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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8.가지안테프(Gaziantep) 시티투어 (230629)
23.06.29.목요일.
여행 38일 차 날이다.
1.
가지안테프(Gaziantep)에는 어제 늦게 도착 해 거의 어두워질 무렵에 숙소에서 가까이 있는 가지안테프 성(Gaziantep Castle)의 외관만 훑어봤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튀르키예 대 지진의 중심피해지역이 바로 이 곳 가지안테프를 시작으로 북동방향으로 지진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실제 산리우르파도 지진피해가 있었다 했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별로 접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튀르키예 지진중심지역 여행을 스킵할 생각도 가졌었는데 막상 튀르키예 여행을 시작해 동부쪽부터 중남부 시리아 국경과 접하는 이곳까지 오면서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다녔다. 그러던 와중 어제 저녁 가지안테프 성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린 걸 보게 되면서 그 피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지안테프성의 무너져내린 모습
2.
먼저 가지안테프에 대한 지식백과 안내문을 본다.
가지안테프 (Gaziantep)
터키 남부,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인구 1,175,042(2007년)
옛 이름은 아인타브(Aintab)이다. 지중해 북동단 이스켄데룬만(灣)에서 동쪽으로 100km 정도 들어간 지점에 있다.
유프라테스강(江) 연안과 시리아 알레포 방면으로 통하는 철도의 분기점이다. 곡물·담배·포도 등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활기를 띠며, 방직공업을 비롯한 소규모 공업도 있다.
십자군 원정 당시 전략적인 요지였으며, 1920∼1921년에는 프랑스에 대한 시리아 독립운동의 한 중심지였다.
오늘 가지안테프 시내투어는 숙소를 기준으로 길게 뻗어 있는 도심공원을 따라 움직여 보기로 했다.
로타리 거리에 있는 탑과 모스크탑
가지안테프 도심공원이 시작된다.
공원이름은 "100. Yıl Atatürk Kültür Parkı" (100주년 기념 아타튀르크 문화 공원) 이다.
가지안테프 문자 랜드마크
그늘에 앉아 쉬기
공원 안에 있는 어린이들 놀이동산
여러개의 공원이 연이어 나오며 길게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젊은 진구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3.
지금까지 튀르키예 여행이 11일 째를 맞이하고 있지만 어델가나 튀르키예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기마상을 자주보게된다. 그렇기에 이곳 가지안테프의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공원의 이름도 "100.Yıl Atatürk Kültür Parki" (100주년 기념 아타튀르크 문화 공원으로 명명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 아타튀르크 (튀르키예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의 요약된 일생을 살펴보기로 한다.
케말 아타튀르크 ( Kemal Atatürk)
튀르키예의 개혁가이자 초대 대통령. 세브르조약에 대한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격퇴하였으며 정치개혁으로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연합국과 로잔조약을 체결하였다.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통령이 되었으며 정당정치를 확립하였다.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며 케말 파샤라고도 한다. 아타튀르크란 '튀르키예의 아버지'를 뜻하는데, 1934년에 대국민의회(튀르키예의 국회)에서 증정한 칭호이며, 파샤는 군사령관·고급관료에게 보내지는 칭호이다.
무스타파 케말은 1881년 3월 12일 오늘날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튀르키예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부터 군사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904년 이스탄불에 있는 하비에르 육군 참모 대학에 입교했다. 그는 군사학 뿐만 아니라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수학교사로부터 완벽함을 뜻하는 ‘케말’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을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군사교육을 받는 동안 청년튀르크당(Young Turks)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했다. 이 운동은 튀르키예의 청년장교들로 구성된 정치단체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전제왕정인 술탄제를 폐지하고 튀르키예 민족주의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정치 운동이었다. 이러한 정치운동에 가담했던 무스타파 케말은 고급장교임에도 불구하고, 190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변방지역인 시리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인정받아 1911~12년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 때 소령 계급으로 참전했으며, 소피아의 주재무관에서 북아프리카의 벵가지 방면으로 전속되어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12~13년의 발칸 전쟁 때에는 군사령관으로서 다르다넬스 해협과 동부국경의 방위를 맡아 공훈을 세웠다.
1915년 무스타파 케말은 대령 계급으로 갈리폴리 반도의 로도스토 지역에서 제19사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1915년 4월 25일부터 시작된 영국군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격퇴하는 반격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때의 경력으로 정부는 그를 장군으로 특진시켰으며, 제 1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1916년까지 아나톨리아 방위에서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연달아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대가 독일군의 지휘를 받는 데에서 항상 느꼈던 불만을 터뜨렸으며, 그의 언동에 분노한 전쟁장관은 1917년 무스타파 케말을 군단장직에서 해직, 병가(病暇) 장군 위치로 격하시켰다. 비록 1년 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현역으로 복직되어 팔레스타인 지역 주둔 제 7군 사령관직을 맡았으나, 연합군의 수적 우세에 압도되어 후퇴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만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 존재하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모두 아우르는 국가로 독립하기 위해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를 그들만의 공통유산에 기초한 국민국가로 단결시키는 방향으로 독립절차를 개시했다.
