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27]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對話
어제 오전, 임실군립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조정래-조재면 지음, 2019년 해냄출판사 펴냄, 207쪽, 12800원)였다. 이 책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반가워 빌려 읽는데, 머리말부터가 무척 흥미로웠다. 2015년 중앙일보와 한겨레 신문이 ‘같은 문제를 다룬 사설社說’을 나란히 실었던 것을 나도 확실히 기억하는데,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는 신문끼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 조정래 작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설 아래에는 제3자 입장에 선 전문가가 동일한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다른 시각이나 논리로 전개된 두 사설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평가한 글이 실려 있었다. 조 작가는 곧 닥칠 입시경쟁에 시달릴 손자 걱정에 그 사설 1년치를 정성스레 오려서 두껍고 큰 노트에 스크랩을 하여 ‘(논설을 써보라는) 간곡한 편지’와 함께 외고 1학년생인 큰손자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아무말 없이 2학년에 올라간 손자가 대작가大作家인 할아버지의 제안에 응한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주제로 논술 한 편을 먼저 써보냈다. 손자의 논설을 보고 대작가는 “역시 내 손자”라며 입이 함박만해졌다. 할아버지도 곧바로 같은 주제로 써보냈다. 이 책은 조손祖孫간에 주고받은 1년치 논설 5편(그러니까 10편)의 전문과 할아버지가 퇴고推敲한 손자의 논설원본을 실은, 아주 특별한 책이다. 가습기 살균제 옥시와 기업윤리, 청소년 게임이용 시간제한법, 남녀의 성역할과 그 의미, 세계를 뒤흔든 새 역병의 극복 등을 주제로 쓴, 고2 학생의 논설은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로 준수했다. 대한민국의 대문호大文豪 할아버지가 고교생 손자의 논설을 지도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니, 대단하지 않는가. 어지간한 신문사 논설위원 뺨치게 ‘글을 잘 쓰는 손자’라니? 이런 경우를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할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조손교육’의 실상을 보는 듯했다.
1, 2세대 전의 조손교육은 대부분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질과 인사하는 법 등을 먼저 가르쳤는데, 이제는 어느 집안에서도 이런 흐뭇한 광경은 볼 수 없을 터. 그 대신 우리의 문호는 고교생 손자에게 이렇듯 품격있는 논술교육을 시키다니, 멋진 일이다. 드문 일이다. 훌륭하다. 어쩌면 문학가 집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자녀의 논술교육에 고민하는 학부모들은 이 책을 읽어보면 느끼는 게 많을 듯싶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퇴고원본의 행간行間마다 차고 넘쳐, 부러움을 넘어 질투까지 났다. 평생을 ‘글감옥’에서 산 할아버지도 이렇게 ‘손자 바보’가 되는구나, 싶었다. 오죽하면 “여러 말 할 것 없이 손자는 황혼의 인생들에게 하늘이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을까? 그렇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한편 『조정래 시간여행 길』(2016년 해냄 펴냄)도 함께 빌렸는데, 이 책은 ‘사진으로 보는 작가의 자선전’인 셈이다. 작가의 탄생에서부터 현재(『태백산맥』, 『아리랑』 출간)까지 순간순간 찍은 사진들을 잘 배열해놓고 간단한 설명들을 붙이니, 이것 또한 작가가 아니면 하기 힘든, 흔치 않은 작품일 듯하다. 대작가의 문학의 궤적을 충분히 엿볼 수 있어 좋았다. 200자 원고지 16,500장의 『 태백산맥 』 과 2만장의 『 아리랑 』 원고를 쌓아놓으니 작가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 그 원고지 탑 앞에 같이 선 할아버지와 손자의 사진, 조손간에 산책을 하는데, 뒷짐을 진 할아버지를 흉내내며 뒷집을 지며 앙징맞게 걷는 손자와 찍은 조손사진, 미수교未修交 국가였던 러시아와 중국에 어렵사리 다녀온 취재여행 사진 등 사적인 사진들이지만 작가의 앨범을 뒤적거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아내이자 시인 김초혜에 대한 일편단심 사랑은 숱한 문인들의 시샘을 받기에 충분했다. ‘글을 써 잘 살기 어려우니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합의로 아들 하나만 낳았는데, 15년 후 책이 엄청나게 많이 팔릴 줄 알았으면(『태백산맥』은 200쇄를 넘어섰다) 적어도 3명은 낳을 걸 그랬다, 내 일생의 가장 큰 오류(?)였다는 작가의 고백이 씁쓸하기도 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은 하룻내 작가의 집을 다녀온 듯해 나쁘지 않았다.
첫댓글 손주에 관한 詩
호준이 <이승훈>
크레용 없어요? 호준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묻는다 뭐 크레용? 그런 건 없어 그런 건 네가 가지고 있어야지 겨울 저녁 여섯 시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그냥 나간다 문 꼭 닫고 나가! 말하면 그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간다 호준이는 벌써 일곱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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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일곱살은 이제 세상이 바뀌어 미운 네 살이 되었다!
이건 3대가 한 집에서 부대끼면서 살 때의 느낌인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