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민철(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선생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당시 역사비평사 발행 『우린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1998)에 수록한 것으로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총독관저를 드나든 조선인들
김민철(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1. 민족을 분열시킨 사이토총독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고토가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경성역에 도착하였다. 3․1운동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조선민족의 독립 의지를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가 조선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형식상 현역 군인이 아닌 예비역 해군대장을 총독으로 부임시킨 것이다. 역은 신임총독을 영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내노라하는 친일파와 귀빈들로 붐볐다. 오후 다섯시였다. 사이토는 기차에서 내려 마중나온 관리들과 악수를 하고 역 2층 귀빈실에 들른 뒤 광장에 준비된 쌍두마차에 올라탔다. 바로 그때 요란한 굉음이 나더니 폭탄이 터졌다. 순식간에 37명이 부상당하고 현장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이토는 멀쩡했다. 폭탄이 마차 앞에 떨어져 파편이 사이토의 혁대를 스쳤을 뿐이었다. 사이토는 혼비백산하여 마차를 몰아 총독관저로 줄행랑을 쳤다.
이것이 바로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암살 사건이다. 사이토는 이후에도 몇번 암살의 위협을 받는다. 심지어는 총독관저에까지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총독은 독립지사들에게 암살 제1호의 대상이었으며, 조선민족의 원한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은 침략자의 대표일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군주이기도 하였다. 어느 일본학자의 지적처럼 조선총독은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다만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면서 조선의 사법, 행정, 입법의 삼권을 한손에 장악하여, 법률에 해당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소천황”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기에 군통수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총독의 말은 곧 법인 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권력자가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면, 당연히 그의 관저는 이권청탁과 정치공작으로 온갖 파리떼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특히 식민지 조선처럼 견제세력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식민지사에서 통감(1910년 총독으로 바뀜) 관저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부정부패와 정치공작의 근원이 되었다.
그런데 총독을 알현(?)하기 위해 총독관저를 뻔질나게 드나든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들도 끼여 있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권을 청탁하기 위해 온 경우는 대개가 비서진에서 알아서 처리하고 총독은 결재만 하기 때문에 웬만한 거금이 아니면 총독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다간 배탈이 나는 수도 있고, 높으신 분(?)께서 직접 구정물에 손을 담그는 것은 체면상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총독을 직접 알현한 인물들은 대개가 일제의 정치공작, 즉 민족운동 진영을 분열시키거나 일제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는데 동원된 고급 친일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친일파를 이용한 정치공작은 성격상 비밀리에 추진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그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다행히도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민족분열정책을 실시하던 1920년대는 사이토가 남긴 풍부한 문서를 통해 진실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무단통치’로 악명높은 데라우치보다 더 효과적으로 조선을 지배했다고 평가받는 사이토는 다른 어느 총독보다도 친일파들을 많이 만났다 한다.
2. 화류계를 친일화시켜라
사이토는 1920년께 ‘친일세력 육성․이용을 통한 민족운동 분열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민족운동 억압총노선’이라고 평가받는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이라는 구상을 세웠다. 여기서 그는 경술국치 때까지 이용한 친일파만으로는 3․1운동 후의 식민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즉, 새로운 친일세력을 육성해서 조선민족을 분열시키지 않으면 그 지배가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일제가 민족분열정책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추진했는가는 단적인 예로 화류계의 친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 이후의 화류계에 대해 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냈던 지바(千葉了)는 “1919년 9월 우리가 처음 경성에 왔을 당시의 화류계는 ……기생 8백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독립격문”이었다고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썼다. 첫째, 경성 시내의 기생 전부를 시내 각서에 불러 엄중히 훈계한다. 둘째, 윤치호가 회장인 교풍회와 제휴하여 시내 각 권번의 역원과 경찰 간부가 모임을 가져 불령한 음모를 방지하도록 협의한다. 셋째, 새로이 권번을 허가하여 기생을 친일화시키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끝으로는 내선(內鮮) 화류계의 융화를 촉진시킨다. 이른바 ‘당근과 채찍’이라는 전형적인 지배수법이었다.
