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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루의 씨앗
김미희
"내일까지 여러분이 좋아하는 씨앗 가져오는 거 잊지 마세요. 씨앗의 크기도 비교해 보고, 씨앗을 심어서 싹이 나고 자라는 모습을 관찰할 거예요."
선생님은 짝짝 박수를 치면서 끝인사를 했어요
선생님 배웅을 받으며 유치원 버스에 탄 아이들은 앉자마자 생일잔치 얘기를 했어요. 우진이가 토요일에 생일잔치에 초대할 친구들의 이름을 말했어요. 느루를 초대하진 않나 봐요. 끝내 느루 이름은 불리지 않았어요. 느루는 아직 다른 친구들 집에 가본 적이 없어요.
생일 잔치에 친구들을 초대해본 적도 없고요. 친구들을 초대할 집도 마땅하지 않지만요.
“넌 무슨 씨앗 가져올 거야?”
“엄마한테 가서 물어볼 거야. 난 두 개 가지고 오고 싶은데.”
“난 강낭콩 가져올래. 우리 형 강낭콩이 반에서 제일 크게 자랐대. 형 거랑 똑같은 강낭콩 씨앗 사 올 거야.”
버스 안은 씨앗들에 대한 얘기로 가득 찼어요.
엄마 아빠도 없고 형도 없는 느루는 시무룩해졌어요.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는 수밖에요.
“씨앗을 가져오래요.”
느루는 준비물이 적힌 종이를 할아버지한테 내밀었어요.
“무슨 씨앗이 좋을꼬?”
느루네 집은 공원 안에 있어요.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라고 해야 맞아요. 원래는 공원 관리실 뒤쪽에 달린 작은 창고예요. 관리에 필요한 도구들을 넣어두는 곳이죠. 그런데 느루랑 할아버지가 관리 도구들 대신 들어가 살아서 방이 되었어요. 느루와 할아버지와 앉은뱅이 책상만 있는데도 방이 꽉 차요. 하지만 느루네 마당은 넓은 공원이에요.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요. 이 동네에서 새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방이에요. 느루와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새소리 알람을 듣고 일어나요.
밤에 공원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공원 문이 닫히면 출근해요.
할아버지는 닦을 자리도 없는 방을 걸레로 열심히 닦아요.
“씨앗을 가져가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느루가 한 말끝을 올려 그대로 따라 묻더니 더 이상 말이 없어요.
걸레가 달팽이 자국처럼 길을 만들어요.
“무슨 씨앗 가져가냐고?”
느루가 다시 물었어요. 씨앗을 사려면 가게 문이 닫히기 전에 가야하니까요.
“문구점에 파는 씨앗이 좋을까 모르겠구나.”
달팽이가 된 걸레가 책상 위까지 기어올랐어요. 혼자만 겨우 들어가는 집을 가진 달팽이는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잔치를 할 수 없겠네요. 달팽이들도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잔치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은 아닐까요.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마다 먼지들이 사라져요.
‘엄마한테 물어보면 금방 알려줬을 텐데…….“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먼데요. 준비물 때문에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를 부를 순 없어요.
“느루야, 좀 더 생각해보자꾸나.”
“언제까지 생각만 해요?”
느루는 할아버지가 답답해요.
“우리 느루는 어떤 씨앗을 가져가고 싶으냐?”
할아버지가 방 밖으로 나와서 걸레를 빨며 물어요.
“한별이는 강낭콩을 가져온다고 하고 다정이는 채송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어쩌면 두 개를 가져올 수도 있대. 나한테 하나 주라고 할까?”
그런 말을 하다가 느루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요.
“에이, 그러면 그건 내가 가져간 게 아니야. 다정이가 가져온 거지. 아휴 참, 무슨 씨앗이 좋을까?”
“글쎄다. 뭐가 좋을꼬?”
달팽이 걸레는 방문 앞에 세워 둔 할아버지 자전거에까지 성큼 올라타서 기어 다녀요. 자전거 안장에 쌓인 먼지를 샅샅이 찾아내서 먹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고물 자전거라고 놀리지만 공원지기 할아버지가 느루 다음으로 아끼는 보물이에요. 교통사고로 느루 엄마 아빠를 잃었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도 잃었어요. 그러니까 자전거는 할아버지한테 남은 마지막 재산인 셈이에요.
가로등이 켜진 지 오래예요. 공원 문이 닫혔어요.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아요. 울타리는 잘 잠겼는지, 공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없는지, 화장실에 불이 켜지진 않았는지 수도꼭지는 잘 잠겼는지 찬찬히 살펴요.
분수광장에 이르렀어요. 낮에 신나게 롤러코스터를 타던 물방울들도 지금은 잠자는 시간이에요. 쏴아 소리도 잠들었어요.
할아버지가 공원을 한 바퀴 살피고 들어갔어요. 느루는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씨앗은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느루가 물었어요.
“여기 있지.”
할아버지가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자랑스레 내밀었어요.
“무슨 씨앗이에요?”
느루는 아치맞ㅁ이 한꺼번에 달아났어요.
