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 신문
2023년 8월21일
히말라야 근처 야트막한 산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로 도와가며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삼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올 여름은 아예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구나.”
원숭이 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땅은 쩍쩍 갈라지고 나무는 시들시들 말라죽어갔습니다. 먹을 만한 과일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다간 모두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배가 고픈 원숭이들이 왕에게 찾아와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원숭이 왕은 지혜로운 원숭이들과 의논을 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
나이가 제일 많은 원숭이가 머뭇거렸습니다.
“어서 말을 하시오.”
마음이 급해진 원숭이 왕이 명령했습니다.
“산 밑을 흐르는 냇물만 건너면 인간 세상의 성이 있습니다. 그곳은 가뭄이 들어도 잘 가꿔진 나무에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려있습니다.”
원숭이 왕은 바나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혜롭기로 소문난 왕이었지만 배고파 울부짖던 아기 원숭이들의 모습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
원숭이 왕의 명령에 모두가 벌벌 떨었습니다.
“인간들에게 잡혀 모두 통바비큐가 될 것입니다.”
나이 많은 원숭이가 말렸습니다.곁에 있던 원숭이들도 뜨거운 불판에 올려진 듯 다리를 비비꼬며 떨었습니다.
“그럼 굶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원숭이 왕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습니다.나이 많은 원숭이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입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따르라.”
원숭이 왕은 직접 오백 마리의 원숭이를 거느리고 임금님의 성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 냇물만 건너면 맛있는 바나나가 기다리고 있으니 힘을 내거라!”
왕의 말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들은 배고픔을 참고 산을 내려와 냇물을 건넜습니다. 냇물도 거의 말라 목을 축이기도 부족했습니다.드디어 임금님의 성에 도착했습니다.성 한쪽 뜰에는 소문대로 잘 익은 바나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배가 고픈 원숭이들은 나무에 달라붙어 바나나를 정신없이 따먹었습니다. 철없는 아기원숭이들은 바나나를 물고 꼬리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쉬이이~쉬이익~.”
아무리 조심을 해도 사사삭 움직이는 소리, 우적우적 씹는 소리,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휘릭휘릭 옮겨가는 소리가 조용하던 뜰 안을 휘돌았습니다.
“바람도 없는데, 무슨 소리지?”
뜰 이곳저곳을 살피던 순찰병이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찰병은 소리 나는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헉! 이렇게 많은 원숭이들이?”
순찰병은 나무마다 커다란 과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원숭이 무리들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놀라서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원숭이 무리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습니다.잠시 숨을 고른 순찰병은 살금살금 바나나밭을 빠져나갔습니다.그 순간 높은 나무를 타고 망을 보던 원숭이 왕도 나무와 나뭇가지를 건너며 순찰병의 뒤를 따라갔습니다.순찰병은 곧장 임금님 처소로 달려갔습니다.원숭이 왕도 바짝 뒤를 따랐습니다.
“임금님, 원숭이 무리들이 바나나밭에 쳐들어왔습니다.”
순찰병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야수들 같으니라고!”
임금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눈치채지 않게 원숭이 무리들을 뜰에 가두고, 날이 새면 군사들을 모아 한꺼번에 잡도록 하라.”
임금님이 명령을 하였습니다.높은 나무에 앉아있던 원숭이 왕은 임금님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게야.’
원숭이 왕은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다른 원숭이들이 알면 놀랄까 봐 입을 꾹 다문 채 두리번거렸습니다.그러는 사이에 임금님의 군사들이 뜰 밖을 소리 없이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검은 안개가 주변을 온통 감싸 안은 것 같았습니다.
원숭이들은 뜰 밖으로 나가야 성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성을 나가야 냇물을 건널 수 있고,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으니 뜰 안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살아서 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오직 한 가지 높은 나무에 올라가 뜰 밖까지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살아남을 것 같았습니다.
‘나 때문에 모두의 목숨이 위태롭게 됐구나.’
원숭이 왕은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고 무리를 더욱 위험한 곳으로 데리고 온 것을 깊이 후회했습니다.그때 원숭이 왕 눈에 등나무 덩굴이 보였습니다. 뜰의 울타리를 감고 있던 오래된 등나무 줄기였습니다.
“빨리 저 등나무 덩굴을 가져오너라.”
날쌘 원숭이 몇 명을 불러 말했습니다.원숭이들이 등나무 덩굴을 꺾어왔습니다.원숭이 왕은 등나무 덩굴을 길게 이었습니다. 한쪽 끝을 임금님의 뜰에 있는 제일 큰 나무, 높은 가지에 동여맸습니다. 다른 한쪽 끝은 자신의 허리에 친친 감았습니다.