당시 경성에는 대정․한남․한성․형화 네개의 권번이 있었다. 반일적이던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선 지바는 이강 탈주사건 때 수사상 공로가 있었던 조선인으로 하여금 대동권번을 설립하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일어와 일본노래를 가르치면서 각종의 특혜를 주어 보호했기 때문에, 기존의 네 권번 소속의 기생들과 지방 상경자들의 가입이 늘어갔다. 그 결과 “그토록 험악을 극했던 음모의 소굴로 음부(陰府)나 다름 없었던 화류계가 지금은 내선일여(內鮮一如)를 구가하는 봄날의 꽃동산이 되었다”고 지바가 자랑할 만큼 화류계의 친일화가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화류계까지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정도로 일제의 친일파 육성․보호 공작은 치밀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공작의 최상층에는 사이토가 자리잡고 있었다. <표>는 사이토가 총독 재임 시절 만난 조선인들을 재일사학자 강동진씨가 시기와 횟수로 나누어 정리한 자료이다. 이들은 이왕가를 비롯하여 친일관료, 직업적 친일분자, 귀족, 부호, 언론인, 그리고 민족주의자 등으로 다양하다. 이 가운데 친일관료, 직업적 친일분자, 부호,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만남의 성격과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자.
3. 친일관료―바늘구멍에 들어간 낙타들
사이토가 취임한 후 조선인 관리를 중요 친일세력으로 키워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앞잡이로 이용하려고 했다. 따라서 재임 중 군수급 이상의 숱한 조선인 관리를 접견했으며, 관리의 임용․승진에서도 ‘능력’과 아울러 ‘친일성’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것은 왕족이나 귀족 등 옛 친일파의 이용가치가 줄어든 것과 내외정세가 능률있는 식민지 관리의 확보와 이용을 더욱 더 요구하고 있던 사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즈음하여 많은 하급관리가 민중의 투쟁에 자극받아 직접 투쟁에 참여하거나 사직․태업 등으로 공공연히 저항해서 그 결과 지배기구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던 때인만큼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1920년 초 사이토총독은 ‘이 기회에 조선인 관리의 상벌을 분명히 하고 양부(良否)를 가려내어 관규를 숙정’하고 ‘배일사상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꾀하거나 제국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꾀하는 것은 물론, 적어도 반국가적 태도를 취하는 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차없이 엄벌에 붙이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많은 조선인 관리들이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반면에 ‘친일성’과 ‘충성도’를 인정받은 자는 승진을 보장받았다. 3․1운동 때 군수였던 박영철은 궐기한 민중을 모독하는 발언을 <매일신보>에 발표해서 그 ‘공’을 인정받아 도참여관으로 승진하였다. 또 사이토 밑에서 군수에서 참여관으로 출세한 한규복처럼 사이토총독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거나, 민정시찰에서 보여준 충성이 인정되어 충북지사로까지 파격적인 ‘영진’을 누린 남궁영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밖에도 박중양이나 윤갑병처럼 일부 친일관료는 총독에게 직접 자신의 ‘친일’ 공적을 자랑하여 승진을 애걸하는 추태를 부렸다. 사이토의 일기에서 군수급 이상의 조선인 관리가 수없이 총독관저의 문을 두드린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좁은 문’이었던 참여관으로 승진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군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문안을 여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수급 이상을 친일파라고 규정해도 하등의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의 고급 친일관료는 크게 세 층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제국의 관리 출신, 둘째는 대졸 출신 등 엘리트 계층, 셋째는 순사․면서기부터 밟고 올라간 전형적인 승진․출세형들이다.