“달씨앗이란다. 소원을 들어주는 씨앗이지.”
“달씨앗이요?”
처음 듣는 씨앗이에요.
할아버지는 느루 가방에 달씨앗 봉투를 조심스레 넣었어요. 느루는 씨앗이 든 가방을 메고 두 손으로 가방을 받쳐 들고 버스에 탔어요.
“씨앗 다 가져왔지요? 여기다 올려놓으세요.”
선생님이 널따란 쟁반에 흰 종이를 깔고 내밀었어요.
아이들이 차례로 쟁반에 씨앗을 올려놓았어요.
다정이는 채송화 씨앗과 맨드라미 씨앗을 가져왔고 빨강이는 나팔꽃 씨앗을, 도영이는 과꽃 씨를, 한별이는 강낭콩을, 진영이는 쥐눈이콩을, 수수 씨앗을 가지고 온 친구도 있어요.
씨앗을 나란히 늘어놓던 선생님 손이 잠깐이었지만 멈칫했어요.
느루 씨앗이 가장 커요. 씨앗들 중에 맨 마지막에 섰어요.
“하하, 이게 뭐야!”
맨 앞자리에 앉은 우진이가 다짜고짜 손가락질을 했어요.
“바보! 씨앗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
“느루 맹꽁이!”
아이들 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왔어요.
“바보 아냐! 맹꽁이 아냐!”
느루가 꽥 소리를 질렀어요.
“달씨앗이야!”
느루가 단숨에 쏘아줬어요.
“세상에 달씨앗이 어딨냐?”
“백 원짜리가 무슨 달 씨앗이야?”
아이들 소리가 더 커졌어요.
느루 울음보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비볐어요.
느루가 가져온 씨앗은 분명 백 원짜리 은빛 동전이에요.
“너희 할아버지도 거짓말쟁이야.”
우진이가 가자미눈을 뜨고 놀려댔어요.
“선생님, 이거 씨앗 아니죠?”
아이들이 하나둘 앞으로 나와서 선생님을 에워싸고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려요. 선생님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달씨앗이 아니라고 하면 느루가 마음 아플 것 같고 달씨앗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선생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겠지요. 선생님은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어요.
“이게 무슨, 씨앗이에요?”
“맞아, 달씨앗이 세상에 어딨어?”
선생님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시끄러워요.
“봐, 여기 쓰여 있잖아.”
느루가 흰 봉투에 쓰인 글자를 읽어 보였어요. 봉투엔 진한 붓글씨로 ‘달씨앗’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달씨앗이 하늘로 올라가 잘 자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어요.”
느루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입을 열었어요.
“내일, 우리 여기에다 씨앗들을 심고 싹이 나는지 기다려보면 되지 않을까?”
선생님이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정말 느루 것도 심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달씨앗은 화분에 심는 게 아닌데…….”
느루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그래? 그렇구나!”
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수업을 계속했어요.
느루는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가는 날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침내 집으로 가는 시간, 느루가 어깨를 푹 수그리고 교실을 나서는데 빨강이가 다가와 물었어요.
“달씨앗 하나밖에 없어? 나도 달씨앗 꼭 필요한데…….”
느루는 개나리 반 친구 중에서 빨강이가 제일 좋아요.
“할아버지한테 물어볼게.”
느루가 수줍게 대답했어요.
“혹시 나도 달씨앗 얻을 수 있을까?”
선생님이 느루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얘기했는데 도영이가 지나가다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으음, 두 개는 있을 거에요.”
느루는 씩씩하게 대답했어요.
다음 날 느루는 할아버지한테 받는 달씨앗 봉투를 선생님과 빨강이한테 건넸어요.
“달씨앗은 어디에 어떻게 심는지 가르쳐줄 수 있어?”
빨강이가 씨앗 봉투를 받고 활짝 웃었어요.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대. 토요일 밤에 오래. 우리 집에.”
안 그래도 할아버지가 씨앗 심으러 오라고 말하라고 했거든요.
“정말? 토요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선생님도 같이 가요!”
“물론이지.”
토요일 밤이 됐어요. 할아버지 말로는 달씨앗은 그믐밤에 심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느루도 처음으로 달씨앗을 심기로 했어요.
“여기에 느루가 사는구나. 참 좋은 곳이네.”
선생님은 공원을 둘러보고 빨강이는 벌써 그루네 집 앞을 뛰어다니고 있어요.
공원 문은 닫힌 시간이라 느루네 빼고는 아무도 없어요.
할아버지가 달씨앗 심는 곳을 알려준대요. 손전등을 비추며 걸었어요.
분수대에 이르자 할아버지가 멈춰 섰어요.
“자, 할애비가 달씨앗 심는 법을 알려주마. 소원을 빌고 씨앗을 분수대 항아리에 잘 던져 심어야 한단다. 그래야 달씨앗이 낮에 분수를 타고 몰래 하늘로 올라가지. 하지만 욕심쟁이들은 절대로 달씨앗을 심으면 안 돼요. 자기가 심은 씨앗에서 자랐다고 자기 달이라고 가지려고 하면 안 되거든. 함께 보라고 하늘에다 심는 거니까.”