“내가 뜰 밖에 있는 저쪽 큰 나무까지 뛰어오르면 덩굴다리가 이어질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 도망치거라. 어떻게든 살아야한다.”
원숭이 왕의 목소리는 쉬쉬했지만, 그 기운은 우렁찼습니다.곧바로 높이 나는 새처럼, 원숭이 왕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 건너편에 있는 큰 나무를 향해 비행기처럼 날았습니다. 왕의 몸에 감겨있던 등나무줄기가 줄줄 풀리며 다리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등나무 줄이 두 뼘 정도 짧았습니다.원숭이 왕은 팔을 길게 뻗어 겨우 굵은 나뭇가지를 움켜잡았습니다. 양손으로 겨우 다리를 이었지만 아슬아슬했습니다.
“빨리빨리. 군사들 눈에 띄지 않게!”
원숭이 무리들은 질서 있게 등나무줄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다리 아래에는 임금님의 군사들이 수풀처럼 앉은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원숭이들은 바람처럼 다리를 건넜습니다.그런데 큰 나무를 잡고 있던 원숭이 왕의 손목이 아프면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벌벌 떨리고 뜨거운 열이 한꺼번에 얼굴로 모였습니다. 땀이 줄줄 흐르더니 양쪽 겨드랑이가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붙잡고 버텼지만 눈앞이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오백 마리의 원숭이 무리가 다리를 다 건넜을 때였습니다.
“툭!”
원숭이 왕의 손이 높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졌습니다. 왕은 등나무줄기에 줄줄줄 끌려 뜰의 한쪽 구석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뜰에 나온 임금님은 어깨가 찢긴 채 등나무 줄기에 몸이 묶여 있는 원숭이 왕을 발견했습니다.겨우 정신을 차린 원숭이 왕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야수인 저희도 날마다 임금님의 은혜를 입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배고픔에 그만 임금님의 뜰을 침범하여 바나나밭을 망쳐놓았습니다. 다른 무리들은 모두 제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죄는 제게 있습니다. 제 살은 얼마 안 되지만 하루아침의 음식은 될 것이니, 잡수시고 부디 무리들을 살려주십시오.”
원숭이 왕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네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쳐들어온 원숭이 왕이더냐?”
임금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바보 같은 왕 때문에 무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원숭이 왕은 울먹였습니다.“임금님, 뜰 밖에 있는 원숭이들을 모두 잡아서 바비큐를 만들면 오래오래 두고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하들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떠들어댔습니다.임금님은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방금 바보 왕이라 했느냐? 나는 잘난 임금이면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희들 원숭이에게는 따르지 못할 것 같구나!”
갑자기 임금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습니다.임금님은 눈물을 흘리며, 양쪽 겨드랑이가 찢긴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원숭이 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여봐라, 당장 원숭이 왕을 풀어 주어라."
임금님의 명령에 신하 몇 명이 원숭이 왕 곁으로 다가왔습니다.원숭이 왕은 겨우 고개를 들고 임금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신하들은 원숭이 왕의 몸을 친친 감고 있던 등나무 덩굴을 풀고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뜰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원숭이들에게도 과일을 자유로이 따먹게 하였습니다.처소로 돌아온 임금님은 자초지종을 왕비에게 얘기하였습니다.
“누구도 저 원숭이 왕에는 따르지 못할 것이오. 임금인 나의 은혜 따위는 원숭이 왕에 비하면 머리카락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소. 그는 정말로 위대한 바보 왕이요.”
임금님은 원숭이 왕을 진심으로 칭찬하였습니다.
“임금님이시여, 원숭이 왕에게 충분히 먹을 것을 주고 또 다른 원숭이들도 바나나를 따먹는 것을 방해하지 않게 명령을 내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왕비도 크게 기뻐하며 임금님에게 진심으로 청했습니다.
“왕비, 그 명령은 내가 이미 내렸다오.”
임금님의 말을 들은 왕비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임금님과 왕비는 나란히 서서 나무 사이를 옮겨가며 바나나를 따 먹는 원숭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며칠 후, 비가 내렸습니다.원숭이 무리들은 부랴부랴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져 있던 땅이 예전처럼 촉촉해졌습니다. 나뭇잎도 파릇파릇해지고 과일도 주렁주렁 열렸습니다.이제 원숭이들은 임금님의 성 주변을 자유롭게 구경 다녔습니다. 사람들과 터놓고 즐거움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약력>이성자명지대 대학원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아동문학평론 동시 신인상,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 계몽아동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등을 받음.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지은 책으로 《피었다, 활짝 피었다》 《꽃길도 걷고 꼬부랑길도 걷고》 《펭귄 날다!》 《엉덩이에 뿔 났다》 등이 있음.
첫댓글 깊은 감동과 교훈이 있는 작품 잘 읽었습니다.
역시
우리 교수님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