이들 중 먼저 대한제국 관리 출신은 ‘합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 관리로 변절한 계층이다. 전력에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중용되거나 승진 후 발탁되거나 하였다. 일제하에서 도지사 경력을 지녔던 42명 가운데 절반인 21명이 이 계층에 속한다. 총독부 개설과 함께, 즉 1910년 10월 1일자로 도지사 발령을 받은 사람은 박중양과 신응희, 이규완, 이두황, 이진호, 조희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이진호는 연무공원 졸업 후 평남관찰사를 지냈으며, 일제하에서는 최초로 학무국장(1924.3~29.2)까지 올라가는 광영(?)을 입었다. 왜 광영인가. 일제 36년 동안에 걸쳐 총독부의 국장은 총 120명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서 엄창섭(1944.8~)과 더불어 이진호만이 학무국장을 했으니 이보다 더 큰 광영이 어디 있겠는가. 그 만큼 총독의 신임도 두터웠는데 관료 중에서 가장 많이 사이토와 면담하기도 했다(89회). 특히 그는 이두황과 더불어 1896년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데 교도중대 중대장으로 한몫을 한 이력을 가진 친일파이다.
이 밖에 신석린, 유혁로, 윤갑병 등이 지사로 중용되었고, 이들보다는 좀 후진으로 총독부 군수․참여관 등을 거쳐 지사로 발탁된 인물로는 김관현․김윤정․원응상․정교원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들 친일관료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개화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박영효․유혁로․신응희․정난교․이규완은 갑신정변에 참가하였고, 이두황,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범래, 유성준, 육종윤 등은 일본의 낭인들을 끌고 들어와 민비를 시해하는데 관계하였다. 물론 그들의 주장처럼 조선을 하루라도 빨리 개화=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외세의 군대나 협잡배들을 끌여들여 제 집을 치는 행위는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들의 주관적인 의도는 좋았는데 결국에는 외세의 침략에 이용되었다는 변호가 있다. 그러나 이런 변호로는 개화파 가운데 소수의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가 침략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들 개화파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얼마나 허구이며, 주체성이 없는 방책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대졸 출신의 엘리트 계층으로 고원훈․박영철․석진형․유만겸․장헌식․한규복 등이 있다. 특히 박영철은 1902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입교했으며, 견습사관으로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양성한 밀정 배정자(한국의 마타하리라고도 한다)와 혼인하여 4~5년 동거했으며, 일본군 헌병대 소좌로 1912년에 예편하였다. 예편과 동시에 익산군수, 함북․전북 참여관, 1924년 강원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중추원 참의, 경성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동민회 부회장 등 친일 거물로서 화려한 길을 걸었다.
세째는 하급관리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출세를 위해 일제에 충성한 계층으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태석이다. 그는 1913년에 경기도 경부, 1920년 경시, 1922년 경기도 형사과장, 1924년에 가평군수로 전직한 뒤, 한남(33)․경남(39) 참여관을 거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의 직급으로는 개인적으로 총독을 접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 차례에 걸쳐 경찰로서는 드물게 총독을 단독 면담한 것은 사이토에게 폭탄테러했던 강우규 의사와 관련자들을 김태석이 체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고문왕’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 밀양폭탄사건으로 체포된 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온갖 고문, 악형을 받았다”고 증언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 결과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 최초로 사형을 구형받는 오명을 낳기도 하였다.
4. 직업적 친일분자―민족운동을 파괴하는 일제의 하수인
직업적 친일분자란 관리 중의 친일분자와는 달리 기밀비 등 급여나 특수이권 또는 사명을 받고 전업적 또는 반직업적으로 일제의 앞잡이로 친일활동을 한 반민족적 대일협력자를 말한다.
