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207. 묵상글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하늘나라 문지기. 등 )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늘나라 문지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하느님 뜻의 실천 여부에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주님’하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 하지만
그저 이름을 부르는 주님이 있고,
진짜 당신은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주님이 있다고.
그리고 그저 이름으로 주님을 부르는 경우는,
진짜 귀찮을 정도 주님을 부르고는
그저 주님을 부려 먹고 시켜 먹기만 하는 거라고.
‘엄마’하고 부르고는 밥 줘,
‘엄마’하고 부르고는 돈 줘,
‘엄마’하고 부르고는 옷 좀 다려줘 뭐 이런 식입니다.
말은 주님이지만 전혀 ‘나의 주인님’이 아니고
실제로는 ‘나의 종’처럼 주님을 부리는 겁니다.
우리의 청원기도 상당수가 그렇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결국 나의 요청 또는 요구를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강요이기에 주님께서 안 들어주시면 삐지고 원망하는 기도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실천하라고 하시고,
실천 이전에 하느님이 진정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진정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나는 진정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이고,
내가 진정 하느님의 종이 되면
뭘 하든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주 하느님 뜻대로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 되고,
하늘에서와 같이 나에게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뤄질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이룬 우리는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우리는 하늘나라의 성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 문지기 또는 성문지기입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그리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주님의 문이 바로 여기 있으니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
그저 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나의 진실한 고백과 실천으로
하늘 문이 나에게도 열리고 사람들에게도 열리게 하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문지기 소임을 주심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며,
잘했으면서도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행동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그러나 좋았는지는 삶이 말해 줍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의 심판이라는 폭풍우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본당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경 통독’, ‘감사 노트’ 쓰기에 적극 참여해 보십시오. 하루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으니 실행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은 유 일회적이며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 끝에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도나 여행 중에 형제님께서 기꺼이 ‘사진’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세도나 여행안내를 600번 하셨다는 형제님은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를 잘 아셨습니다. 산행이 힘들 때면 잠시 쉬어가면서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소는 모두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스치는 순간 속에 잊고 지나갔던 곳들도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한 자매님은 구름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구름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자매님은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2년을 키우던 ‘Happy’라는 강아지가 죽었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난 뒤에 너무 보고 싶어서 하느님께 한번만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에 죽은 ‘Happy’ 모습의 구름이 있더랍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고, 저희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구름의 모습에 예쁜 강아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이성과 과학, 논리와 자본에 익숙한 우리들은 어쩌면 우리들 내면에 있는 ‘감성과 열정, 순수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지난번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의 강의 중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에 공통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그 내용이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에게 중요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는 향유를 붙는 것에 초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향유를 붙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독특한 것은 향유를 몸에서 닦아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의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했습니다. “날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거기에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 이에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거기에 새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 끝에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왕자님 왕이 큰 기쁨을 절제케 하는 동시에 크게 절망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때 솔로몬 왕자는 잠시 상념에 잠기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발에 묻어 있는 향유를 마리아가 닦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향유를 붙는 것이 장례를 상징한다면, 닦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도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여기서 ‘간직하다.’는 희랍어 원문은 지켜보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켜본다는 것은 시점이 현재에 있습니다. 간직한다는 것은 시점이 미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시간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기름을 부은 행동이 복음과 같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낭비라고 보았습니다. 복음은 계속 낭비하는 것입니다. 계속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낭비하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퍼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날에 간직할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계셔도 그 말씀을 지켜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과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가장 힘들 때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권력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간직하고 살면 믿음을 간직하고 살면 향유가 퍼지듯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힘을 드러냅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 십자가 죽음의 의미로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 가장 절망 적일 때 붙잡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힘들 때 주님의 말씀을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이 향기가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향기를 내고 있을까요? ‘인색, 교만, 시기’의 냄새를 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향유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간직할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향기가 온 집안을 채울 것입니다.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반석 위에 짓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비가 내립니다. 강물이 밀려옵니다. 바람도 불어옵니다. 이러한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게 다가옵니다. 누구에게는 다가오고 누구에게는 피해 가는 그런 재난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난을 겪을 때 반석 위에 지어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은 무너져 버립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사람의 집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집은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과 그 실행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하느님 말씀, 곧 성경의 큰 틀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욕심과 욕망을 중심에 두지 않고 배려와 나눔을 중심에 둘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신앙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배려와 나눔을 신앙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우리 인내심에 대한 한계에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러한 사람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것이 바로 말씀을 실행하는 부분인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렵겠지요. 그러므로 서로 기도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모두 그 예쁘고 험한 길을 힘차게 걷기를 바랍니다.
