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짓는 죄, 언론이 짓게 하는 죄
집회 5,1-8; 마르 9,41-50 / 연중 제7주간 목요일; 2025.2.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죄 짓지 말고, 남을 죄 짓게 하지도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죄에 대한 이 명령이 어찌나 추상같이 엄하던지 당신을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 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남을 죄 짓게 하는 죄는 ‘죽을 죄’라는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는 그토록 벌이 무겁습니다. 스스로 짓는 죄도 그 벌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오죽하면 손이나 발이나 눈으로 지를 짓느니, 차라리 그 손과 발과 눈을 잘라 버리든지 빼어 던져 버리는 편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입만 열면 천국이 다가왔으니 그 초대에 응하라고 선포하시던 분이 모처럼 작정한듯이, 아주 살벌한 어조로 지옥벌에 대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짓는 죄도 벌이 무겁지만, 남을 죄 짓게 하는 죄 그것도 ‘당신을 믿는 이 작은 이들’, 즉 믿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죄 짓게 하는 죄는 반드시 영원히 불 타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르코가 전해 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무섭고도 매서운 메시지입니다.
성서의 역사 안에서 마르코는 ‘복음서’라는 문학 유형을 처음으로 시작한 복음사가입니다. 베드로의 제자이자 바르나바의 조카였던 그는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소아시아 선교여행을 처음 다딜 때 동행하다가 도중에 돌아와서 복음서 집필에 착수했습니다. 당시의 연대 기록을 대조해 보면, 선교 여행을 처음 떠날 때가 58년 경이고 복음서를 펴낼 때가 70년 경이니까, 한 십이 년 정도 걸린 작업입니다. 그의 이런 작업이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는 두 번째로 선교여행을 하던 바오로가 유럽 선교를 개척하다가 무진 고생을 많이 하고 데살로니카에 어렵사리 세운 공동체를 위하여 코린토에서 보낸 편지와 마르코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카 편지가 신약성서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쓰여진 문서인데, 편지 형식으로 쓰인 글이니 만큼 발신인과 수신인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발신인인 바오로를 주어로 문장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데살로니카에 세운 어린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바오로 자신이 사무치는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부활 신앙에 입각하여 구구절절 간곡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2차 선교여행 중에 쓰여진 것인데, 아마도 마르코도 동행했던 1차 선교여행에서도 사도 바오로의 지향과 자세는 동일했었을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와 마르코의 차이는 바오로가 선교사로서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주려는 데 비해 마르코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도록 보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르코는 바오로와의 1차 선교여행 도중에 돌아와서 생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목격자와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취재 작업을 꼼꼼히 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신앙 체험을 토대로 예수님을 전하는 그 양식이 못 미더웠던 것 같지요? 그는 자신이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나 행적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펴낸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있었던 사건들이 주로 보도되어 있어서 가르침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이 가르침은 훗날 마태오에 의해서 보완되지요. 그래서 오늘, 마르코 복음서에는 매우 희소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마르코 9장의 메시지가 돋보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특히 이 메시지가 천국과 함께 지옥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참고로, 바오로는 지옥에 대해 언급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건들 위주로 예수님께 대한 보도를 하던 마르코에 의해서 건져진 귀한 메시지가 오늘 복음인 셈인데, 당신을 믿고 따를 이들에 대한 두 가지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선행과 평화에 대한 당부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물 한 잔을 주는 일 같은 선행을 서로 간에 베풀기를 힘쓰라.”는 것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금은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 대한 건전한 사회의식으로 알아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는 죄악을 경계하는 당부로서, 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남들을 죄짓게 하는 죄와 다른 하나는 스스로 죄악에 물들어 저지르는 죄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 죄악에 물들어 저지르는 죄도 멀리 해야 하지만, 남들을 죄짓게 하는 죄를 저지르는 이 악인들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저질러지는 악의 구조와 과정에 대한 통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인 죄는 그 죄를 짓게 만드는 고리, 즉 발이나 눈 같은 신체 부위의 욕망을 끊어 버림으로써 멀리 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리고 원인적인 죄는 그 악을 저지르는 악인들을 무겁기 짝이 없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편이 더 나을 정도로 제거하고 축출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경계하는 일과 선행을 실천하는 일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신앙인과 공동체의 리듬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 모두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지도 말아야 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악인들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필요한 선행과 자비를 베풀면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안에 하느님을 현존시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지혜입니다.