사이토는 ‘조선통치의 성패’는 ‘친일적인 인물의 확보에 있다’고 한정하고 우선 ‘몸과 목숨을 걸고 일을 해내려는 중심적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합방’할 적에 이용하고 걷어찼던 친일분자 가운데 다시 이용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부터 지식인, ‘놀고 먹는 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들을 긁어 모았다. 이들을 앞세워 친일여론의 조성, 친일단체 조직, 독립운동자의 적발과 정보수집, 민족운동을 파괴하기 위한 테러활동, 대외선전, 해외유학생 감시, 독립운동자에 대한 설득․투항권유 등 광범위하게 이용해서 지배체제의 강화를 꾀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직업적 친일분자는 사이토의 친일파 육성․이용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토를 면회한 빈도수에서도 직업적 친일분자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식민지 통치에 들어가는 예산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찰비 가운데서도 직업적 친일분자와 하급밀정에게 쏟아 부은 돈은 엄청나다. 1919년에 공식적인 경찰예산이 1천7백만엔인데, 이 중 기밀비가 4백만엔에 이른다. 이는 당시 총독부의 교육예산과 맞먹는 수치이다. 물론 3․1운동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과다하게 책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밀비는 매년 공식적인 경찰예산에서 1/8~1/10을 차지하였다.
직업적 친일분자에는 선우순․민원식․박춘금처럼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자와 방태영․이희간․김기선․김린같이 은밀하게 활동하는 자로 크게 나뉜다. 이들은 주로 경무국의 간부와 함께 민중의 눈을 피해 밤에 사이토관저를 드나들었다. 그런데 직업적 친일분자 가운데 오태순, 이한복, 박의병, 김승익, 유래정, 박영근처럼 무명의 인사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사이토를 수차례 만난 다음 홀연히 사라진 경우도 있다. 이들의 경우는 종적을 알기 힘들지만 아마도 민족운동 진영을 분열시키는데 참여했던 고급밀정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직업적 친일분자를 계통별로 나누어 주요 인물들의 반민족 범죄행각을 보도록 하자.
첫째, ‘합방’전부터 친일파로서 활약하다 192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단체를 조직․운영했던 자로서 친일여론 조성 단체인 국민협회의 민원식, 김명준과 일본의 우익정치단체인 동광회의 조선총지부장 이희간, 그리고 지주․자본가의 친일화와 노동운동 파괴를 목적으로 한 유민회의 고희준, 미신단체 청림교의 김상설 등을 들 수 있다.
이토의 후원에 힘입어 고관이 되고, 고종의 처조카 사위까지 되었던 민원식은 항상 입버릇처럼 “나의 오늘이 있음은 전적으로 일본과 일본인 덕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진심으로 일본에 고마워했다. 그런 그이기에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3․1운동 후 그는 신일본주의 단체 협성구락부를 개편하면서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3․1운동으로 격양된 조선인의 정치의식을 무마하기 위한 일제의 정치모략으로 조선에서도 의원선거법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민원식의 친일행각이 조선인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상해임시정부가 맨먼저 죽여야 할 친일분자로서 민원식․선우순․유일선 등을 꼽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1921년 2월 일본의회에 참정권 청원서를 내기 위해 도쿄에 갔다가 호텔에서 양근환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친일의 화려한 막을 내리고 만다.
둘째, 옛 일진회 회원들로서 이인수, 김택현, 최영년, 최정규, 민흥식 등이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전력을 기울여 설치를 서두른 것이 보민회다. 보민회는 1920년 봄쯤부터 총독부가 직접 배정자와 최정규, 이인수, 김택현, 최영년 등 옛 일진회 잔당(제우교도)을 후원해서 만든 무장 밀정단체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일본 관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을 중심으로 지부를 만들어 독립운동자를 색출하거나 동포들을 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특히 최정규가 초대회장으로 있을 때는 횡포가 극심해 무고한 양민까지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째,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변절하여 독립운동을 파괴하는데 이용되었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희선, 신태현을 들 수 있다. 한때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일제의 회유 등으로 변절하여 밀정짓을 한 경우는 가장 비밀스런 공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더구나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위의 두사람은 우연히 사이토문서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김희선은 참의부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였다. 사이토 문서 제739호는 유동열과 김희선을 투항시키기 위한 자금청구서인데, 유동열은 불응했으나 김희선은 투항하였다. 투항한 댓가로 사이토에게서 거액의 ‘하사금’을 받은 그는 이후 일제를 위해 충실한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했던 그가 1969년에 대통령 표창, 1980년에 국민장을 받아 얼마전까지 독립유공자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것이다.
