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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아리~아라리~요~~
방토이가 오솔길 님들과 함께 가고 싶은 길
여기에 아리랑을 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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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로 시작되는 정선아라리(정선아리랑).
오랜 세월에 걸쳐 살아 숨쉬는
그 정선아라리의 가락과 사설에 홈빠닥 빠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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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어느날>
조양강(朝陽江) 강가에 자리잡은 정선 재래시장으로 들어서니 마침 장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전국 최대규모의 민속장이라는 정선 오일장을 보게 된 것은 이 올아의 행운이다.
재래시장터 길 양쪽으로 빈틈없이 들어찬 노점과 좌판마다
정선의 토산물인 각종 농산물과 한약재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다.
생약탕(?)한사발을 들이킨다.
막걸리의 특유한 맛이 목줄기를 타고 전해진다.
막걸리는 왁자지껄한 이런 시장터에서 마셔야 제맛이 나는 법이다.
꼭 맛보고 싶었던 수수노치라는 음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어릴때의 기억만)
시장터를 돌다가 순대국밥집이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로 이미 만원이다.
조금 딴전 피운다..(꼭 먹어봐야지 하는 올아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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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머리고기와 순대 한 접시를 놓고 옥수수술을 마시기로 한다.
이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술이라는데
허허.. 그것 참 일품이네 ...
내 삶이 찾아 헤메지 않아도 그냥 바람 따라 가메 있거늘
어린 시절 나의 고향에서도 오일장이 섰었다.
오일장터는 시골사람들이,
생을 내다팔거나 필요한 또 다른 생을 사고 주는 교역의 장이었으며,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던 만남과 정보교류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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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를 구경하다가 어머니가 국화빵이나 순대국밥을 사주기라도 하는 날은 운수대통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눈깔사탕(지금 생각하니 돌 사탕-방통의 확실한 기억))을 사주기도 하셨다.
눈깔사탕을 입에 넣고 한쪽 볼이 툭 불어나도록 물고 있으면
만족감에 마음이 다 흐믓해지곤 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지금은 막걸리 잔에 띄워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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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라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로 시작되는 노래다.
오늘 전수회원들이 들려주는 정선아라리의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긴 아라리'와 '엮음 아라리'로 보인다.
두 아라리의 가사는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긴 아라리는 정선의 첩첩산중의 산세를 떠올리며 소리를 길게 끌어가면서 구성지게 불러야 한다.
아라리를 부르다가 가사가 막히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른다.
정선아라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서양음악의 후렴과는 달리 덧붙임 소리다.
엮음 아라리는 서양음악의 랩처럼 빠르게 부른다.
되도록 호흡을 멈추지 않고 한번에 계속 이어서 부르는데, 마지막 두 소절의 가사는 긴 아라리 가락으로 불러야 한다. 긴 아라리 가사를 들어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나/송정암 나루터가 한강수 되었오//
개구장가에 포름포름에 날 가자구 하더니/온 산천이 어우러져도 날 가자구 안하네//
그대 당신을 사모하다가 골수에 든 병/화타 편작이 치료한들 일어날 수 있나//
금도 싫고 은도 싫고 문전옥답 내 다 싫어/만주벌판 신경(新京) 뜰을 우리 조선주게//
꼬치밭 한 골을 못 매는 저 여자가/이마 눈썹은 여덟 팔(八)자로 잘 가꾸네//
꽃 본 나비야 물본 기러기 탐화봉접(探花蜂蝶) 아니냐/나비가 꽃을 보고서 그냥 갈 수 있나//
나비 없는 강산에 꽃은 피여 뭣하며/당신 없는 요 세상 단장하여 뭣하나//
날 따라오게 날 따라오게 날만 따라오게/잔솔밭 한중허리로 날 따라오게//
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도랑에 물이 뿔거든/내가야 왔다가 간 뒤에 울고 간줄 알아요//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이불 담요 깔겠나/마틀마틀 장석자리에 깊은 정 들자//
노랑 저고리 진분홍 치마를 받고 싶어 받았나/우리 집 부모님에야 말 한마디에 울며불며 받았네//
노랑두 머리에 파뿌리 상투를/언제나 길러서 내 낭군 삼나//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도록 가지만/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라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담배불이야 반짝반짝에 님 오시나 했더니/저 몹쓸 놈의 반딧불이가 나를 또 속이네//
당신은 거기에 있고서 나는야 여기에 있어도/말 한마디 못 전하니 수천리로구나//
당신은 나를 알기를 흙싸리 껍질로 알아도/나는야 당신을 알기를 공산명월로 알아요//
당신이 날만치만 생각을 한다면/오동지 섯달에도 진달래가 피지요//