“빨강이는 절대 욕심쟁이 아니에요. 과자 같은 거 있으면 꼭 나눠 먹어요. 우리 반에서 제일 착해요.”
느루가 빨강이대신 답했어요.
“그럼 됐어요. 나도 가끔 이곳에 달씨앗을 심어요.”
“할아버지 소원은 이루어졌어요?”
빨강이가 물었어요.
“이루어졌고말고.”
“무슨 소원이었는데요?”
빨강이는 궁금한 게 아주 많아요.
“허허, 비밀이란다. 자, 이 할애비가 씨앗 심는 걸 잘 봐라.”
할아버지가 마음속으로 소원을 말하고 씨앗을 항아리에 심었어요.
‘퐁’
할아버지는 역시 달씨앗 심기 선수예요. 항아리에 씨앗이 톡 안겼어요.
“자, 소원을 빌고 달씨앗을 던지렴. 항아리 안에 잘 심어야지.”
느루는 할아버지가 비춰주는 손전등 불빛을 길잡이 삼아 달씨앗을 힘껏 던졌어요.
다음은 빨강이 차례예요. 빨강이는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 달씨앗을 심었어요. 씨앗이 항아리에 ‘퉁’ 소리를 내며 들어갔어요.
“우리 꼬랑지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했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빨강이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말했어요.
“꼬랑지 죽었어? 언제?”
선생님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지난주에요. 아파서요.”
발표시간에 빨강이가 강아지 얘기를 여러 번 해서 느루도 잘 알거든요.
“저런, 꼬랑지, 꼭 천국 갈 거야.”
느루도 빨강이와 함께 빌어줬어요.
선생님도 분수 항아리에 달씨앗을 심어요.
“선생님, 혹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한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 말에 느루와 빨강이가 낄낄 웃었어요.
“에이, 할아버지도 참, 비밀인데 그걸 얘기하시면 어떡해요?”
선생님은 진짜 결혼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나 봐요. 할아버지를 보며 살짝 눈을 흘겼어요.
“느루야, 네 소원은 뭐야?”
빨강이가 물었어요.
“비밀!”
느루가 비밀이라며 뛰어갔어요. 빨강이가 말해달라며 느루를 잡으러 달려갔어요.
할아버지와 선생님은 아이들을 뒤따르며 천천히 공원을 걸어요.
“할아버지 소원은 뭐예요?”
“내 소원은 우리 느루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거죠.그게 뭐가 됐든.”
“느루 소원이 뭘까요?”
“글쎄요. 얼마 전 느루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아기 때 살던 집으로 다시 이사 가서 친구들을 생일 잔치에 초대하면 좋겠다고요. 느루는 아기 때 사진 꺼내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네에…….”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며 선생님은 오래 고개를 끄덕였어요.
달씨앗을 심은 지 삼 일이 지났어요.
“선생님! 선생님! 어제 하늘 보셨어요? 우리가 심은 달씨앗이 드디어 싹이 났어요.”
빨강이가 유치원에 오자마자 손으로 초승달을 그려 보이며 말했어요.
“물론 봤고말고! 우리가 심은 달씨앗이 분수를 타고 하늘로 잘 올라 갔나 봐.”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관찰 공책을 나눠줬어요.
개나리 반 친구들은 날마다 싹을 관찰하며 그렸어요. 화분에 심은 친구들의 씨앗에서도 저마다 다른 싹이 나고 자랐어요. 관찰 공책에는 싹이 나고 자란 모습들이 잘 담겼어요. 빨강이와 느루도 하늘 꽃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달의 모습을 그렸어요. 초승달이 됐다가 반달이 됐다가 동그란 보름달이 되었어요. 누구 씨앗에서 싹이 텄는지는 상관없어요. 잘 자라고 있으니까요.
“느루야, 생일잔치 할 거지? 나, 가도 돼?”
게시판에 붙은 ‘이달의 생일은 누구?’를 본 빨강이가 물었어요.
“어? 그게, 우리 집은 좁아서…….”
느루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이 날름 대답했어요.
“그 대신 마당이 엄청 넓잖니.”
“정말? 나도 가고 싶어. 느루야, 나도 초대해주면 안 돼?”
“나도!”
“나도!”
친구들이 생일잔치에 초대해달라고 난리법석이에요.
느루 생일에 친구들이 우르르 축하해주러 왔어요. 개나리 반 친구들 모두요.
느루 씨앗은 정말 소원을 들어주는 씨앗인가 봐요.
지금쯤 달팽이들도 생일잔치를 벌이고 있겠지요?
너른 배추밭에 다 같이 모여서요.
김미희 : 1970년 제주 우도에서 태어났다.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으며,
2013년 동화 <백일마다 서는 장>으로 푸른문학상을 받았다.
동화집 <얼큰 쌤의 비밀저금통>,<하늘을 나는 고래>, <엄마고발카페>, 동시집<동시는 똑똑해>,
청소년시집< 외계인에게 로션을 발라주다> 등을 펴냈으며, 서덕출문학상을 받았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