네째, 언론계의 직업적 친일분자로는 박석윤, 노정일, 진학문, 이상협 등이 있다. 이들은 지식인 출신으로 1920년대에 들어 일제의 민족분열책동에 관여했던 자들이다.
최남선의 매부이기도 한 박석윤은 도쿄제대를 마친 후 한때 휘문․중앙고보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阿部允家)에게 포섭된 그는 3․1운동 직후부터 직업적친일파로 활약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 재외(在外)연구원으로 수당 300엔(1929년도의 언론사 부장 월급이 100엔)씩을 받으면서 영국 유학을 했고, 귀국후 <매일신보>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0년대는 만주로 가 간첩조직인 민생단을 만들어 연길․화룡․혼춘에서만 200명이 넘는 조선인 운동가들이 숙청당하는 이른바 ‘민생단 사건’의 주범이기도 했다. 이런 빛나는 전과를 세웠던 그는 1939년에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만주국 총영사가 되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이상협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국 언론계의 대부로서 행세하였다.
아베에게 포섭된 진학문은 변절한 최남선과 더불어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잡지 <동명>을, 그리고 박석윤과 더불어 <시대일보>를 발행하여 ‘조선사상계의 악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즉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민족개량주의를 유포시켜 민족의 독립의지를 파괴하는데 관여한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는 언론에서 손을 떼고 만주에서 만주국 고급관료로 변신하여 활약하다가,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이른바 ‘만주국 인맥’들을 동원하여 일본돈을 끌여들이는 ‘파이프라인’ 역할자이자 재계의 실력자로 활약하였다. 그야말로 어떤 권력아래서든 살아남는 뛰어난 처세가라 부를 법하다.
그밖에 3․1운동 당시 축음기․환등기․영사기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세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유일선, 도쿄유학생을 감시했던 홍준표, 재일 조선인노동자를 협박하여 고혈을 짜내거나 독립운동가에게 테러를 가했던 폭력배 이기동․박춘금, 구미 유학생을 감시하고 첩보 활동을 한 김기선 등이 있다. 그리고 형제가 나란히 그것도 아주 이름을 날리는 직업적친일분자가 있는데, 선우순과 선우갑이 그들이다.
선우순은 민원식과 쌍벽을 이루는 1920년대 최대의 친일파였다. 1919년 8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그는 사이토를 119회나 면회하였다. 22일마다 1회꼴인데, 2위는 86회의 이진호이다. 귀족 가운데 제일 면회가 잦았던 송병준도 58회로 선우순의 반밖에 안되니 그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는 3․1운동 당시 앞의 유일선과 함께 일본조합기독교회 전도사로 만세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20년에는 대동동지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것은 평남북 일대의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단체로서 평양에 본부를 두고 기관지 <공영(共榮)>을 발간, 일선융화․공존공영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21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1933년에 사망하였다.
동생인 선우갑은 밀정으로 유명하다. 상해에서 임정에 붙잡혔을 때의 일을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등정탐 선우갑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將功贖罪)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2․8선언 때 주동자를 밀고해서 체포하게 했던 그는 3․1운동 이후 미국에 파견되어 기자 행세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정탐하고 반독립 정치선전을 하고 다녔다.