전후 이스탄불과 마르마라 해변의 이즈미트, 에게해를 면하는 이즈미르 등지가 1919년 2월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조국의 구제에 나섰고, 1919년 5월 흑해 연안의 삼순항에서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8월에는 에르주룸에서 ‘국민의 제권리를 수호하는 동방 제주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이어 시바스에서 민족항전의 협의를 거듭하였다. 이듬해 1월에는 앞으로의 대외정책의 기본강령이라고 할 ‘국민맹약(國民盟約)’을 선언했고, 4월 앙카라에 ‘대국민회의’를 개설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8월 술탄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조약을 강요당하자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1921년 8∼9월에는 앙카라를 향해 진격하는 그리스군을 사카리아 강변에서 격퇴하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1920년 마침내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년간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여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에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이듬해 7월 연합국과의 사이에 새로 로잔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 공화제를 선포하고 29일에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인민공화당을 창설하여 정당정치를 확립하였다.
그는 재임기간동안 개혁과 개방에 몰두했으며, 이슬람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1925년에는 이슬람 전통 복장이 폐지되었으며, 남녀의 합동 교육이 실시되었다. 1926년에는 새로운 민법이 제정되어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이 도입되었다. 1928년에는 아랍 문자의 사용이 폐지되고 로마자로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되었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그는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서구식 법치와 민주적 정치제도로 현대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튀르키예 국회는 1934년 무스타파 케말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했다. 그는 평생 조국독립과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재임중이던 1938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타튀르크의 이미지와 기마상
4.
다음으로 택시를 이용해 외관이 예쁜 모스크(Camii)로 갔다. 원래는 아타튀르크 문화공원 벨트가 끝나는 지점에서 어렵게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고 위 외관이 이쁜 모스크로 가자 했는데 이 친구 우리를 샤인 베이 파르크(Şahinbey Parkı) 입구에 내려주곤 그대로 가버렸다, 마침 커다린 모스크가 보여 그 곳인 줄 알고 우리도 차에서 자연스레 내렸다.
그러나 사진에서 봤던 모양의 모스크가 아니었고 맵스미 상으로도 더 먼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우린 잘못내린 Şahinbey Parkı도 잠시 둘러본 뒤 다시 택시를 타고 그 청색지붕을 가진 모스크로 향했다.
사진상의 모스크 모습
그리고 실제로 찾아간 모스크..
모스크이름은 Adil Karsila Camii로
사진의 외관모양과 똑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제대로 운영되는 모스크가 아닌 것 같았다.
우선은 그늘정자에 앉아 커피를 타 마신다
출입구도 잠겨있어 약간은 방치되고 있는 모스크라 여겨졌다.
5.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기 우린 주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모스크에서 나와 한참을가서야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슨 행사가 있어 단체로 들어 온 손님들 같았다.
우리도 창가 가까이 앉아 메뉴표를 달라해 주문을 했다.
실내가 깨끗한 레스토랑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보이는 창가의 뷰
야채 샐러드
내가 주문해 먹은 닭 날개 튀김을 기반으로 한 세트메뉴
다른 대원의 주문식단
6.
점심 후 택시 편으로 숙소 호텔로 돌아왔다. 먼거리 언덕 위로 오밀조밀한 밀집 주택들이 보였다. 시간은 거의 오후 3시가 다 되어 갔다. 호텔에 도착해 좀 이르긴 했지만 오늘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햇빛이 따갑고 더웠기 어델 또 보러 나선다는게 무리일 듯 싶었다.
차창에서 찍은 언덕의 밀집주택들 풍경
양이나 가축들의 경매장이다.
차를 타고 가는중에서도 현장에서 양을 도살해 가죽을 벗기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아타튀르크 기마상이 보였다.
<38일 차 여행일정 끝.>
첫댓글
튀르키예의 영웅 케말
젊은 나이에 사망 했군요
우리나라도 조선의 정조도
또 누구도 좀더 오래 살았으면 대한민국이 좀더 달라졌을 텐데...
모스크가 상당히 많은 터키
하도 많이 보니 그게 그거 같드군요 예전에 갔을때요
이스라엘 성지순례 갔다 오는 길에
이스탄불에 들러 케말파샤가 대통령 되어 근무했다는
술탄 궁에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성지만 두루 둘러보기도 힘든 코스인데
영상과 해설에 수고 넘 많으십니다.수고하셧습니다.
그래도 음식이 별로 가리지 않고 드시니 긴여행하는데 걱정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