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누가 한문으로 따를 隨에 붓筆자로 하자고 한게 누구고 또 우리가 읽는 이런 저런 글을 “그 것은 수필이다”라고 단언하여 선을 긋고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게 하자고 한 것이 또 누구 생각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수필은 우리, 적어도 나를 묘하게 흥분케 하고 호기심을 발동케 한다.
여자들은 남자의 어디쯤이나 어디까지를 보아버려야 그 남자를 다 보고 또 안다고 하는지 모르나 남자들에게 있어선 여자의 백옥같이 흰 허벅지 속살이나 젖무덤을 보아버렸을 때 그 여자를 보았다고 하고 그 여자를 알아버렸다고 하여 영어론 I know her가 되고 I knew her가 된 다.
그래서 세상은 여자의 발등을 보아 놓고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능청을 떨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것을 가지고 옛적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이 욕심 낸 선화공주를 어떻게 하려고 지어 부르게 한 서동요에서와 같이 육접을 해버린 것 같이 하기도 한다.
거기에 음흉끼가 좀 있으면 사람이면 누구에게 한 두 개 있을 법 한 허벅지나 젖무덤의 점을 생각 ” 그 여자 거기에 점도 하나 있더라고" 해버라면 영락없이 그 여자의 팔자는 뒤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남의 숨겨진 비밀이나 속을 우연찮게 보게 되고 알아버린다는 것은 여간 큰 재미가 아니다.
그래서 수필을 읽는 다는 것, 그 것은 마치 여기 신윤복의 으뜸 그림이라 쳐 주는 단오 풍경 그림 속에서 두 사내가 바위 틈새로 몰래 머리 감는 동네 아낙들의 허벅지나 통통한 젖을 훔쳐보는 것 같이 몸이 오싹거리고 떨리는 스릴이고 재미다.
그리고 수필을 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숨기고 살아온 자기의 깊은 허벅지 속살 그리고 젖까지도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것 그리고 그러한 대담성이 없이는 수필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수필은 소설이나 희곡같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작가가 자기 임의대로 설정해 버리기도 하는 가식 즉 죽은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들의 벗은 나상을 보는 것이고 그리고 그 나상의 움직임까지도 실제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기 작가 장명희가 쓴 "어떤 황혼"이나 "연리지"를 예로 들어 필자의 지론? “수필은 작가의 허벅지나 젖무덤을 보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이다”로 시비를 걸면 작가 장명희가 “어떤 황혼"이나 "연리지”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 자신의 허벅지나 젖무덤은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 두 작품을 통하여 보아버린 그녀의 허벅지와 젖무덤은 무엇인가다?
그것 즉 작가 장명희가 보여주고자 한 그녀의 허벅지와 젖무덤 그리고 우리가 보아버린 그 것은 다름이 아닌 초미니 小社會라 일컫기도 하는 부부간의 “인간관계"고 발전하여 "사회성”인 것이라 본다.
작가 장명희가 쓴 “어떤 황혼”이나 “연리지”를 얼핏 보면 그저 어느 聖心을 가진 聖人이나 그리고 같이 살아가는 연리지 나무들의 聖心?을 세상에 구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실제는 인간성 내지 사회성을 망각하고 사는 부부 즉 작은 사회를 고발 하고 또 응징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일찍이 “올더스 헉슬리”그의 세상 비평에서 인간의 기술발달과 과학 지식의 남용은 서구문명의 몰락을 가져 오고 파괴 시킬 것이라 예언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지만 작가 장명희는 올더스 헉슬리 같이 강한 톤 예리한 독설로 하는 비판이 아니라 부드럽게 그리고 은연중 인간성 내지 사회성을 망각하고 파괴 되는 소사회 부부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소사회 부부의 인간성 되찾음과 사회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성 발전하여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그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진 가장 큰 것 아니 동물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 너도 살아야지”고 “그래 우리 같이 살자”인 것으로 그것은 인간들 간의 그리고 사회 간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사회(小社會) 부부라는 것은생명번식 즉 생민지시(生民之始)인 사랑(섹스)을 전제로 하여 만나게 되고 그 것이 그 부부를 묶어 주는 끈이기도 하지만 그 끈 그리고 그 묶임 속에 인간성이 존재 하지 않거나 회복시키지 않으면, 다시 하여 “ 너도 살아야지”에서 “그래 우리 같이 살자”의 사회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초미니 사회인 부부라는 끈은 끊겨지고 파괴되게 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소설이나 희곡 작가가 아닌 수필 작가 장명희는 왜 “어떤 황혼”이나 “연리지”룰 통해서 줄곧 인간성 내지 사회성을 은연중 부르짖고 있는 가?
그녀가 부부라는 소사회를 형성 으뜸 부부라는 소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모르긴 해도 그녀가 정해진 삶을 살아내면서 당한 배신에 의한 맘부림과 몸부림 그리고 그 것을 지나 뼈부림 내지 혼부림 속에서 터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 것이 그녀가 숨기고 산 허벅지였고 가리고 산 젖무덤으로 그것을 보여줘 버린 것이고 발견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부연하면 요즘 세상 서로 사랑한다고 바쁜사람들 불러다 증인되게 해놓고 시작한 거창한 부부계약도 단 둘이 만나 하는 집이나 가게등의 전세계약 그리고 사글세 계약만큼도 지켜지지 않는 부부라는 소사회에 인간성을 다시 찾게 하고 사회성 즉 “너도 살아야지”를 느껴 그래 "우리 같이 살자”로 한 미생지신 ( 尾生之信) 부부지신을 여기 장명희의 “어떤황혼”을 통하여 새롭게 되새 기며 살았으면 한다. </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