5. 민족주의자―타협에서 변절의 나락으로
사이토총독 관저를 드나든 인물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특히 끄는 것은 이른바 ‘민족주의 우파’에 속하는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이다.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왜 사이토총독을 만났을까. 어떤 정치적인 거래나 협상을 하기 위해 사이토를 만났을까. 요즘 같으면야 야당 정치인이 협상을 목적으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상식에 속하지만,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어떤 정치적 대상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제는 조선에서 어떤 형태의 권력 분점도 허용하지 않았기에 정치적 파트너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어떤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었기에 만났을까. 여기에는 1920년대라는 조선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있다.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때마침 일제가 3․1운동에 대한 회유책의 하나로 합법적인 사회단체를 허가함으로써 약간의 숨구멍이 터지자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만들어져 민중에 대한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20년대의 ‘문화운동’은 조선 민중의 정치적 의식을 더욱 각성시키고, 결국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사이토총독은 반일기운에 대해 압박을 주어 없애는 방법은 효과가 없으니 오히려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반일적 문화운동’을 체제내의 운동으로 끌여들이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같은 경우도 식민 지배를 전제로 하는 타협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하려 했다. 즉 일본 제품 배척이 아닌 토산물 애용으로,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개선이나 향상을 위한 것으로 운동을 변질시키려 하였고, 이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자 공금유용 등의 명목으로 탄압하여 소멸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문화운동의 추진단체 간부진에 친일파나 타협적인 성격이 짙은 사람을 넣어 운동을 어용화시키는 방법도 취하였다. 조선인산업대회의 박영효․조희문․윤치호, 조선물산장려회의 유성준․이규완, 민립대학설립기성회의 유성준․고원훈․이범승․최린 등이 그 사례이다. 또한 문화운동을 둘러싼 타협․비타협의 대립을 이용해서 민족주의자들을 갈라놓아 우파의 대일 접근을 촉진시키고,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자와 맞붙도록 부채질하여 반일 역량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에서 ‘민족운동 진영의 분열’이라는 무대가 형성된다. 감독 사이토총독, 연출 사이토의 정책 브레인 아베, 주연 이광수․최린․최남선, 조연 김성수․송진우 등등. 연극은 1921년 5월 일제의 회유로 이광수가 상해에서 <독립신문> 주필 자리를 버리고 귀국하는 한편, 그해 6월 복역 중이던 당대의 문장가 최남선과 ‘33인’의 하나였던 최린이 가출옥하면서 시작된다. 이 두 장면에는 아베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 다음은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의 한 내용인데, 이들이 과연 무엇을 노렸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앞서 이광수라는 자의 안을 보여드렸던 조선인 개조문제는 문화운동화로 그 방향을 전환토록 암시를 주셨는데, 피차 서로의 이득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에는 어렵고, 간접 타격으로 설설 조선인 사이에 열망이라든가 신용있는 인사와의 사이에 양해를 얻도록 일을 꾸미는 길 외에 좋은 방책은 없다고 생각되어 여줍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번 가출옥한 위인들 중 특히 최린이 안성마춤의 친구입니다. 소생도 그와는 말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바 있으니 웬만큼 이야기가 될 승산이 있습니다.……천도교 따위를 채찍질쳐서 저쪽으로 돌린다는 것은 큰 바보짓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얼마라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이 드시면 사양치 마시고 분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연출에 따라 이광수는 1922년 총독부 주선으로 월 300엔의 월급을 받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들어가고, 최남선은 총독부의 재정원조로 앞서 언급한 진학문과 더불어 월간지 <동명>을 발간하다가 1924년 6월 일간지 <시대일보>를 창간하였다. 이들은 모두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을 개량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광수는 1922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인의 민족성이 열등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른바 ‘조선인 열등론’을 제시하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시켰고, 1924년에는 ‘민족적 경륜’(<동아일보> 1924.1.2~6)을 통해 자치운동을 주창하여 사실상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희석시키는 논지를 폈다.
이광수가 글을 통해 민족운동의 개량화를 선전했다면 최린은 몸으로 실천하였다. 천도교를 구파와 신파로 분열시킨 뒤 신파의 주도권을 장악한 최린은 아베와 긴밀한 협조 속에 1924년부터 김성수, 송진우와 더불어 연정회(硏政會)를 결성하여 자치운동을 추진하려 했다. 이것은 일제가 자치운동이라는 부도수표를 발행하여 동요하고 있던 ‘민족주의 우파’를 민족운동 진영에서 이탈시켜려는 공작이었다. ‘민족주의 우파’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진출로 운동의 주도권 상실에 대한 위기감과 가까운 시일안에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급격히 대일 타협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 전환에 훌륭한 미끼로 던져진 것이 ‘자치운동’이다.