마법의 가루
한국 음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 조리법 또한 복잡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음식도 다양하고 복잡하겠지만
특히 한식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한식 조리사에게 도전하는 것과 도전에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리법을 한 번에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법의 가루입니다.
육수를 만들고 싶으면 육수용 마법의 가루를.
짜장을 만들고 싶으면 짜장용 마법의 가루를.
얼큰한 국물이 필요하다면 얼큰 탕 마법의 가루를 넣습니다.
마법의 가루 통 몇 개만 가지고 있다면
주방이라는 성을 주관하는 요리 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런 마법의 가루가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이 필요할 때, 톡톡
위로고 필요할 때, 톡톡
겸손이 필요할 때, 톡톡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대 철학자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탈레스(BC 624-546)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물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밤길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골몰하다가 그리된 것이었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하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알려고 하면서 바로 눈앞의 웅덩이는 보지 못하는군요.”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모습도 반성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보지 않고 뜬구름 잡기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 뜻에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 과연 구원은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바라보며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떤 시련과 고통의 걸림돌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굳건하게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눈앞의 웅덩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금을 충실히 살 수 있는 모습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지금을 사는 그 충실한 모습이 하늘 나라라는 최고의 선물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진짜로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안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사람은 박해가 닥치거나 어려움이 오더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어떤 실천도 하지 않은 사람은 박해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얼른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우리 삶의 행복을 좌우한다(로버트 윌딩거).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반석 위의 인생집
-한결같이 주님 말씀을 실행하는 삶-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4)
밤 일찍 눈뜨니 지난 밤 도착한 어느 자매의 메시지입니다.
“낼 제 생일이예요. 감사와 찬미로 봉헌해 주세요. 무릎, 심장, 눈 등.... 우울함, 이제 퇴임을 2년 앞두고 저를 바라보니 아픔이 가득하네요.”
어려운 중에도 최선을 다해 온 삶임을 알기에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을 빕니다. 힘내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 57세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17년을 더 살고 있는 중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뿐 아니라 모두가 성인이 되어 살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성인들 축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어로 “불멸”을 뜻하며 성공회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그가 선종한 4월4일 지냅니다. 그가 397년 4월4일 성토요일 선종한 날 마지막 남긴 임종어가 얼마나 책임을 다하며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또 그가 얼마나 겸손하고 신심깊은 사람인지 말해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성 암브로시오는 정말 위대한 성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 표지 제목은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표지 사진은 최초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인물,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성 암브로시오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을 삼켜버렸다!”라는 글귀도 나옵니다. 바로 여기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 바로 암브로시오 성인이요 신자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주교가 된 분으로 주교가 된 후에 세례를 받은 분입니다.
성인은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탁월한 행정가이면서, 성경, 교의신학, 신비신학등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설교를 통해 설파한 위대한 신학자이자 영성가였습니다. 그는 387년 이단 사상에 빠져 있던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두시켜 세례를 줍니다. 성 암브로시오(12.7)와 더불어 성 아우구스티노(8.28). 성 예로니모(9.30), 성 대 그레고리오(9.3) 네 분은 서방의 4대 교부로 추앙을 받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록”에서 묘사한 암브로시오의 구체적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아주 짧은 시간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는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 없이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성 암브로시오에 대한 참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중세기가 시작되기 전 그 옛날 고대 권위의 시대에 놀랍게도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늘 활짝 열려 있었던 성인의 집무실이었던 것이니, 감히 비교하건데 제 집무실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얼마나 말씀의 사람이자 관상의 사람인지, 또 얼마나 뛰어난 집중력을 지닌 분인지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특기할 사항은 그가 평생 “주님의 학인(學人)”이자 “말씀의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말씀의 훈련, 말씀의 실행을 통해 그가 주님의 말씀의 반석위에 얼마나 견고한 인생집을 지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아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깊이 마음에 새겨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산상설교중 가장 중요한 결론 부분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세워지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안으로부터 무너지면, 부패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주님 말씀의 반석위의 인생집 역시 평생 미완(未完)의 현재진행형중이니 죽을 때까지 말씀 실행의 수행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위의 인생집같지는 않은지 다음 묘사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정말 이런 인생집이라면 위기를 맞았을 때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말씀 실행의 반석 위의 슬기로운 삶이나 사상누각의 어리석은 삶 역시 하루하루의 선택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주님의 평생 말씀의 학인이 되어, 수행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말씀 실행을 통해 주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한결같이 “말씀의 수행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의 축복입니다.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주님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이사26,3). 아멘.
----------------------------------------------------
23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음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인 사람이
믿음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인 사람이
희망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인 사람이
사랑의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하늘나라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인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