이토록 혹독하게 단죄하고 간곡하게 선행을 당부하신 이유는 당시의 유다인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죄가 저질러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특히 당대의 지식인 엘리트로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죄가 심각했습니다. 마르코가 복음서를 펴낸 후 20여년 만에 마태오가 복음서를 펴내면서 제23장에 그들의 죄를 꼼꼼하게 열거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로 단죄 받은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그래서 더 큰 죄였습니다. 이러한 악표양 때문에, 어쩌다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종내는 그들보다 갑절이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죄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고” “성전을 두고 한 거룩한 맹세는 우습게 취급하면서도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같이 물질로 바치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가치들로 바쳐야 할 십일조는 소홀히 하는” 위선을 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질의 십일조도 더 많은 축복을 바라면서 봉헌을 하는 천박한 거래 행위라서 역겹거니와 가치의 십일조는 소홀히 하는 위선도 보기가 지겹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차지했던 사회적 지위와 대비되는 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사법 분야의 엘리트 이상으로 행세하는 언론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은 선출되지도 않았고 임명받지도 않았습니다만, 상업적으로 정보 유통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행정, 입법, 사법에 이어 준공적 기관인 양 제4부로 행세합니다. 임기도 없고 심판받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입니다. 12.3 비상계엄으로 내란 정국이 진행되고 헌법 심판이 내려지고 있는 이즈음, 이 언론 엘리트들은 명백한 내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내란을 내란으로 규정짓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언론 엘리트들은 대다수 국민 여론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내란 이후 새로운 정치 질서의 향방에 있어서 여론을 오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두둔하고 비호해 온 현 정권이 무너지기에 이르니까, 잘못을 시인하고 국민에게 사과하기는 커녕 양비론의 뒤에 숨어서 ‘임기 단축’이니 ‘자진 하야’니 하는 카드를 슬그머니 꺼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언론의 죄는 없다는 투입니다. 내란죄 심판 정국을 보도함에 있어서도 여야의 입장, 즉 내란 비호 세력과 헌정 수호 세력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동일한 비중으로 취급해서 국민 여론을 호도하는 중입니다. 한심한 양비론이요, 정권 교체에 대비한 보신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 구도의 섬, 남북 분단의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극단적 혼란상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희귀한 현상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강점하면서 이식된 파시즘 체제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윤석열’로 이어지면서 세력을 키운 보수 정당 – 사실은 극우 파시즘 정당 -이 친일 경력을 반공 세력으로 위장하면서 국민 여론의 절반 가량을 지지받아 온 것은 매우 불행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통탄할 노릇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들의 극우 파시즘 세력들이 민족주의 경향을 띤 것과는 반대로, 한국의 극우 파시즘은 반공을 매개로 친일 매국 경향을 띠었습니다. 서구의 보수 세력이 애국심과 명예 그리고 질서를 존중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도 언론이 공동선을 집약한 헌법적 가치를 외면하고 이들 반민족적 파시즘 세력에 기생해 온 역사는 한민족 내지 대한민국의 원죄입니다. 기준이 없고 중심을 잡지 못하면 쓰러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라도 기준을 제시하고 중심을 잡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을 경계하고 선행을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릇 언론이란 국민의 여론을 대변해야 하는 책무를 지는 공적인 기관이어야 하며, 사회 공동선을 집약한 헌법과 법률의 가치를 기준하여 사실을 보도하고 진실을 판단해야 하는 공적인 책무를 지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언론은 상업적인 정보 유통 업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광고주의 압력에 굴종하며 스스로 언론 재벌이거나 재벌과 사돈 간이거나 재벌의 산하 기업인 조선, 동아, 중앙의 논조가 그렇게 비굴합니다. 이들 기성 언론 트리오에 의해서 언론 시장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논조가 극우 파시즘을 추종하고자 하는 일부 젊은이들과 ‘아스팔트 우파’의 폭력과 준동을 사실상 유도하면서 국민 여론의 정서적 양극화와 우경화를 부추겨서 죄를 짓게 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과 공명정대함의 가치를 저버린 이 언론 엘리트들의 교활함과 간사함이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능가합니다. 재물과 기득권에 대한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이들에게 예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