이처럼 사이토총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민족분열정책은 민족운동의 역량을 파괴하는데 훌륭한 수단이 되었으며, 그 해독은 식민지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까지도 영향은 미치게 된다. 즉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반민족․친일행위로 정통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세력들과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남북 분단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표> 사이토총독의 조선인 면회자 빈도 실태
| 제1기 (1919~1921년 말) | 제2기 (1922~1923년 말) | 제3기 (1924~1926년 말) |
30회 이상 | 선우순(46) 송병준(33) | 민흥식(36) 선우순(34) 이강공(31) | 선우순(39) 이진호(37) 민영기(33) 방태영(30) |
20~29회 | 이강공(26) 한상룡(24) 이희간․이진호(23) 순종(21) 박영효(20) | 순종(27) 이진호(26) 신석린․한상룡(22) | 신석린․이강공(28) 순종․한상룡(27) 김승익(23) 박중양(20) |
10~19회 | 김린․민원식(19) 어담(13) 방태영(12) 이재극․민흥식․이한복(11) 오태순(10) | 송병준(18) 구연수(16) 박중양․이범규(15) 박영효(14) 민영기(13) 김윤정․어담(12) 이왕세자․박기양(11) 이하영․진학문․홍준표(10) | 김윤정․유일선(18) 심우섭(17) 박우현(16) 육종윤․조대호․심천풍(14) 고세형․박영효․석진형․오태순․진학문(13) 박의병․민흥식(12) 박영근․어윤적․유래정․이범승(11) 심영택․원응상․이완용(1925년 졸)․조희문(10) |
5~9회 | 오태환․유일선(9) 이완용(8) 고희준․구연수․이도영․이지용․장덕수․진학문(7) 민영찬․선우갑․신태현․장헌식․정민화․홍준표(6) 김기선․민영기․신응희․이인수․김참여관(5) | 방태영․이재극․이한복․이희두(9) 김명준․선우갑․송진우(8) 고세형․박춘금․유일선(7) 고의경․김성수․서내석․오태순․원응상․이기동․이승훈․이원석․정진홍․채기두․최영년(6) 김관현․민영찬․민영휘․이완용․장덕수․정병원․조대호․조희문(5) | 강병옥․김관현․김용주․박영철․이왕세자․이용식(9) 김성수․민영찬․백대진․송병준(1924년 졸)․송진우․윤갑병․이동우․이범래․이병렬․이승훈․이원석․이한복(7) 강필우․고희준․이기동․이태호․전성욱․최영년․홍준표(6) 권중관․김규혁․김명준․김태석․노창성․박기양․박춘금․서병무․신흥우․오태환․유혁로․윤상필․이교영․이달용․이완구․이항구․장헌식․정진홍(5) |
4회 | 김윤정․김택현․김희선․박의병․박중양․백남훈․서규석․심천풍․엄주명․이규완․이근상․이기영․이범규․이윤용․이해수․장우근․한석교․한진연․한창수 | 김우영․박의병․심천풍․오종섭․윤갑병․이범래․이상협 | 강인우․김규진․김응선․민정식․백남훈․서정악․송종헌․어담․유성준․윤치호․이규완․이택규․이택현․정병조․한규복 |
3회 | 김정식․김희선․노창성․엄준원․원응상․윤덕영․윤치호․이달용․이동재․이상협․이하영․신석린 | 강인우․권중관․김기선․김상설․김상희․김익승․김정훈․김태석․민태원․성기운․송대관․안창남․어윤적․유맹․이병학․이우공․정안립․홍성숙 | 곽창현․곽한탁․권명상․김상설․김상용․김영진․김재문․김찬한․민영수․박상준․박철희․백인기․석명선․송대관․심재곤․유만겸․유진순․윤덕영․이홍주․이희두․장상철․장인원․정태영․채기두․허헌 |
출처: 우린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한국역사연구회), 1998, 역사비평사
자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