당신은 왔다가 그저 간 듯 하여도/삼혼칠백(三魂七魄)의 맑은 정신은 뒤따라간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멀구다래를 딸려거든 청서듥으로 들고요/이내 몸을 만날라거든 후원별당으로 들게//
무정한 기차야 소리말구 가거라/산란한 이내 마음이 더 산란하구나//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그대 당신은 어데로 갈라고 이 배에 올랐나//
물한동이를 여다 놓고서 물그림자를 보니는/촌살림 하기는 정말 원통하구나//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앞 남산 철쭉꽃은 강산(江山)이 붉어 좋다//
밥 한 냄비를 달달 볶아서 간난이 아버지 드리고/간난이하고 나하고는 저녁 굶어 자자//
배달의 동포야 굶주리지 말고서/힘대 힘대로 일하여 자수성가합시다//
변북이 산등에 이밥취 곤드래 내 연설을 들어라/총각 낭군을 만날라거든 해 연년이 나거라//
봄철인지 갈철인지 나는 몰랐더니/뒷 동산 행화춘절(杏花春節)이 날 알려주네//
사발그릇이 깨어지면은 두 세 쪽이 나는데/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친다//
살개바우 노랑차조밭 어느 누가 매느냐/비 오고 날 개는 날에 단둘이 매러 갑시다//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도 풀은 풀이 아니냐/하루밤을 자고 가도 임은 임일세//
삼십육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을유년(乙酉年) 팔월십오일 다시 만발하였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정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서울에 종로 네거리 솥 때우는 아저씨/우리들의 정 떨어진 것은 왜 못때워주나//
석새배 곰방치마를 둘렀을 망정/네까짓 하이칼라는 내 눈 밑으로 돈다//
수수밭 삼밭을 다 지내 놓고서/빤빤한 잔디밭에서 왜 이렇게 졸라//
술으는 술술술 잘도 넘어 가는데/찬물에 냉수는 중치에 미인다//
시누야 올캐야 말내지 말게/삼밭 속의 보금자리는 내가 쳐 놓았네//
시어머니 산소를 까투리봉에다 썼더니/아들딸 낳는 쪽쪽 콩밭골로 가네//
시어머니 산소를 깨구리봉에다 썼더니/옆구리만 찔러도 해딱 자빠지네//
시집간지 삼일만에 부뚜막 장단을 쳤더니/시어머니 눈은 까재미 눈이 된다네//
시집온 지 사흘만에 바가지 장단을 쳤더니/시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엉덩이 춤만 추네//
신발 벗고 못가실 데는 참밤나무 밑이요/금전 없이 못갈 때는 술집 문전이라//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남자더냐/산 넘구 물 건너면 또 남자 있겠지//
싫으면 말어라 너만이 여자더냐/산 넘구 물 건너면 또 여자 있겠지//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 같다면/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굴세//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 주게/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사시장철 님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질아질 성마령(星摩嶺) 야속하다 관음베루/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앞 남산 살구꽃은 필락말락 하는데/우리 둘이 정이야 들락말락 하네//
앞 남산 실안개는 산허리를 돌구요/우리 님 양팔은 내 허리를 감네//
앞 남산에 황국단풍은 구시월에나 들구요/이내 몸에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앞 남산의 호랑나비는 왕거미줄이 원수요/시방시체 청년들은 삼팔선(三八線)이 원수라//
영감아 홍감아 집잘보고 있거라/잠자리 팔아서 엿사다 줌세//
오늘 갈는지 내일 갈는지 정수정망(定數定望)이 없는데/맨드라미 줄봉숭아는 왜 심어놨나//
오늘 갔다가 내일 온다면 나는 안따라가지만/오늘 갔다가 모레 온다면 나는 따라가요//
오라버니 장가는 명년에나 가시고/검둥 송아지 툭툭 팔아서 날 시집보내주//
우리 님 말씨는 얼마나 고운지/뒷동산 물푸레 회초리 착착 휘네//
우리 어머니 나를 길러서 한양 서울 준댔죠/한양 서울 못 줄 망정 골라골라 주세요//
원앙금침에 잣비개는 저녁마다 비련만/대장부 긴긴 팔은 언제나 비나//
월미봉(月尾峯) 살구나무도 고목이 덜컥 된다면/오던 새 그 나비도 되돌아 간다//
유전자(有錢者) 무전자(無錢者) 사람 괄세 말어라/인간세계 부귀영화는 돌고도 돈다//
육칠월 감자싹으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을 적는데/대한 청년 남아는 만고풍상을 다 겪네//
이밥에 고기 반찬은 맛을 몰라 못먹나/사절치기 강낭밥도 마음만 편하면 되잖소//
이삼사월 긴긴 해는 점심 굶어 살아도/동지섣달 긴긴 밤이야 임 그리워 못 살겠네//
저 건너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해 묵네//
정선같이 살기 좋은 곳 놀러 한 번 오세요/검은 산 물밑 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정선 사십리 발구럭 십리에 삼산(蔘山) 한치인데/의병난리가 났을 때도 피난지로다//
정선앞 한강수(漢江水)는 소리없이 흐르고/옛 조상 옛 시(詩)는 변함이 없다//
정선의 구명(舊名)은 무릉도원(武陵桃源) 아니냐/무릉도원 어데 가고서 산(山)만 충충하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우리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몰라//
정선읍내야 백모래 자락에 비 오나 마나/어린 가장 품안에 잠자나 마나//
정선읍내 일백오십호 몽땅 잠드려 놓고/임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창밖에 오는 비는 구성지게 오잔나/비 끝에 돕는 달은 유정(有情)도나 하구나//
천기운기(天氣運氣)로 눈비 올라면 땅이 누기가 있드시/눈도 비도 다 오는데 당신은 왜 못오시나//
하루밤 맺은 정을 끊지 못해서 우느냐/능나도 수풀 속에서 봄비가 온다//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님의 맛만 같다면/올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지요//
허공중천에 뜬 달은 임 계신 곳을 알건만/나는야 어이해서 임 계신 곳을 모르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만지산(滿池山) 전산옥(全山玉)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출처-정선 아리랑 학교>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선아라리는 결코 흥겹고 신나는 노래가 아니다.
