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18절『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쉼파스코멘)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아포칼뤼프데니)과 비교할 수 없도다』 쉼파스코멘은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자가 겪는 고난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영광(아포칼뤼프데니)과 비교하고 있다.
8장 19절『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죄악된 세상에서 힘들게 사는 피조물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8장 20-21절『피조물(헤 크타시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디아 톤 휘포탁산타)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헤 크타시스에서 크타시스는 단수이고, 헤는 정관사로서 특별한 인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피조물인 인간이 헛된 것에 굴복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아 톤 휘포탁산타는 굴복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이라고 되어있으므로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굴복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다.
8장 22절『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쉬스테나제이:현재시제)) 함께 고통을 겪고(쉬노디네이:현재시제)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오이다멘)』 오이다멘(현재완료 시제)은 지식으로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으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삶의 허무함과 세상의 부패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8장 23절『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탄식은 세상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인 자녀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의 뜻을 실현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육신의 연약함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선한 사역을 하는 자가 양자가 되는 것이다.
8장 24-25절『우리가 소망(엘피스)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디 휘포모네스) 기다릴지니라』바울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눈으로 보고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디 휘포모네스이다. 즉 휘포모네를 통해서 이다. 휘포모네는 휘포(~아래서)와 모네(머물다)의 합성어이다. 심령 속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양자가 되려면 이렇게 심령 속의 지성소 보좌에 들어가 주님과 대화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바로 쉼파스코멘이 바로 휘포모네를 위한 고난이 되는 것이다.
8장 26절『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토 프뉴마 휘페렌탕키네이 스테나그모이스 알랄레토이스)』
(토 프뉴마 휘페렌탕키네이 스테나그모이스 알랄레토이스)는『성령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들과 관련하여 중보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스테나그모이스는 탄식들인데, 이는 성령의 탄식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과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의 탄식과 관련하여 중보하고 있다. 간구와 중보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중보는 성도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중보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헛된 기도가 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을 듣지 못하고, 또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의 내면의 탄식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8장 27절『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중보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들은 죄악가운데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탄식 소리를 듣는 것이다. 죽어있는 영을 살리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8장 28절『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동격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바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아는 자들이다. 바로 죽어있던 영을 살리는 자들인 것이다.
8장 29절『하나님이 미리 아신(프로에그노)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쉼모르푸스 테스 에이코노스 투 휘우 아우투) 미리 정하셨으니(프로오리센)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프로에그노는 프로(앞서)와 기노마이(알다)의 합성어이다.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프로오리센은 프로(앞서)와 호리조(경계를 표시하다)의 합성어다. 하나님이 이미 구별지어 표시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구별하여 표시했다는 말이다.
쉼모르푸스 테스 에이코노스 투 휘우 아우투는『그의 아들의 닮음의 함께 하는 형상』이다. 에이코노스는 닮음이다. 똑같지만 본질이 다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는 보기에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의미다. 쉼모르푸스는 한글 개역개정에는 본받게 라고 번역되었는데, 쉼(함께) 모르페(본질)의 합성어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므로 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를 이끄시는 맛아들이 되는 것이다.
8장 30절『또 미리 정하신(프로오리센)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에켈레센)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에디카이오센)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독사센)』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짐으로 인해 하나님이 미리 아셨던 자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미리 택정하신 후 그의 이름을 불러 내신다. 이를 소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후에 죄악 가운데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택정함을 받는데서 시작하여 죄악가운데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영광을 보는데서 끝이 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들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로 있다면 아들로 되어야 에켈레센(부르심), 에디카이오센(의롭게 하심)과 에독사센(영광스럽게 하심)의 과정으로 나갈 수 있다. 이 동사들은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 안에 임재하신 호 로고스(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