. 날마다 더욱 강건하시기를...
윤교수의진솔한 삶의자세가ㅡㅡ존경스럽네
나혼자 보기에 아까운 내용이라 동문 카페에 올렸는데 조회수가 200이 넘었다니 올린 나도 고맙구려. 오히려 이 글을 읽고 자기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아쉽고 안타깝게 느끼는 친구도 많았을 것 같아 염려되었습니다. 여러 동문께서 이런저런 상념을 뒤로하고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데 대해 다시한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蛇足: 윤영연 동문께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본인의 변함없는 의지와 꿈으로 이룩한 오늘의 영광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가끔 작은 배려로 37동문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별 생각 없이 지난 일 회상하였는 데 동문회 카페에 소개되고 많은 분들의 방문과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특히 분에 넘치는 동문들의 댓글 감사드립니다.글 중에는 내가 마치 선민인양 과찬하셨는 데 나도 "목의 가시"도 있고 남 모를 상념도 많은 사람이랍니다. 이호영 동문 불편한 중에도 "우리들 대화의 장"을 만들고 관리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