심심 두메산골의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던 정선사람들은 풍자와 해학을 실은 아라리가락에 삶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왔다.
그러기에 정선아라리는 기본적으로 한(恨)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두메산골의 고달픈 삶, 떼꾼들의 고단함 등 민중들의 한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기다다 일제강점기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울분,
한국전쟁과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같은 시대를 넘나드는 내용도 같은 노래에 들어 있다.
이것은 정선아라리가 어느 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연들이 계속 첨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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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라리는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 충북, 경기도 동부에서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민요로 그 기원은 여말선초(麗末鮮初)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선비들 중 일곱 사람이 정선 그러니까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숨어 들어오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와 지난 날의 회상,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율창(漢詩律唱)에 담아 부르곤 했다.
몰락한 고려유민들이었기에 그들의 시는 비통하면서도 한이 맺혔을 것이고, 율창의 가락은 슬프고도 구성졌을 것이다.
이들의 시는 마을사람들이 부르던 소리에 실리면서 그 애절함을 더해갔다.
정선아리랑이 '‘아리랑' 또는 '아라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 이후부터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대량의 목재가 필요해지자 원목을 운반하던 정선의 뗏목꾼들에 의해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이그 ..힘들다~아 쇠주 한잔 하고..)
이때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가사가 덧붙임 소리로 자리잡게 되면서 '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정선아라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정선에서 다른 지방으로 출가한 남녀나 떼꾼, 소리꾼,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 화전민 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그곳의 문화적인 특성이 더해진 또 다른 이름의 수많은 아리랑을 생겨나게 했다.
특히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출발해서 영월과 단양, 충주를 거쳐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 뗏목의 이동로였던 남한강(南漢江)은 정성아라리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장장 보름동안이나 천이백 리 남한강 물길을 따라 뗏목을 저어가야만 했던 뗏군들은 무료함을 달래거나 떼몰이의 고달픔을 잊으려고 정선아라리를 불렀으며,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뗏목을 댄 강가의 주막에 들러 걸판진 술판을 벌일 때마다 부르던 소리도 정선아라리였다.
정선아라리는 그렇게 남한강 물길을 따라서 퍼져나가 남으로는 경북 구미의 '구미아리랑'에 반영되기도 했으며, 북으로는 만주 흑룡강성의 '아리랑련곡'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정선아라리는 노동의 현장이나 놀이의 공간을 가리지 않고 아무때, 아무데서나 불리워지던 노래였다. 나물을 뜯거나 밭을 맬 때,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맬 때, 나무할 때, 떼를 매거나 탈 때, 삼 삼을 때, 아이를 재울 때, 부역을 할 때 뿐만 아니라 잔치 때, 여럿이 함께 모여 놀 때도 정선아라리가 불리워졌다.
이처럼 정선아라리는 노동요로서만이 아니라 유희요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선아라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혼자서도 부를 수 있고 둘이 있을 때도 부를 수 있으며, 여럿이 있을 때도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둘이서 소리를 서로 메기고 받다가, 또는 여럿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부르다가 가사가 막히는 사람은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 판을 깨지 않기 위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를 불렀는데, 이 때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덧붙임 소리를 함께 부름으로써 정선사람들은 나눔과 어울림의 대동세상을 열어갔던 것이다.
정선아라리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래가 두 줄짜리의 짧은 형식을 가진 가사 중심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즉 이 노래는 음폭의 높낮이가 크지 않고 가락이 길게 늘어지면서 단조롭기에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즉흥적으로 노랫말을 지어 붙여서 부르면 된다.
정선아라리는 아무 말이나 찍어다 붙이면 되는 노래다.-지금 올아가 사는 방식,-
그래서 정선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정선아라리를 갖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알 수 있다.
그 노랫말 하나하나에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한 정선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서와 삶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
하나의 민요에 이렇게 가사가 많은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없다. 그것은 바이블이 형성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선아라리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노래였음을 말해준다.
첫댓글 아고 머리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머리가 띵 큰집에 갔다 와서 자세히 읽어 볼께용
쌀로담은술은 우리엄니표 맛이인디요 어렷을때 산속에몰래담아놓은 술..산속에 커다란 장독하나묻고 거기에 술담아서 한주전자 떠오며 나도 한모금 마셨던 생각 옥수수로 담은 술도 맛나더라고요 몆년전에 친구들과 안성 에서 마셨던 생각이 나는군요..정선아리랑 소리가 곁들어지면 이 절로나지요